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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May 25. 2020

영국 직장생활에 필요한 두 가지

적당한 가면 만들기 

코로나 상황이 계속 지속되면서 영국에서의 재택근무도 2달을 넘어서고 있는데, 동시에 일 량이 아주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초반에는 나름 육아, 재택근무, 개인 시간 조절이 어느 정도 가능하던 게 한 달 전부터 서서히 무너지더니 이번 주는 매일 야근에 스트레스가 아주 최고치를 찍었다. 위에서는 말이야 개인의 Wellbeing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일을 빨리 해결하라는 독촉장도 동시에 날아오니 이건 뭐 위장제 복용하며 술을 들이켜라 그런 소리 같다.

그렇게 아침에 눈을 떠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일을 하는 게 반복되니 수요일에는 진짜 죽을 맛이 되었다. 몸이 힘드니 아이들 홈스쿨링을 담당해야 하는 내 차례가 왔을 때도 제대로 집중하기 힘들었고 인내심도 바닥을 치고.. 그러면서도 다시 일을 하러 책상 앞에 앉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헤드폰을 머리에 두르면 다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경험들을 토대로 봤을 때 영국에서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할 때는 두 가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한다. 


하나. 당신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 특히 그게 부정적일 경우. 


언젠가 영국을 소개하는 어떤 책에서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어떤 위기 상황이 닥치면 고립되어 다 같이 죽는다, 뭐 그런 생각이 은연중에 있어서, 가능한 문제를 일으키려 하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이 감정을 분출하기보다 속으로 담아두며 가능한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려 한다고. 그게 얼마나 근거 있는 주장인 지 모르겠지만, 영국인들이 감정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다. 그래서 그런지 누군가 자신의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냈을 때 그걸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영국인들도 많이 볼 수 있다 (물론 친분이 깊어진 다음에야 이 경계도 모호해지지만...). 특히 직장처럼 다수의 타인들이 포함된 공간에서 누군가가 대놓고 감정 표현하는 걸 보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즉, 간혹 듣게 되는 한국에서의 갑질, 슈퍼마켓에서 손님이 점원을 무시하거나 소릴 지르는 그런 행동이라든지, 음식에 대해 대놓고 불평을 한다든지, 그런 일을 영국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냥 대놓고 표현하는 문화가 없다는 거다. 그럼 표출하지 못한 불만들은 어디로 가나, 나중에 듣게 된다. 대부분 문서상으로. 그것도 아니면 잘못한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당한 입장에서 그냥 피하면서 마무리되기도 한다. 음식이 어땠냐,라고 묻는 말에, 'It was good, thank you'하고 넘어가지만 나오자마자 저긴 다신 안 간다,라고 말하고 안 간다거나, 나중에 리뷰를 부정적으로 남긴다던지. 아니면 그 당시 상황에서는 'OK'하고 넘어갔지만, 나중에 장문의 Complaint letter를 보낸다던지, 자기 주위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 간접적으로 잠재적 손님의 발길을 끊는다든지 등등.. 그래서 굳이 듣게 되는 불평은 문서상으로 많이 전달되지, 대놓고 얼굴을 보고, 심지어 목소리를 통해서도 잘 전달되지는 않는다. 비슷하게 문제 해결을 위해 감정적 호소를 하는 경우도 공적에서는 거의 볼 수 없다. 가끔씩 사적인 공간에서 '비밀유지'의 조건을 걸고 감정표출이 되긴 하지만. 

이런 걸 보다 보면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Hello, how are you?'라는 질문에 'I'm fine, thank you, and you?'하고 답하는 걸 배우는 게 그냥 예시가 아니라 그게 가장 정답에 가까운 공식이기 때문이 아닐까. 바꿔 말하자면, 상대방이 내게 인사말을 건넸을 때 그 사람은 'I'm fine/good/well'외의 답을 들을 준비도, 기대도 거의 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사실 이건 친한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성립된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에는 늘 먼저, 'I'm fine'하고 대답하고 'and you?'하고 물은 뒤 상대방의 답에 따라, 뒤에 따라오는 침묵의 길이에 따라, 친근함의 무게에 따라 실제의 기분을 드러내거나 감추니까. 그리고 직장에서는 감추는 일이 훨씬 많고... 


둘. 그럴 때 당신에게 필요한 건 유머감각. 


