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 차이가 심한 두 물 사이를 헤엄치는 것
이미 한달쯤은 되었을 거다. 어느날 메일 Inbox에 고위 공무원 3명일 포함된 메일 하나가 날라왔다. 고위공무원 (Senior Civil Servants) S씨와 D씨가 담당하는 부서에서 T란 아이디어가 나왔으니 프로젝트로 진행 시켜봐라, 하고 내 상사이신 고위공무원 P씨께서 내게 손수 보내신 메일이었다. 그런데 메일을 읽기만 해도 걸리는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냥 까다로운 정도가 아니라 그 아이디어를 실행시키려면 조직 안팎은 물론 자칫했다가는 국민들은 물론 사회단체까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뜨겁다 못해 용암에서 바로 건져낸 것 같은 수준의 아이디어 었다.
읽으면서 머리가 찡 해오는데 그래도 어쩌랴, 내발로 찾아 들어온 조직사회의 룰이라면 같이 장단맞춰 돌아야지. 그래서 일단 이 일과 관련된 법률팀을 비롯한 해당 부서 몇 군데의, 나와 같은 직급인 동료들에게 상황 설명을 포함한 해결점을 찾기 위한 메일을 날렸다. 그리고 속속들이 날라오는 답문들. 아니나 다를까, 내가 걱정했던 이유들이 좀더 디테일한 모습을 하고 내게 날라 오기 시작했다. 그 글들을 읽으며, 그래, 그렇지, 맞아, 하고 격하게 공감하면서도 머리 한켠에서는 이걸 어떻게 위에 설명시켜야 하나, 하는 고민이 바쁘게 엉켜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이건 도저히 아니다 싶어 이런 안되는 이유들을 조심스레 포장한 메일 하나를 위에 계신 분들에게 날렸다. 그러자 그분들은 내 동료의 상사들인 고위공무원에게 직접 연락을 해서 확답을 받은 뒤, 일단 그 아이디어를 철수시켰다. 다행이다 싶어 잊고 있었는데, 이 주 전에 또 메일이 하나 날라왔다. 읽어 보니 원래 아이디어가 무마된 뒤 고위공무원들 회의에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제는 그 고위공무원들의 상사인 더 높으신 분들이, 그럼 T 아이디어가 안되면 M 아이디어는 어때? 하고 말을 던지셨다는 거다. 그래서 이제는 T만큼이나 황당하고 그러나 더 두리뭉실해진 M 아이디어가 내 앞에 툭 떨어졌다. 읽자 마자 피가 머리로 쏠리면서 모니터를 뒤엎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일단은 자제하고 물 한컵을 마신 뒤 자리로 돌아왔다. 이제는 그래 할 테면 해보자, 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 후 일주일간 진짜 열나게 모든 자료 수집을 했다. 그동안 높으신 분들은 번갈아 이메일을 보내며 사람 속을 뒤집어 놨지만 조선 시대 시할머니 시어머니 큰집시어머니, 작은집시어머니 줄줄이 계신 집에 처음 시집간 맏며느리 같은 심정으로 일단 참고 견뎠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마감일을 지키기 위해 밤 11시 반까지 일해서 보고서를 날렸다. 그 메일 후에 자동으로 날라오는 그들의 휴가 일정 통보에 열이 받긴 했지만, 뭐 내가 해야할 뜨거운 감자는 익혀서 넘겼으니 그걸 가지고 샐러드를 해먹든 으깨 먹든 내 알 바 아니지. 그리고 나서 며칠이 지나고 잠잠해지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공휴일을 겸한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신 분들이 줄줄이 돌아오시자 다시 메일이 날라오기 시작했다. 시할머니들의 독촉을 받은 시어머니들의 메일이었다. 보고서는 고맙다, 요점이 잘 정리되어 있었는데, 시할머니들이 보실라면 이것보다는 짧은 요약본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아니, 줄이고 줄인 4페이지 보고서도 못읽을거면 어쩌라고. 1페이지 요약본 주면 또 주구장창 설명하라는 요청을 할거면서. 그래도 어쩌랴. 옆에서 짜다 달다 맵다 훈수 두는 시어머니 여럿 보는 앞에서 요리하는 심정으로 다시 부글부글 국을 끓였다. 다 끓여서 갖다 놓으니 이제는 이게 진짜 그 국이 맞냐, 그래서 어떻게 먹으라는 거냐, 등등의 질문이 나왔다. 그러더니 이제는 시어머니들끼리 그 국이 아니니, 저 국이었니, 말씀이 많으시다. 아 진짜. 입에서 xxxx욕이 저절로 나왔지만 꾹 참고, “쟤가 S 시어머니와 독대를 하여 답을 받아내겠습니다”하고 예의있게 말한 뒤 독대를 요청했다.
