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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Jun 15. 2020

언어의 성별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면서 드는 생각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아이의 성별을 미리 알고 있음에도 따로 성별에 맞는 출산준비를 하진 않았다. 가능한 저렴하게 출산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거라면 그게 여자 아이 옷이든 남자아이 옷이든 상관없이 받았고, 5-6살의 옷이라도 미리 받아두곤 했다. 그 외 구할 수 없는 건 슈퍼마켓에서 가장 싸게 살 수 있는 하얀색 기본 옷들로 준비했다.


첫 아이가 태어나고, 우리는 첫 아이를 출산하기 몇 달 전에 이사를 했기 때문에 주위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그렇게 남편과 나, 둘이서만 아이를 돌보며 새로운 부모의 생활에 적응했다. 온라인이나 우편으로 사람들이 축하 인사를 보내긴 했지만, 정작 아이를 보러 오는 외부 사람은 midwife나 health visitor 정도였기 때문에 아이는 온종일 하얀색 기본 옷이나 사이즈가 적당한 아무 옷이나 입으며 하루를 보냈다. 그렇게 아이가 조금 큰 다음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나갔을 때 그제야 다른 부모들이 아이를 어떻게 데리고 다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늘 내 아이를 대할 때 사람들이 좀 난감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는데, 바로 아이를 보며 귀엽네, 까꿍, 이런 인사를 하다가 내게 아이에 대해 물어볼 때였다.


“He - She - sorry, is the baby a boy or a girl?”


그러니까 영어상 주어가 먼저 와야 하는데, 그때 아이를 ‘she’라고 부를지 ‘he’라고 부를지 난감해하며 묻는 거였다. 그게 그럴 법도 한 게, 여기서도 남자아이를 여자 아이로 오해하거나, 여자 아이를 남자아이로 오해해서 부르는 걸 부모가 별로 안 좋아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 역시 비슷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보통 아이의 옷이나 장난감, 유모차 장식 색 등을 통틀어 짐작해서 아이의 성별을 짐작해 부른다.


그런데 내 아이의 경우, 남자아이였지만, 하얀색 기본 옷이거나, 아니면 얻은 옷들로 대충 맞춰 입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헷갈려한 거다. 그렇게 사람들이 곤란해하는 걸 몇 번 본 다음부터는 웬만하면 외출할 때 첫 아이는 파란색 계통의 옷을 찾아 입혀 데리고 가거나, 여자 아이인 둘째는 첫째 아이 옷을 대부분 물려 입었기 때문에 옷이 안되면 핑크색 담요라도 유모차에 걸쳐서 외출하곤 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성 평등이니 뭐니 아무리 말해도 영국은 한국보다 성별로 규정짓는 게 생각보다 많구나.


....


요즘에는 스페인어를 다시 공부하고 있다. 원래는 프랑스어를 공부했는데 (전공이 아니라 취미로) 남편을 만나면서 스페인어를 새로 배웠다. 초반에는 대학 소속 어학원에서 원래 듣던 프랑스 어 수업에 스페인어 수업도 같이 신청해서 들었는데, 두 개 수업을 따라가는 건 둘째치고 (박사를 할 때였으니 영어로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치는 않았고...) 일단 두 개 언어가 비슷하면서 발음 쪽이 정말 달라서 대혼란을 겪고 결국 프랑스어를 접었다.

그 후 스페인어는 아무래도 스페인에 갈 일이 많다 보니 체계적인 공부라기보다 일상 언어 쪽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듣기는 나은 반면 문법이고 뭐고 다 개판이 된 까닭에 이번에 다시 문법과 단어를 다시 공부하기로 한 거다. 거기에 요즘 딱 맘에 드는 앱을 발견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 스페인어를 공부하면 할수록 드는 생각인데... 동사 변형도 사람 짜증 나게 하는데 한몫 하긴 하지만, 무엇보다 이 '여성형 남성형' 명사들이 사람을 돌게 한다;;; 간단히 'a'로 끝나면 대부분 여성형 명사라고 짐작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성별이 불분명해서 내가 모아둔 하트 (앱에서 연습할 때 쓰는 것)를 다 까먹을 정도로 사람을 곤란하게 할 때가 있다. 


그래서 다시 그 생각을 했다. 유럽권에서 쓰는 언어들, 꽤나 성별이 분명한 말이 많구나. 전에 블로그에서도 한 번 비슷한 주제로 글을 쓰긴 했는데, 영어나 스페인어를 쓸 때 그 사람에 대해 가장 먼저 알 수 있는 정보는 바로 성별이다.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바로 처음부터 확인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확인해야만 대화가 자연스레 이루어질 때가 많다. 안 그러면 지칭하는 게 아주 애매해지거나 문장이 부자연스러워 지니까. 


한국말로는 '어, 친구한테 전화 왔어. 걔가 같이 밥 먹자고" 이렇게 말했을 때 성별이 드러나지 않아, 가끔 바람피울 때(!) 유용하게 쓸 수도 있다고 한다면, 영어권이라면, "A friend called me. S/He wants to have a meal with me" 이렇게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성별이 드러난다. 


그런 이유로 가끔은 의도치 않게 그 사람의 성전환 유무도 드러나게 된다. 그 사람이 원래 'he' 였는지, 'she'였는지, 아니면 'he'가 되고 싶은 'she'인지, 그 반대의 경우 인지도... 비슷하게 거의 반강제로 그 사람의 성적 지향성이 드러나게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아내, 남편, 파트너, 배우자, 여자 친구, 남자 친구를 말할 때, 

"My partner..... S/He did...." 이런 식으로 말하거나, "Her wife..." 하는 식으로 좋든 싫든 드러나게 되니까. 그게 처음 만나는 사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단체를 지칭할 때는 남성형 명사가 전체를 대표한다. 스페인어에서 여자들은 'Ellas', 남자들은 'Ellos', 그렇지만 남자 5명에 여자 한 명이 있든, 여자 5명에 남자 1명이 있든 그 그룹은 'Ellos'로 지칭되는 것처럼. 물론 영어에서도 일반적 사람을 말할 때는 'He/ Man'를 많이 쓰기도 하고. 


............


그래서 그렇게 언어를 공부하다 보면 좀 묘한 기분이 든다. 인권을 존중하고 선진국이라고, 평등의 가치에 대해 그토록 설파하고 있는 나라들의 언어가 원래 성별이 이토록 구분된 것이라는 것에 대해. 뭐 언어의 형식이 그 나라의 문화를 규정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가끔은 의아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다행이라면 언어가 그토록 성별에는 가차 없이 개인의 의사 존중 없이 다 까발려 버린다 하더라도 일단 사회 전체는 그 사실을 무난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까. 그렇게 따지면, 언어가 숨길 곳을 없게 하기 때문에 사회 문화가 그에 맞게 적응한 건가? 


언어 공부한 분들 생각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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