아무리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상대방에게 당신이 벽을 친다는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가끔은 엿같은 기분이라도 어쩔 수 없이 흘러나올 수 있고, 가끔은 어느 정도 드러내는 게 내 정서상에도, 가끔은 일에도 도움이 될 때가 있으니까. 그럴 때면 그걸 어떻게 포장하느냐가 중요해진다. 날 것 그대로 내보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꼭꼭 숨기게 감출 수도 없으니 적당한 포장지를 입혀야 하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게 유머의 요소를 섞는 거다. 솔직히 영국 와서 지내면서 말을 하는 방식 중 가장 달라진 게 있다면 아마도 'Sarcasm'이 아닐까. 그러니까 뭔가 화나는 게 있다면 욕이 나오기 전에 습관적으로, 'great, wonderful'하고 말이 씹어 나오는 거다. 아이들이 '왜 엄마는 화가 나있는데 좋다고 말해요?'하고 자주 묻는 것처럼...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갖가지 뭣 같은 상황에서도 일단은 침묵이 있고, 웃음이 있고, 그리고 꼬아 말하기가 나온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지만 뭣 같다는 걸 드러내는... 그리고 이건 나뿐이 아니라 내가 직장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기본 기능처럼 탑재한 대화 방식이기도 하다. 얼굴을 보고 있든 목소리만 듣고 있든 아주 잘 읽히는 그런 신호로. 그래서 어쩌면 영국인들이 'black humour'에 능통하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지만;; 

Sarcasm이라는 게 한국말로는 빈정댐, 비꼬기,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이걸 상대방에게 직접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즉, 직장에서 누군가가 일을 개판으로 해놨을 때 그 당사자에게 대놓고, 'you've been so busy'하는 식으로 말하면 그건 무례한 게 되니 절대 쓸 말이 아니다 (이러고 나면 나중에 거의 100% 화살이 내게 되돌아온다;;). 그러니 여기서 말하는 건 상황을 꼬아 피식 웃게 돌려 말하는 풍자에 가까운 말들이다. 상황이라든지 남들도 다 공감할 수 있는 제삼자에 관한 이야기라든지. 그리고 이렇게 여러 번 꼬아서 웃음을 섞어 던져 놓으면, 저 사람은 할 말은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에 잠식되진 않는구나, 하는 믿음도 묘하게 주고,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의 유대도 형성한다. 그러니 다 숨기는 것보다는 드러내는 게 중요하지만, 날것의 감정은 사람들을 겁먹게 하거나 피하게 하고, 상황과 관계없는 우스꽝스러운 소리는 사람을 가볍게 만들거나 문제를 회피하려는 행동으로 보이니까. 그러니 적당한 때에 적당한 날카로움을 가진 비수를 적당한 편안함과 웃음으로 감싸서 던져 날려야 한다는 소리다. 말로 날리지 못한다면 적당하게 건조하거나 날 선 웃음도 사실 괜찮고. 


그렇게 이 두 가지는 내가 영국에서 직장/사회생활을 할 때 필요한 가면을 만드는 기본 요소가 된다. 그리고 그 위에 나는 적당한 색을 한 번 더 덧칠한다. 업무에 맞게, 상황에 맞게, 내 위치에 맞게. 그러고 나면 직장인인 내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좀 웃긴 건.. 이런 대화방식들이 사실은 계급 차이도 반영한다는 거다. 적어도 내가 본 경우들은 그랬다. 워킹 클래스일수록 감정은 직설적 표현이 많고, 한 겹 씌우는 sarcastic 한 대화법보다 욕을 바로 쏟아내는 걸 들을 때가 많다. 그런데 위로 올라갈수록 감정의 표현은 절제되고 겹겹으로 쌓인 말들을 볼 수 있다. 내가 케임브리즈에서 수없이 만났던 이들과는 첫 만남이라도 대부분 호의적이고 친절하고, 그래서 한 끼의 식사를 같이 할 때는 적절한 대화 주제와 웃음이 뒤섞여 즐겁지만, 그렇다고 '우리 좀 맞는 거 같은데 친구 할까?'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물론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인맥이라는 상호 동의가 암묵적으로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그런 속모를 한 번의 만남들이 많았던 것처럼.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내가 그러고 있는 걸 볼 때가 많다. 적당한 호의와 친절, 괜찮은 대화. 하지만, 막상 상대방이 또 만나자,라고 할 때 주저하는 그런 나. 그리고 직장에서도 괜찮은 동료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걸 다 오픈하진 않는 그런 나. 


그러고 보면 어쩌면 내가 직장생활에 필요하다고 믿고 만들어온 내 가면도 내가 그런 것들을 영국 생활하면서 봐왔기 때문에 나 역시 자연스레 그게 맞는 방법인 양 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들 속에서 무리 없이 잘 스며들기 위한 위장보호 옷 같은 거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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