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증 수표 혹은 한계점
둘째 아이가 첫돌도 지내지 않은 아기였을 때, 우리는 스페인 시가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시아주버님이 둘째 아이와 놀아주고 계셨는데 갑자기 아이 울음소리가 크게 나서 가보니, 아이가 소파를 잡고 서있다가 넘어지려는 걸 붙잡아 주려다 아이 팔이 빠진 것.
내가 우는 아이를 진정시키는 동안 남편을 비롯한 시댁 가족들은 급하게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한국의 명절 연휴가 그렇듯 스페인의 병원들도 응급실을 제외하곤 다 문을 닫은 상태였고, 한국처럼 개인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응급실에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해졌다.
간호사이신 고모님이 바쁘게 전화를 몇 군데 돌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고모님과 함께 급히 차를 타고 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들어서자마자 응급실 가득 꽉 찬 사람들. 도대체 얼마 동안 기다려야 할까..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런데 도착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아이 이름이 불렸다. 안내받아 들어가니 간호사 분이 고모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셨고, 의사분이 와서 뚜둑, 하고 10초 만에 아이 팔을 끼워 넣었다. 한번 빠진 팔은 또 빠질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하는 주의사항을 듣고 우리는 10분 안에 그 응급실을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응급실을 나서는데.. 안도감과 동시에.. 뭐랄까.. 묘한 불편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은 아이가 워낙 어려서 우선순위가 된 거라고 말했지만.. 만약 내가 아이를 데리고 혼자 왔다면 그때도 이렇게 우선순위가 될 수 있었을까.
영국에서 남편이 출장 가있는 동안 둘째가 역시 아파서 새벽 1시에 아이 둘을 데리고 응급실에 갔다가 오전 10시에 겨우 나올 수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이걸 의료 시스템의 차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는 사람의 힘'이라고 해야 할지.
반대로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스페인에 왔을 때, 어린이 엑스포가 열린다는 말에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과 함께 갔었다. 연말이었고, 나름 사람들이 없을 때를 노렸다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넘쳐났고, 공간이 너무 커서 결국 남편은 첫째 아이와, 나는 둘째 아이를 데리고 갈라지게 되었다.
솔직히 그때를 생각하면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다. 사람은 많았고, 줄은 길었고, 도우미들은 자기들끼리 혹은 손님들 중 아는 사람과 떠드느라 아주 느리게 움직였고, 오랫동안 기다렸다가 내 차례다 싶으면 갑자기 앞에 혼자 서있던 사람이 자기 아이들은 물론 사촌 꼬마들까지 다 불러들이는 바람에 또 한참을 기다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람들은 나를 흘끔 보고는 보란 듯 새치기를 했고, 내가 뭐라 해도 들은 척도 안 하거나, 아니면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이 사람과 일행이다, 라는 말로 태연히 끼어들곤 했다.
그러다 내 둘째 아이가 작다는 이유로 다른 좀 큰 남자아이들이 새치기해서 내 아이를 밀어내는 일이 생겼다. 그때부터 나도 열 받아서 아이를 잡고 아주 강하게 밀고 나갔다. 내가 스페인어를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지들끼리 그런 나를 보고 온갖 말들을 했는데, 우습게도 남편이 첫째 아이와 함께 돌아오자 다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또 스페인. 총 가구수가 백 채 정도 될까 하는 작은 마을의 가족 별장에 와서 머물고 있는데, 당연히 이 동네에서 나는 유일한 동양인이고 GB 마크가 붙은 영국차를 운전하면서, 영어/스페인어/한국어를 섞어 쓰고 있는 외국인이다. 그렇지만 위화감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은 체 돌아다니고 있다.
이미 연애 때부터 종종 왔었으니 그만큼 오래 얼굴을 비춘 것도 있지만, 초반의 시간들도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던 건 무엇보다 시댁의 힘이 컸다. 발렌시아에 주로 거주하시지만 대대로 가족 별장으로 썼던 만큼, 마을에 잘 알려져 있었고, 그분들의 '가족'으로 소개된 까닭에 나는 '받아들여졌다'라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그리고 이건 발렌시아에 갔을 때도 비슷하다.
발렌시아의 유명 관광 명소 중 하나인 Mercado Central에서도 시어머니가 단골인 가게가 여러 군데라서 따라다니다 보니 덩달아 얼굴을 익히게 되고, 그분들이 단골인 여럿 음식점에 갔을 때도 나를 향한 호의는 이어진다. 그러니 적어도 나는 내 시댁과 연결된 곳을 가거나, 남편을 포함한 시댁과 함께 움직일 때는 좀 더 느긋해지게 되는 거다. 마치 자동 운전하는 차 안에 타고 있는 것처럼, 길을 잘 들긴 했는지, 운전 방향이 맞긴 한 건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된다. 최소한 스페인에서는 언어가 미숙해도 날 도와줄 사람들이 곁에 있고, 그분들 덕에 다른 이들은 내게 좀 더 넓은 이해심을 보이며, 굳이 내가 아니라도 대신 일을 해결해 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처음 보는 이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지 않아도, 내 신분(!)을 보장해 주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그룹에 속하도록 이끌어 주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이건 남편이 한국에 왔을 때도 해당되는 얘기다. 남편이 나와 결혼 전에 혼자 한국에 와서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가 겪었던 경험들과 그가 나와 함께 와있는 동안 겪은 것들이 다른 것처럼.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그는 내가 스페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동 운전되는 조수석에 앉아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망하게 된다.
그러다 영국에 돌아오면 나는 다시 두발로 뛸 준비를 한다. 더 이상 안전장치는 존재하지 않고, 나는 나란 사람이 무해(!)하다는 걸, 괜찮은 사람이란 걸 나 스스로 증명해야 하고, 열심히 지도를 보면서 뛰지 않는다면 내 대신 차를 불러줄 사람 따윈 없으니까. 그리고 그게 이방인인 남편과 내가 영국에서 각자 살아온 방식이기도 하고.
아는 사람의 힘은 생각보다 크다. 특히 연고 하나 없는 이방인에게 '아는 현지인'의 존재란 보증수표 같은 거다. 동시에 이 아는 현지인은 이방인에게 세상을 보여주는 안경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마치 막 알에서 깨어난 아기새가 처음 보는 상대를 엄마로 인식하고 그 행동을 답습하는 것처럼, 이방인에게 아는 현지인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아는 현지인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배우고, 그 사람들의 행동/태도를 보고 대처 방법을 익힌다.
그러니 이전에 쓴 글처럼 현지인 파트너의 계급에 이방인이 속하게 된다는 것도 이런 이유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게 이방인의 한계점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예 아무것도 없는 곳에 뭔가 새로운 걸 처음부터 만드는 것과 이미 형태가 곤고하게 잡힌 걸 다 깨부수고 새로운 걸 만드는 것의 차이랄까. 뭐 이것도 다 개인차가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