그렇게 1시간 넘게 이어진 독대. 우리 집 김영감이 문서를 관리하는데, 얘기는 해봤느냐, 최부인이 그쪽 요리에 대해 잘 아는데 등등... 거기에, “네, 김영감과 최부인은 물론, 이모씨, 최모씨, 김모양, 박모군 등등과도 다 얘기해봤지요” (아마 당신보다 당신 식솔들과 더 많이 대화한 거 같습니다, 하는 말은 차마 하지 않았지만) 그러고 나니 그제야 말을 들을 준비를 하셨다. 그렇게 오래 모든 상황을 다 설명하고 왜 그걸로 국을 끓여내도 먹을 수 없는지 설명을 하고 나니, 그제야 수긍하셨는지, “그래, 그럼 먹지도 못할 국을 끓일 필요는 없지”하셨다.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예, 그러셔야죠, 이제 그 국 갖다 버리고 잊어버립시다, 하고 쐐기를 박으려는데... “그럼 그 국이 먹을만한 지 아닌지 한번 시험해보는 건 어떠냐?”하시는 거다. 아니, 이건 또 뭔 개소린가요, 하는 말이 당장 튀어나오려는 걸 집어 삼켰다. 그런데 이 분이 그 생각이 해결책이라고 확신하셨는지, 내가 뭐라 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래, 그거 괜찮겠다, 네 시어머니와 상의해 보자”하고 당장 행동에 옮기시는 거다. 맘같아서는 바지가랑이라도 잡고 다시 한번 생각하시라고 하고 싶었지만, 테크놀로지의 속도는 나보다 빨랐고, 내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당장 시어머니들의 회의에 나 혼자 툭 던져졌다. 그 분들은 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 하고 기쁜 마음으로 말씀을 나누신 뒤, 내게 “고맙다”라는 칭찬을 곁들이시며, 다시 임무를 내리셨다. 거기다가 독대가 정말 도움이 되었으니 이제 매주 만나자, 하는 요청을 곁들이셔서....
그렇게 역시나 T, M만큼이나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사이즈가 축소된 D를 가지고 모두 기뻐하는 동안 나 혼자 이 넘을 요리할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다. 거기다 이제는 매주 정해진 마감일이라니. 이 사실을 T와 M 아이디어에 연관된 이들에게 다시 알리니 한 동료가 말했다.
“I sympathise with you”
나와 같은 직급에 속한 친한 동료 J는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동시에 우리 머리 위에 올려진 다른 피라미드의 최하단에 있다고. 왠만한 업무 처리에 있어서 사람들은 우리에게 방향 제시나 결단을 요구한다. 그리고 일이 잘못되면 대부분 그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한다. 개인의 사소한 잘못 때문이라도 그걸 미리 알아서 조치하지 못한 책임, 혹은 그런 사소한 잘못을 하도록 미리 교육하지 않은 책임, 그런 잘못을 하고도 일이 커질 때까지 알아채지 못한 책임, 그 개인이 미리 상부에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런 시스템이나 문화를 만들지 못한 건 아니냐는 책임 등을 우리에게 묻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딱 조선시대 맏며느리 같은 기분이다. 위에서는 시할머니, 시어머니를 비롯한 온갖 집안 어르신들의 요구가 내려오고, 밑에서는 왜 우리가 그걸 해야 하냐고 되묻는 동서들과 시동생들부터 어르신들이 무슨 말을 하든 말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아이들까지 챙겨야 할 것들이 수두룩 하다. 그 중간에서 우리는 어르신들 비위 거슬리지 않게 알아서 맞추고, 오해가 생기지 않게 말을 조심히 전해야 하며, 사람들 심정도 제대로 헤아려 혼자 힘들어 하는 이들이 없도록 골고루 신경써야 한다. 그 와중에 뭐 하나 잘못되면 말을 잘못 전하거나 집안 관리 잘못한 맏이의 탓이고, 집안이 잘되면 어르신들의 바른 지도 덕분이고, 누군가 눈에 띄게 잘하면 그 개인의 뛰어남을 칭찬해서 집안에 도움이 되게 이끌어야 한다.
그동안 해왔던 일들 - 대학이나 컨설팅 회사에서의 일들 - 은 사실 조직 문화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독립적으로 일했고, 직급이란게 있긴 해도 그게 내 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진 않았으니까. 나는 그냥 내가 할 일을 내가 알아서, 조직에 해가 되지 않게, 효율적으로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러다 위계질서가 상당히 크게 자리잡고 있는 조직에 들어와보니 배우는게 참 많다. 예전에도 Office Politics란 게 있긴 했지만, 그게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선택 가능한 거였다면, 최근에는 그 사내 정치가 좀더 복잡한 성향을 띄고 있다는 것도 새로 배우고 있고.
하여간 간단히 말하자면, 지금 위치는 딱 온도 차이가 심한 두 물 사이를 수시로 오가며 수영하는 기분이랄까. 물론 내가 먼저 가라앉지 않게 조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