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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Aug 09. 2020

나라는 주인공

존재 증명의 강박감 

내게는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감 같은 게 있다. 꽤나 고달팠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반작용으로 생겨난 감정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공백을 가지고 태어난 건지 모르겠지만, 이 감정은 내가 기억하는 한 늘 나와 함께 있었고 지금도 종종 휘둘리곤 한다. 


어릴 때 소위 말하는 가정폭력 같은 걸 겪으며 자랐다. 그 과정에서 부모가 이혼했고 친모가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또래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고, 그렇게 오래 혼자인 시간이 많았던 만큼 혼자인 아이가 으레 겪는 그런 험한 일들도 적잖이 겪으며 자랐다. 가족에게 나는 환대받지 못하는 음침한 여자 아이였고, 학교에서도 자꾸 혼자 떨어져 있는 그런 아이였다. 


그렇게 워낙 '여자애는/재는 필요 없다'라는 말을 오래 자주 듣다 보니 오기가 생겼는지, 아니면 책만 주야장천 읽다 보니 나 스스로 보호막을 설치하기로 마음먹은 건지,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든 거다. 내가 지금 이런 시련을 겪고 있는 건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고. 


어쩌면 내가 이 책의 주인공에 걸맞은지 테스트받는 중은 아닐까, 하고. 


책의 주인공이라면 으레 시련을 겪어야 하고, 그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 시련을 겪기만 하고 거기에 묻혀 버리거나 이겨내지 못하면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 이 시기를 이겨내야 한다고.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괜찮은 주인공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주인공이 음침할 수만은 없으니 어두운 과거를 가졌더라도 현재는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누구든 주인공에게 약간이라도 흥미를 가지고 응원할 수 있게. 


주인공은 아무리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더라도 대놓고 못 배운 티를 내거나 무례할 순 없다. 주인공은 거지꼴이지만 눈에 빛이 나는 사람이 되는 거지, 거지꼴의 진짜 거지 같은 사람이 되진 않으니까. 아무리 거지 같은 환경에 있어도 거지 같지 않은 예의와 행동이 몸에 밴 사람, 그런 사람이 기회를 얻고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주인공은 아주 무식하거나 재능 따위가 하나도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타고난 천재적 재능이 다이아몬드 원석처럼 숨겨져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주인공의 조건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다재다능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머리가 좋든 그런 척을 하든 뭐 하나 내세울 건 필요한 거다. 주인공은 서사가 있어야 하고, 그 서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이 있어야 하니까. 


외모도 중요하다. 거지꼴을 하고도 숨길 수 없는 미모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매력적'이다, 라는 말 정도는 들어야 주인공 취급을 받을 수 있다. 나와 30분을 얘기하고도 그 사람이 나를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 설명한다면, 그렇게 존재감 없는 사람은 주인공이 되지 못할 테니까. 

 



그렇게 사람 눈을 마주치지 않고 땅만 보고 걷던 나는 사람들 눈을 마주 보기 시작했고, 웃기 시작했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흔한 학원이나 유치원 같은 사교육도 받지 못했던 나는 그나마 뭐라도 능력이라고 증명받기 위해 교과서를 외우면서 공부했고, 매일 방과 후 학교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대학 때 부모가 이혼할지 모른다며 괴로워하던 동기 한 명을 위로하며 같이 술을 먹다가, 그 친구가 내게 "네가 뭘 알아?"라고 말했을 때, 그리고 조별 과제 조원 중 한 명이 내게 '넌 궂은일 안 하고 큰 거 같다'라고 말했을 때, 솔직히 기뻤다. 드디어 다른 이들에게 나는 그런 어두운 과거 따위는 있지도 않은 그런 사람으로 보이는구나.  


이렇게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나의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영국에 홀로 유학 와서 밥을 굶으며 지낼 때도, 또 다른 시련이 오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이 이야기가 어떻게 쓰일지에 대한 생각을 하곤 했다. 주인공은 어렸을 때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더라도, 자라면서 또 시련을 겪으며 성장하곤 하니까. 여기서 성장하지 못하고 좌절해버린다면 주인공 따위는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금은 영국에 집을 소유한 풀타임 직장인에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지만, 나는 여전히 일에 욕심을 내고, 그 외의 시간에 운동을 하고, 피아노를 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아이들 옷을 만들고, 인형을 만들고, 정원을 가꾸고, 요리를 하고, 스페인어를 공부한다. 


이렇게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라는 주인공이 좀 더 매력적인 캐릭터로 거듭나기 위해서. 그리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진부한 이야기를 만들 순 없으니까. 


이런 강박감은 때론 나를 성장케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내 목을 조르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특히 우울함에 찾아올 때는 환청처럼 신랄한 독자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이런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했단 말이야? 주인공이 너무 찌질해, 주인공이 너무 매력 없어, 이야기가 너무 평범해, 재미가 없어, 흔해...'


그런 목소리들은 다시 비수로 날아와 날카롭게 찌른다. 비수들은 나를 '그래, 나 같은 게'하는 더 깊은 우울함으로 밀어 넣기도 하고, '그래, 나랑 한번 해보자'하는 독기를 부르기도 한다. 


나는 어쩌면 꽤나 피곤하고 엄격한 자기 검열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계속 앞으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그건 바로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책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것. 




혹시나, 당신에게도 당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책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읽고 싶은 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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