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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May 17. 2020

여자애가 그게 뭐니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내게는 두 아이가 있다. 만 7세인 첫째 아들과 만 5세인 둘째 딸. 더불어 오랜 궁핍한 해외생활로 터득한 다양한 자급자족의 재주(!)도 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옷 수선은 물론 집에서 아이들의 이발도 직접 담당한다. 이번에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에 발이 묶이면서 주말에 다시 엄마 미용실을 열었는데, 첫째의 이발이 끝나고 나니 둘째도 해달라고 졸랐다. 안 그래도 예전에 해달라고 졸라서 단발로 잘랐기 때문에 그냥 끝만 다듬어 주면 되겠지, 하고 손님을 받았는데... 이 작은 손님이 헤어스타일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자기 귀 옆에 손을 대며, '이만큼' 잘라 달라고 주문했다. 그래서 그렇게 단발을 만들기에는 너무 짧다고 말해줬더니, 첫째를 가리키며 '단발이 아니라 (첫째 이름) 만큼'하고 주문했다. 그럼 너무 짧아질 텐데 진짜 괜찮겠냐고 물으니 아주 확신에 찬 표정으로 'Yes'하고 비장하게 대답했다. 뭐 손님이 원하신다는데 해드려야죠, 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슥삭슥삭 자르다 그래도 행여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 매일 아이가 울어대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될까 봐 중간중간 확인 절차를 걸쳤는데, 이 작은 손님은 계속 'Shorter' 하며 더 짧게를 주문했다. 그러다 보니 어차피 사람들 볼 일도 없는데 잘라버리지 뭐, 하는 대담한 생각이 들어 첫째 머리 다듬듯 슥삭슥삭 짧게 다 잘라 버렸다. 다 끝났다고 말하자 아이는 자기 모습을 거울에 요리조리 비춰보더니 마음에 든다며 씩 웃었다. 첫째는 둘째의 모습을 보고, 'She's like me!'하고 웃었고, 남편은 욕실 문을 열었다가 감탄사인지 놀람인지 알 수 없는 소릴 내며 잠시 멈췄다. 그러고는 '괜찮냐'하고 물었다. 도대체 뭐가 누가 괜찮냐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는 좋아하고 나도 손님이 마음에 든다 하니 영업 끝난 기분이 들어 괜찮다고 대답해 주고 말았다. 


그런 후 나중에 시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했는데 시부모님은 놀란 표정을 감추시지 못하고, '애 머리가 왜 저러냐?'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애가 잘라달라는 데로 잘라줬어요'하고 대답하니, 뭐라 바로 말은 못 하시다가 그래도 너무 남자애 같은 거 아니냐, 왜 아이가 그런 머릴 원하느냐, 무슨 이유라도 있었던 거냐, 그런 질문 등을 하셨다. 머리 스타일 바꾸는데 아유가 있나요, 지 좋으면 하는 거지, 하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냥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리고 나중에 한국에 계신 엄마와 영상 통화할 때 엄마는 아이의 머리를 보자마자 말했다. 

"여자애 머리가 그게 뭐니!" 

놀람과 속상함, 그리고 나를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다. 지가 해달래서 해줬는데 왜요, 하고 대답하니, "그래도 그렇지, 여자애가!" 하셨다. 엄마의 그런 말을 들을 때면 평소 때는 지나치던 길가의 웅덩이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 맞다. 그래, 그랬지, 하는 씁쓸한 기분과 함께. 예를 들면, 영상통화를 할 때 당연히 주위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는데, 둘이 다투는 모습을 보시거나 하면 꼭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다. 

"(둘째 아이) 쟤는 진짜 저거 한번 혼내야 된다. 여자애가 오빠한테 그럼 안되지!"


내가 자라면서 얼마나 많이 들었던 말인가. 나도 위에 두 살 터울의 오빠가 있는데, 자라면서 저 말을 수두룩하게 들었다. 둘이 같이 싸우다 목소리가 높아지면, 어디서 여자애가 목소리를 높이냐며 야단을 맞았고, 오빠한테 야, 자, 하며 말버릇이 없다고 혼났고, 몸싸움이라도 벌어지면 여자애가 어디서 오빠한테 손찌검을 하냐며 되레 내가 맞았다. 그렇게 오빠가 집안의 비호를 받으며 고작 2년 먼저 태어났다는 사실과 남자라는 사실만으로 귀천이 정해진다는 걸 깨닫으며 집안에서 드러누워 주문하는 삶을 누릴 때, 나는 나이가 좀 더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입을 닫아야 하는 현실을 마주했고, 여자라는 사실만으로 어릴 때부터 집안일과 요리를 돕는 게 아주 당연한 삶을 요구받았다. 이유도 알 수 없었지만, 그 상황이 내게 불공평하다는 걸 어린 나 역시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어렸을 때 내가 가장 싫어하던 사람은 오빠와 엄마였다. 물론 그러다가 학교에 가니 선생님도 똑같은 소릴 하며 내 목소리를 막았고, 내게 지정된 옷차림과 말투, 행동을 요구했고, 엄마는 물론 친척들도, 나중에 대학에서 만난 선배들이나 심지어 동기들도 비슷한 소릴 하드라. 하하 정말 이 뭣 같은 사회. 




그럼 한국밖에 나오니 그게 덜해졌냐, 그래서 그 커다란 진흙투성이의 웅덩이를 잊고 살았나. 뭐 그렇지만은 않았다. 밖에 나와서 여러 사회,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가끔은 한국사회는 양반이었네, 하고 생각하게 될 때도 있으니까. 그래도 달라진 거라면 내가 좀 더 뻔뻔해졌다는 거고, 반박할 독기가 더 생겼다는 거고, 무엇보다 당장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채워 넣었다는 거다. 굳이 비유하자면 아무리 진흙탕이라도 웬만큼 안전하게 달릴 지프차를 얻게 된 거라고 할까. 그런데도 가끔 이렇게 예전에 익숙하게 들었던 말들이 훅, 하고 실시간으로 찌르고 들어오면 새삼 깨닫게 된다. 아, 내가 잊고 있었다고 그게 없어진 건 아니었지. 


그래서 또 새삼 생각했다. 엄마가 되길 잘했다고. 내 아이의 엄마가 내 엄마 같은 사람이 아닌 나라서 다행이라고. 머리를 짧게 자르든 말든, 첫째 아이가 입던 바지에 후드티를 입고 다니든 말든, 내게 둘째 아이는 여자애가 아닌 그냥 그 아이니까. 작년에 둘째 아이 유치원 담임이, '(둘째 아이)는 남자애들과 노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을 듣고, 'Yes, so?'하고 반문했던 것처럼, 첫째와 둘째 둘 다 태권도와 럭비를 하는데 그걸 보고 시부모님이 '(둘째 아이)는 여자 앤 데 저런 걸 하네'하고 말씀하셨을 때, '(첫째 아이)도 남자 앤 데 저걸 하잖아요'하고 대답했던 것처럼, 누구든 그 아이의 성별을 이유로 행동을 제재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먼저 독기 한 겹 발린 방패를 꺼내 들고 막아설 테니까. 


그러니 딸들아, 독해지자. 너의 생물학적 성별이 네 행동을, 말투를, 스타일을 결정하게 두지 말자. 너는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너를 표현할 자유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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