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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Jan 02. 2021

좋든 싫든 가야 하는 길

어차피 가야 한다면... 

연말이 되면 습관처럼 하는 일이 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고 기억에 남는 것들을 적어내는 것. 때로는 월별로 적기도 하고, 때로는 커다란 사건 중심으로 복기하기도 한다.


동시에 다음 해를 위한 계획도 다섯 개 이내로 준비한다. 해야 하거나 하고 싶은 일들 중 가능하면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들 위주로. 그 후 'wish list'도 준비한다.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랬으면 정말 좋겠다'라고 바라는 것들.  


위시 리스트를 적는 이유는 그럼으로써 내 안의 욕망을 아주 노골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에게 말하면 현실감 없다고, '네가?' 하는 비웃음을 당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꺼지지 않고 내 안에서 나를 태우는 불, 간절한 바람 혹은 욕망 같은 거.

그걸 알고 나면 내 계획의 방향을 잡는데 좀 더 솔직해질 수 있고, 계획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렇게 위시 리스트와 다음 해 계획을 비교해보면 아무리 계획을 다섯 개쯤 썼더라도 다음 해의 목표 같은 게 대충 나온다. (그리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적는 새해의 다짐에는 매년 반복되는 것들도 꽤 숨어 있으니까)


예를 들어, 다음 해 계획이 꾸준히 운동하기, 다른 언어 공부하기, 한 달에 책 세권 읽기, 세 개국 여행하기, 직장 옮기기,라고 했을 때, 위시 리스트에 '진짜 핫 한 커리어 우먼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라는 항목이 있으면, 다섯 개의 계획 중 그 바람을 이루어줄 수 있는 것들로 무게 중심이 옮겨 가는 거다. '핫하다'라는 기준이 외모적인 거라면 다음 해 목표는 꾸준히 운동해서 맵시 있는 몸을 만드는 쪽으로, '핫하다'가 지적인 거라면 책이나 외국어 쪽으로 - 물론 그것도 자신의 업무나 상황과 맞아야겠지만. 


그런데 위시 리스트 중에는 아주 원하지만 성공 여부를 장담할 수 없는 것도 있다. 다음 해에는 잘되기를, 제발 운이 따라주길, 제발 이 년도가 바뀌는 숫자의 마법이 자신에게 빛을 내려주길, 그렇게 바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연한 그런 바람들.  


예를 들어, 올해는 취업하고 싶다, 시험에 합격하고 싶다, 돈을 좀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좋은 사람 만나고 싶다, 등등. 


이런 건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성공 여부의 기준도 불분명해서 아무리 위시 리스트에 있더라도 계획과 잘 연결되기가 힘들다. 특히 그 일을 하고는 있지만 아직 아무런 성과가 없다든지 (e.g. 월급은 매달 꼬박 들어오는데 모이는 돈은 없는 상태), 해봤다가 실패했다든지 (e.g. 시험이나 면접에서의 실패). 그렇게 되면 위시 리스트와 계획 사이의 갭이 커져서 계획 자체도 작심삼일로 그냥 흐지부지 끝날 때가 많아진다. 


그런가 하면 구체적 계획 없이 바람만 간절해지면 자꾸 우울해지고 절망하게 된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답답해지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욕도 떨어지고, 이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자꾸 한눈을 팔게 되고, 그러다 화살의 끝이 스스로를 향하게 되기도 하고. 


그런 유혹들이 뭉쳐서 속삭이면 '새해'가 오는 게 덜컥 두려워지기도 한다. 차라리 그냥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아니 , 남들만 이대로 시간이 멈추고 나만 레벨업 한 뒤 시간을 돌릴 수 있는 판타지 같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바랄지도 모르지.


.....


(재)작년 말에 내 위시 리스트에 아주 터무니없는 (적어도 남들 눈에는 - 그렇지만 내게는 꽤나 간절한) 바람이 하나 나타났다. 늘 그렇듯 연말 마무리 일기를 쓰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는데, 그 후 며칠 동안 꿈을 꿀 정도로 그 생각에 사로잡혔기에 인정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난 꽤 자신만만하게 계획을 세웠고, 지난 한 해 동안 그걸 이루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아주 열심히 투자했다. 일과 육아를 제외하고 남는 시간을 거기에 올인했다고 할 정도로. 


그러나 한 해가 지나고, 난 그걸 이루지 못했다. 아니 근처에도 못 가봤다. 그동안의 시도는 다 실패로 돌아갔고, 그럴수록 내 욕망이 허황된 게 아닐까 하는 의심부터 시작해서, 이건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무기력함, 내 계획이 다 잘못된 거라는 불안함, '나 같은 게'라는 자존감의 독이 되는 생각까지 갖가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나마 중간에 슬럼프가 찾아와서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는 그래도 이제껏 해 온 게 있으니 아까워서라도 버텼는데, 막상 한 해가 지나고 다음 해의 계획서를 눈 앞에 두고 나니.. 아주 갈등이 커졌다.  


이걸 또 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여기서 접을까.  


이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며칠을 고민했다. 아니, 그건 고민이라기보다 내 바람 /욕망이 얼마나 단단한가를 시험하는 강도 테스트에 가까웠지만. 즉, 내 안에서 무수히 떠오르고 있는 '안될 이유들, 핑계들'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버티는가, 흔들리지 않는가, 를 시험하는 과정들. 


사실 이런 방법을 통해 내쳐낸 욕망들, 바람들이 꽤 되니,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각오하면 할만한 방법이긴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결국 새해를 맞은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마 난 또 한 번 시도할 거다. 


결론이 나왔지만 여전히 마음이 편하진 않다. 이건 굳건한 결의, 다짐 같은 게 아니라, 이미 들어갔다 온 얼음장 같은 호수 물에 다시 들어가겠다고 이 악물고 결정한 오기에 가까우니까. 


왜 그런 결정을 하냐고 묻는다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을 외면할 수 없다면, 아니 그걸 여전히 얻고자 간절히 바란다면 걸을 수밖에 없고, 길 위에 올라간 이상 내 발로 걸어가든 남에게 끌려가든 가긴 가야 하니까. 


그러니 좋든 싫든 이왕 가기로 결정했다면 더 이상 핑계 대지 말고, 떠밀리지 말고, 가능한 내 발로 걸어가겠다고. 우습게도 걷다 보면 어딘가에 가닿기는 한다. 그게 절망이 담긴 막다른 길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끝을 보고 포기하는 게 주저앉아 꿈만 꾸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집 안에 머무르며 가지 않은 길에 대해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래서 올해는 또 걸어볼 생각이다. 물론 이 길 끝에 내가 바라던 욕망이 이루어 지길 바라면서. 아니면 차라리 뼈저린 절망으로 포기하게 되더라도. 



 

원래 생각이 많아지면 책상 서랍 정리하듯 글로 탈탈 꺼내 생각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긴 합니다. 그래서 쓴 지극히 개인적인 다짐을 담은 글이긴 합니다만... 


혹시라도 저처럼 불확실한 바람을 향해 조금은 질질 끌리는 발걸음을 다시 내딛기로 결심하신 분들이 있으시면 같이 걸어가자고 하고 싶었습니다. 그럼 그 불안함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해서 말이죠.  


물론, 그런 것 없이 다들 상쾌한 발걸음으로 한 해의 여정을 시작하셨길 바라고 있습니다. 새해가 될 때마다 습관처럼 하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덕담을 뿌리다 보면 정말 '행운'의 'ㅎ' 하나라도 내려앉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다들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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