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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Jun 05. 2020

평생직장은 없다

직장은 징검다리 같은 것

내가 현재 부서에 들어올 때부터 있던 동료 C가 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인데, 폭풍우 치던 구조조정의 피바람 속에서도 살아남은 얼마 안 된 사람이었다. 피바람으로 갈려 나간 사람이 많았기에 살아남았다는 사실 만으로도 거의 ‘노장’의 분위기를 풍기는, 그만큼 믿음이 가는 동료이기도 했다.

그런데 일주일 전에 간부회의에서 갑자기 C가 회의 막판에,

“I think I have to tell you this before the end of the meeting. I am leaving”

하고 폭탄을 던졌다. 부서 이동을 보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그의 말은 생각 외로 충격적이게 다가왔다. 아마도 마치 마스코트처럼 내가 지금 있는 부서에 속하면서부터 봐왔던 존재였기 때문이겠지.


공무원이라고 하면 흔히 안정적인 직업일 거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공무원은 한 번 들어오면 웬만해서는 잘리지 않는 철밥통 직장이긴 하다. 그리고 복지 같은 걸 따졌을 때 사기업보다 훨씬 안정적인 것도 맞다. 그래서 10년 이상 여기서 근무한 사람들을 꽤 많이 만나기도 한다. 적당히 내가 해야 할, 혹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적당히 돈을 벌기에 적당하고, 그래서 자칫하면 적당히 고여있기도 좋은 곳이다. 엄청난 실수를 하거나, 인성을 의심하게 할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해고당할 확률이 극히 적기 때문이다. 근무시간도 융통적이고, 정시 퇴근도 가능하며, 마감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그걸 어긴다고 당장 해고나 감봉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만약 상사가 마감을 지키지 않는다고 들들 볶으면 도리어 상사의 태도를 문제 삼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에 일을 엄청나게 잘한다고 그게 바로 승진으로 이어지거나 엄청난 보너스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reward and recognition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일반적으로는 50파운드, 최고로는 350파운드를 주는데, 누군가가 명확한 사유를 들어 신청하면 그게 committee에 안건으로 올라가고 다 동의하면 받게 된다. 그런데 프로젝트 하나를 잘 처리해서 동료 A의 추천으로 보상을 받았으면, 동료 B가 같은 이유로  추천한다고 해도 돈을 두 배로 받는 게 아니다. 그렇게 따지면 일반적으로 한국돈으로 10만 원도 안 되는 보너스를 받는 셈이니 그렇게 후하다고 볼 수도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농담 삼아 내 시간 노력 다 들여서 진짜 잘해도 50파운드도 받을까 말까 하는데, 차라리 안 받고 그냥 적당히 일하면서 내 생활 즐기는 게 낫지 않느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동승진이라는 제도가 없다. 여기서는 승진을 하려면 승진하려는 자리가 일단 나야 하고, 자리가 나면 무조건 새로 지원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가 외부에도 공고된 거라면 외부 지원자와도 경쟁해야 한다. 예전 블로그에서 다양한 직업에 도전하는 방법을 쓴 적이 있는데, 거기서도 말했다시피, 영국에는 공무원 시험이 따로 없지만 입사 절차가 까다롭다.  일단 지원서에 뭘 적어야 할게 많다. 일반 직업에 지원할 때 이력서와 Cover letter (자기소개서) 정도만 준비하면 된다면, 공무원을 지원할 때는 그 일에 내가 맞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뭐라 구구절절 적어야 할 것들이 많다. 지금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번 sifting (입사 지원서를 바탕으로 이차 면접에 올 사람들을 추려내는 과정), 그리고 interview (이차 면접)에 참여했었는데, 일차 지원서 심사에서 이미 많은 수의 사람들이 제대로 된 양식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수두룩 떨어지는데, 그렇게 떨어지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정해진 방식을 따르지 않고, 일반 이력서 넣듯 그냥 복사해서 붙이기를 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몇 십통, 혹은 그 이상의 이력서를 살펴봐야 하는데, 쓰라는 방식 조차 따르지 않은 지원서들은 내용이고 뭐고 볼 것 없이 일단 초반에 걸러낸다. 하라는 방식도 따르지 않은 사람들을 왜 우리가 시간을 들어 고려해야 하느냐, 그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일차로 걸러낸 다음, 적힌 내용을 자세히 읽어서 다시 추려내고, 그렇게 추려낸 지원서들을 바탕으로 다시 인터뷰 패널끼리 의논을 해서 면접에 초대할 최종 인원을 결정한다. (참고로 영국에서 지원서를 낼 때 사진을 붙이는 경우는 모델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 공무원 지원을 할 때는 개인 정보를 지원서 내부에 첨부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즉, ‘이런 경험을 쓰시오’하는 질문에, ‘제 이름은 ㅌㅌ이고 ㅁㅁ 출신이며 ㅎㅎ 대학을 나왔습니다’하고 적으면 바로 실격 처리한다. 그래서 심사를 하는 우리에게 문서가 올 때 이미 이런 건 다 걸러진 체로 온다.)


이렇게 심사를 할 때는 내부 자건 외부 자건 상관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내 부서에서 경험을 오래 쌓았다고 해도 당연히 내가 뽑힐 거라는 장담을 할 수가 없다. 일을 아무리 잘해도 지원서를 잘 못쓰면 이미 첫 단계에서 탈락할 것이기 때문에 (반면 대학에 있을 때는 솔직히 내정자가 있으면 게임 끝이었다...).

그렇다 보니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사람들도 많고, 이왕 그 과정을 걸칠 거라면 아예 다른 부서의 높은 자리로 이동이나, 다른 공기관으로의 이직을 계획하기도 한다.


그리고 내 경험으로 봤을 때, 승진을 원한다면, 인정받고 싶다면 이직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그게 싫거나 지금 있는 직장이 정말 좋아서 놓치고 싶지 않다면, 사내 정치 등을 통해 그 조직에서의 내 입지를 단단히 쌓아야 하고 (솔직히 백날천날 열심히 일해봤자, 위에 있는 사람들이 모른다면 말짱 꽝이다. 사내 정치에 대해 할 말은 많으니 이건 다음 기회에 하자),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야 한다. 누군가가 알아서 추천해주겠지 생각하면 언젠가는 분명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될 테니.


그러니 당신의 꿈이 경치 좋은 호수에서 느긋한 생활을 보내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당신이 지금 있는 호수가 사실은 웅덩이라면), 직장은 징검다리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더 괜찮은 경치를 보기 위해, 좀 더 즐겁기 살기 위해 하나하나 지나쳐 가는 과정 같은 거. 특히 당신의 꿈이 좀 더 넓은 바다를 보는 거라면, 더더욱 당신은 움직일 준비를 해야 한다. 좀 더 괜찮은 돌을 찾아서, 그러다 나중에 내 배를 지을 수 있을 만큼의 돈이나 재료를 모을 수 있게 하는 곳이라면 더 좋고. 그리고 솔직히 직장에 있을 때가 이직을 준비하기 최적의 순간이다. 실패에 대한 부담이 적으니까.


동료의 이직 소식에 갑자기 사람들에게 메뚜기(!)가 되라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아마도 제 안의 메뚜기 욕구가 깨어났기 때문일 겁니다. 이제껏 지나왔던 직장들과 비교했을 때 지금의 일이 훨씬 높은 만족도를 제게 선사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이 호수에 정착할 마음이 안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나 이제 갈게’하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 호수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새삼 심장이 두근대며 약간 초조해지기도 해서 말이죠.


다들 어디쯤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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