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에서나 달콤한
남편과 나는 동갑이다.
스페인과 한국. 고작 두 달도 안 되는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그와 나는 각자에게 속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라다가 비슷한 시기에 자라온 곳을 떠나서 혼자 타지 생활을 시작했다. 그것도 문화권이 다른 나라에서.
그러다가 6개월 정도 잠깐 그와 나의 인연이 스쳤다가 멀어졌고, 그 후 다시 가는 길이 겹쳐진 뒤에도 한참 후에야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각자의 나라를 떠나서 살아왔던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가족과 떨어져 있었다. 우리의 가족들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뭘 보고 뭘 먹으며 살고 있는지 보지 않았고, 우리가 이방인으로 어떻게 살아남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일상인 곳을 그들은 대충 어디 티브이 화면에서 본 단편적인 이미지로 혹은 두리뭉실한 지도의 어디 점쯤으로 받아들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혼자라는 사실에 익숙해져 갔고, 우리의 가족들은 우리가 없는 일상에 익숙해져 갔다. 고작해야 일 년에 한 번 볼까 하는 관계 속에서 우리를 가족들에게 다시 이끌게 하는 건 관성 같은 힘이었지, 절대로 현재 진행형인 관계의 친밀함은 아니었다.
그렇게 혼자의 시간을 걷고 있던 우리가 만나서 같이 걷기 시작한 뒤, 우리는 서로의 가족이 되었다. 이젠 우리도 긴급 연락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는 누군가를 갖게 된 거다.
한국, 스페인을 떠난 뒤 다른 문화권에서 혼자 오래 있어왔던 우리였기에, 그리고 우리가 떠나온 시간만큼 빠르게 말라버린 관심처럼 끊겨버린 경제적 지원으로 혼자 아득바득 살아남기 위해 버텨왔던 우리였기에 우리는 극과 극 같은 본바탕의 성격과 달리 비슷하게 다듬어진 서로의 성향에 끌리기도 했다.
그렇게 새로운 가족이 되어, 경제 공동체가 되어 살아남은 우리는 솔직히 현지인에게도 밀리지 않는 경제력과 직업으로 꽤 안정된 바탕을 만들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같이 세계 여행하는 부모'를 가진 사람들이 될 거다.
그런데 우습게도 막상 우리가 이렇게 우리만의 가족을 만들고 살아남고 나니, 우리의 본래 가족들이 우리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너흰 이젠 살 방도가 잡혔으니 이젠 네 원래 가족들/형제/자매를 돌봐라"
뭐 대충 이런 얘기였다. 우리는 몇백, 몇천 파운드를 써서 보러 간 우리의 가족들에게 도리어 '대신 계산해라'라는 요구를 받고, 온갖 상황이 어려운 이들의 얘기를 듣게 된다. 오래간만에 왔으니 정성 표시를 해야 하고, 멀리 있느라 못한 효도를 몰아서 하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 부모는 우리의 성취를 칭찬하는 척하면서 사정이 어려운 형제자매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우리의 눈치를 본다.
우리는 가끔은 침묵하면서, 가끔은 그들의 말에 동조하면서, 그 시간들을 보낸다. 물론 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혼자서 외국생활을 견뎠는지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다. 그들은 모르고, 어차피 알고 싶지 않아 하기 때문에.
대신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다. 서로의 눈에 떠오르는 분노를 알아채고 달래듯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따로 커피 한 잔을 마주 두고 한숨을 쉬거나 실소를 흘리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가족에게 받은 상처를 쓰게 삼키는 법을 배우고 그나마 함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는 거다.
남편이 때로 스페인을 그리워하듯, 나 역시 때로 한국을 그리워한다. 무얼 그리워하냐고 하면 글쎄.. 모호하다.
우리는 가족을 그리워하지만, 진짜 관계라기보다 '가족'이라는 말의 의미를 그리워한다. '가족을 보러 간다', 얼마나 좋고 아련한 말인가.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왔던 막대사탕 같은 거다. 그 알록달록한 모양새에 늘 마음이 끌리고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 상상의 달콤함에 끌리지만, 정작 먹어본 막대사탕은 지독히도 달고 인위적이라 금세 뱉어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