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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Apr 24. 2020

바닥 끝에서 시작하게 하는 오기

기억 하나. 

대학교 졸업을 한 학기 남긴 여름방학, 8월의 중순 어느 날 나는 8개월 넘게 준비해온 자격증 시험장에 앉아있었다. 전공과 다른 길을 가기 위해 그동안 준비해온 시험이었다. 그런데 집중은 되지 않고 손이 덜덜 떨려왔다. 머리도 아프고 메스꺼움도 심해져 갔다. 그 전날 마신 술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거의 두 달 가까이 매일 술에 취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낮에는 학교 도서관에 갔고 저녁에는 자격증 준비 학원을 다녔지만, 낮동안 억제시켜둔 감정들은 해가 떨어지고 나면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올라 결국에는 술집에서 하루를 마감했다. 어떤 날은 사람들과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어떤 날은 혼자서.. 그렇게 술에 완전히 취해서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른 체 뻗었다가 눈을 뜨면 다시 옷을 갈아입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다 어느 날에는 욕조 안에 물을 틀어놓은 체 잠들었다가 숨 쉬기 괴로워 깨어난 적도 있다. 그렇게 깨어났을 때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하는 아찔한 생각과 더불어 그래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을 울었었다. 그렇게 시한폭탄 끌어안고 사는 날들을 반복하다가, 자격증 시험 전 날에도 나는 견디지 못하고 술을 마셨고 그 결과가 그거였다. 

시험 보는 내내 집중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화장실로 뛰어가 올리기까지 했다. 그러고 돌아오니 시험이고 뭐고 간에 엎드려 눕고 싶어 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고 집중하려고 하는데 제대로 마무리하기도 전에 시험 종료 종이 울렸다. 맥이 탁 풀려 시험장을 나왔는데 한 여름답게 해가 쨍했다. 울고 싶어 졌고 울음이 끓어올라 숨 쉬는 것 자체가 버겁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돌덩이 같은 게 속에 가득 차는 것 같았다. 그 길로 나는 아버지가 일하시는 회사에 찾아가 처음으로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집을 나가겠노라고 말했다. 

그 후 한 달 후 나는 내 일생 첫 비행기를 타고 어학연수의 명목으로 영국으로 날아왔다. 


기억 둘. 

케임브리지에서 대학원 유학 생활을 시작한 지 두 달 가까이 된 어느 날이었다. 11월의 어느 날이었고, 해는 눈에 띄게 짧아지고 있었고 온도 변화도 심하게 느껴졌다. 케임브리지 북쪽에 살고 있던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Castle Mound에 멈췄다.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진 케임브리지에서 유일하게 오르막길이 있는 곳이다. 성터라는 말이 무색하게 돌계단 몇 개 있는 언덕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나마 사람이 적었고 트인 기분이 들어 갑갑할 때마다 종종 들리던 장소였다. 그리고 그 11월의 어느 날, 나는 분함과 화가 뒤섞인 마음을 가지고 그 언덕에 서있었다.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고 첫 학기 말에 마지막 조별 과제 발표가 있었던 날이었다. 내가 속한 조 인원은 나를 포함한 총 4명. 나처럼 대학원 생활을 처음 시작한 중앙아시아에서 온 A, 그녀의 친한 친구 B, 그리고 케임브리지에서 학부를 마치고 진학한 영국인 C. A는 조가 정해진 뒤 초반부터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유학생활이 처음이라 모든 게 어색했던 내가 같은 조원이라는 걸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그걸 숨기지도 않았다. 어쩌면 자기 나라 최고 엘리트 위치에서 유학 온 자신과 비교했을 때 내가 급이 떨어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색한 내 영어 발음과 유창하지 못한 내 영어 실력을 대놓고 조롱했고, 과제를 같이 할 때마다 사사건건 태클을 걸었다.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자기는 할 말 다 했으니 너 알아서 해라 하는 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일수였고, 조별 의논할 때 내가 말을 할 때마다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놓고 눈을 굴리거나 한숨을 내쉬었고, 어떨 때는 내가 말을 하든 말든 잘라먹고 자기 할 말을 하거나 주제를 돌리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그때 나는 너무도 어수룩했다.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로 화를 내야 할지 몰랐고, 영어로 무슨 말을 해서 내가 화가 났다는 걸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조별 모임 때마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지만, 그녀와 친한 친구인 B는 물론, C 역시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외지에서 내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나는 매일 미치도록 공부했다. 한 학기가 정확히 8주였는데 (다른 영국 대학은 한 학기가 11-12주다) 매주 나오는 과제의 양이 어마어마해서 일주일에 반은 밤을 새우고, 반은 3-4시간 자고, 주말에는 15시간 넘게 몰아 자는 패턴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떤 날에는 진짜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미칠 것 같기도 했다. College에서 어떤 유학생이 스트레스로 밤마다 벽에 머리를 찧어댄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머리를 찧어버리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꾸역꾸역 한 학기를 버티다가 마지막 조별 과제 발표가 있었는데... 우리는 미리 발표 분량을 다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앞에 나가 발표를 순서대로 하다가 내 차례가 되었을 때, 그녀는 내게 순서를 넘기지 않고 그대로 이어 발표하고 끝내버렸다. 황당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는데, 그녀는 나를 투명인간인 양 취급하며 발표를 마무리했고, 당연히 교수는 내게 한 게 뭐냐고 물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멍해 대답할 말을 바로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I don't know'하고 대신 답했고 그게 마지막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휘말려서 그 후 다른 조들의 발표 내용도 교수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고 내가 그녀에게 겨우 꺼낸 말은, 'Why did you do that?' 그게 다 였고, 그녀는 자기는 아무 잘못 없다는 듯 아니, 설명할 가치도 없다는 듯 나를 보지도 않은 체 그게 우리 조를 위해 나은 선택이었다, 그런 소릴 하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 길로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려갔고 그렇게 부글거리는 속을 끌어안고 언덕 위에 올라 케임브리지 정경을 마주 보며 서있었다.  


