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저래도 결국 혼자
오늘은 솔직히 기분이 아주 가라앉는 날이다.
설날인데 회사에서 'Inclusive'랍시고 회사 인트라넷에 Happy Chinese New Year라는 글이 두 개나 올라와있어서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했고,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정말 조금의 쉴 틈도 없이 계속 영상회의가 이어졌기에 밥 먹을 시간도 없어 피곤했으며, 한국의 가족들에게도 시간이 맞지 않아 겨우 10분 정도의 통화밖에 하지 못했고, 그 후에는 속이 쓰려서 남은 찬 음식을 대충 데워서 끼니를 때웠기 때문이다.
Chinese New Year
정말 매번 설날이 되면 이것 때문에 기분이 팍 상한다. Lunar New Year라고 아무리 정정을 해줘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그 무지함과 무신경함을 대할 때면 'Fxxx the diversity'라는 욕이 저절로 나올 정도니까.
매번 생각하지만 유럽인들의 동양에 대한 무지함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지들은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도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문화를 가지는 게 당연하면서, 왜 동양인들을 보고는 대충 Chinese 혹은 Japanese로 묶어 버리는 걸까? 왜 우리가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걸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걸까?
회사 인트라넷에 처음 올라온 글도 그렇고, 두 번째로 올라온 글도 그렇고 둘 다 Chinese New Year is celebrated by many Asian colleagues라고 적어놨다. 다른 동양의 나라에서도 그 날이 명절이라는 건 안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Chinese와 Asian을 번갈아 쓴다는 건, 동양인들은 모두 대충 중국인이라는 소리인가, 아니면 그 외 나라의 민족들도 대충 다 중국과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래서 결국 회사에 있는 Diversity network와 BAME (Black Asian Minority Ethnic) network에 항의하는 메일을 날렸다. 그런 것조차 검수하지 않고 버젓이 사내 통신망에 글들을 게재했다는 건 사람들의 무지함을 반증하는 거냐고. 그걸 'Inclusive'라는 태그와 함께 올렸다는 게 도리어 모순이라고.
다른 동양인인 내게는 그 글이 꽤나 'Exclusive'하고 'Insensitive'하게 느껴졌다고. 그러니 다음에는 주의해서 글을 올렸으면 좋겠다고. (물론 그런 글이라도 올라온 게 안 올라온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점에는 동의했지만)
그렇게 메일을 보내고 나니 찌꺼기 같은 감정이 남았다.
올라온 글 중 두 번째 글을 쓴 사람은 영국인으로 부인이 중국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성대한 명절 준비를 위해 오늘 휴가까지 내고 부인의 가족들과 함께 '춘절'을 보낼 거라고. 가족들과 만두를 빚고 빨간 종이봉투를 준비해서 딸은 물론 다른 조카들에게도 줄 거라며, 밝게 중국어로 새해 인사를 하며 글을 맺었다.
그런데 '춘절'은 음력 새해의 고유 말이 아니라고 열심히 싸워댄 나는 정작 한국의 가족들에게도 제대로 전화하지 못했다. 아침에 부랴부랴 아이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하게 한 뒤, 그 비디오를 한국의 가족에게 보낸 게 전부였다.
휴가는커녕 하루 종일 점심도 거르며 회의에 불려 다니고 회의를 주도하느라 아주 진이 빠졌고, 남편 역시 남편의 회사에서 최근에 있었던 내부 이동 때문에 일더미에 치여서 나보다 훨씬 늦게 '로그아웃'했다.
그리고 내 시부모님은 아직도 내게 'Corea se enfria en invierno? (한국도 겨울에 춥니)'하고 묻는 분들이며, 한국에서 가져다준 한복 그림을 보고 '일본 전통옷과 비슷하네'라거나, 내게 중국어를 내밀며 너도 읽을 수 있지 않냐, 라는 말을 하셔서 내 표정관리의 한계를 시험하신 적도 있는 분들이다.
그래,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고, 다른 문화권에 살아보신 적도 없고, 젊으셨을 때 잠깐 유럽여행을 다니신 걸 제외하면 그 외의 나라에 가보신 적도 없는 분들이시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외국인 며느리가 들어왔어도 자주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며느리가 살갑게 스페인어를 하며 떠드는 것도 아니니 관심이 안 갈 수도 있지.
그런 이유들로 나 혼자 설날을 맞이하고, 설날이라 외치며 싸우고, 설날의 어떤 기분도 느낄 수 없는 하루를 보낸 나는 결국 마지막에 푹 가라앉아버렸다.
생각해보면 한국을 나온 뒤 매번 비슷하게 설날과 추석을 보내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이거나, 아니면 혼자서 어떻게든 기분을 내보려고, 혹은 아이들에게 문화를 가르치려고 떡을 만들려고 시도한다든지, 한국 음식을 거하게 차린다든지 하면서.
그런데 이상하게 마지막에 드는 건 외로움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도 챙기지 않는 내 음력 생일만큼이나 잊혀 가는 시간들. 빛바래져 가는 추억들, 내게서 빠져나가는 문화의 잔재들, 더 이상 공유되지 않는 기억들.
이상하지 않나요. 내가 있는 이 곳에서는 내 말을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답니다. 지금 쓴 글을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보여준다 해도 그들은 읽을 수 조차 없겠지요.
그 생각을 하면 조금 슬퍼집니다.
어쨌든,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분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