그게 내가 선명히 기억하는 시작과 관련된 두 순간들이다. 오래 추락하다 마침내 바닥에 부딪친 듯 고통이 실체화되어 느껴진 순간들. 그동안 무뎌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그냥 견디고 있었구나. 그렇게 견디기만 해온 내게 화가 났고, 나를 이렇게나 하찮게 취급해 온 주위 상황과 그걸 내 육신과 정신을 축내며 감당하고 있던 내 멍청함이 싫어졌고, 제대로 견디지도 못하면서 매일 마주해야 했던 그 망할 시간들이 지긋지긋해졌고, 나를 호구 취급하며 룰루랄라 몰려오고 있는 절망들이 증오스러웠다. 그리고 아주 통속적 이게도 그 끝에서야 시작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8개월 동안 준비해온 자격증 시험을 망치고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단지 집을 나가야겠다는 이유로, 그게 집과 멀면 멀수록 좋다는 조건만 걸었던 나는 영국으로 떠날 기회를 얻었고, 어학연수의 명목으로 시작된 영국 생활 끝에 나는 유학생활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유학생활 초기에 호되게 당하던 나는 그 날 Castle Mound에서 케임브리지를 내려다보며 살아남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래, 살아남아주마, 다시는 누구도 나를 이렇게 취급하지 못하도록 이 땅에서 살아남아주마. 그렇게 나는 원래 1년으로 끝났을 내 유학 계획을 바꿔 박사과정을 결심했고, 그게 내 16년 영국 생활의 시작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바닥을 치고서야 새로 시작할 결심을 했고, 실제로 새로운 시작을 하긴 했지만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다. 삶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서 한국만 떠나면 고통이 사라질 줄 알았던 나는 영국에서도 똑같이 괴로웠고, 술 대신 불규칙한 식습관과 스트레스로 신경성 위염을 얻었다. 그 생활의 마지막에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 유학생이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유학생활 동안 세계 곳곳에서 몰려온 금수저들과 천재들 사이에서, 위계화된 영국 계급 사회의 틈에서, 수많은 차별을 경험했다. 


그렇게 내가 지나온 길은 완만한 곡선이 그려진 평지라기보다 울퉁불퉁한 고갯길에 가까웠는데, 아주 거친 내리막길 뒤에는 다시 아득바득 올라가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그리고 그 오기가 내 시작의 이유다. 용기도 아니고, 그냥 이대로 찌그러져 있지 않겠다는 오기. 나를 이만큼 밀어 넣었으니 나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는 오기. 감히 내 인생에서 나를 밀어내려고 나를 이따위로 몰아치다니, 딱 기다려라, 내가 너한테 지기 싫어서라도 어떻게든 기어 올라가 줄 테니, 하는 그런 독기 서린 오기. 



원체 성격이 삐뚤어져서 그런지, 사람이 모가 나서 그런 건지, 파스텔 색이 묻어나는 희망찬 시작의 메시지는 아무래도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같은 성격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스스로를 연료 삼아 달리는 꽤 피곤한 삶일 거라 감히 짐작합니다. 뭐 그래도 검은색도 색이라면 색이니까요. 아니 사실 색이 무슨 상관인가요, 스스로의 색을 정하고 남들이 내게 입히려는 색에 묻히지만 않으면 되는 거죠. 그러니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묻히지 마시길. 그게 독기든 오기든 상관없으니 다시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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