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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Oct 30. 2020

동양인 여자 유학생으로 살아남기

네 목소리를 내는 연습 

케임브리지에서 박사 과정을 할 때 2년 동안 대학원 학부 학생회, 그리고 대학원 총학생회 임원으로 활동했다. 그때 주최했던 한 행사에서 이제 막 박사과정을 시작한 영국인 남자를 만났다. 40대 후반으로 회사에서 10년 정도 일하다가 더 늦기 전에 도전하기 위해 박사과정을 시작했다는 그 남자는 나와 한참 얘기를 하다가 물었다. 


"So what do you want to do when you grow up?" (넌 커서 뭘 하고 싶냐) 

이건 또 뭔 웃기지도 않는 농담인가 싶어 웃어넘기며, 

"I think I've already grown up?" (난 이미 다 큰 거 같은데?) 

하고 대답하니, 어색하게 웃으며, 

"You know, of course you are very young and…"

하며 얼버무렸다. 


내가 무슨 영재라서 조기 졸업을 통해 어린 나이에 박사과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대화하던 무리에 있는 다른 박사과정 학생들도 다들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이거나 심지어 어린 친구들도 있었는데, 나만 저 질문을 받았다. 좋게 말하면 '내'가 아주 어려 보인다는 소리고, 좀 더 꼬아보자면 내가 그 무리 중 유일한 '동양인 여자'였기에 동양인에 익숙하지 않은 그가 나이 계산을 잘못한 것일 수도 있다. 




영국에서 아무리 인종차별에 대해 민감하니 어쩌니 해도 그 레이다를 벗어나는 인종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동양인일 거다. 그러니까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오랜 식민지 지배를 통해 사람들에게 대를 거쳐 익숙한 중앙아시아 쪽도 아니고, 잘 모르지만 워낙 인구가 많아 그냥 뭉텅이로 묶어두는 중국인이 아닌 그 외의 동양인들. 특히 일본이나 관광으로 잘 알려진 동남아 쪽도 아닌 한국인들. 


그러다 보니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스테레오 타입으로 동양인을 향한 대략의 '그렇다더라, 그럴 것이다'하는 짐작들이 넘쳐나긴 하는데, 그중 동양인 여자들에게 적용되는 전형적인 수식어라면, 아무래도 "Nice, kind, polite, quiet, cute - 친절하다, 예의 바르다, 말이 없다, 귀엽다", 그리고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Passive - 수동적인" 정도가 아닐까. 그리고 서양인 여자들에 비해 체구가 작거나 마른 여자들도 많으니, 위에서 말한 것처럼 알게 모르게 '덜 자란' 취급을 받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들과 같은 학문적 위치에 있고 사실 나이차도 얼마 나지 않지만, 그런 스테레오 타입적인 생각들과 그들 기준에 적용했을 때 상대적으로 체구도 작아 보이는 내가 그들 눈에는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어린애처럼 보일 수도 있단 소리다. 


하긴 뭐 어리게 봐준다니 고맙긴 한데 어린애 취급까지 하니 문제지. 거기에 영어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 아주 눈물 쏙 빼놓게 반박까지 못하면, 그들의 짐작 - 얌전하고 말이 없다 - 까지 확신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게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간관계에서 끝나면 상관없는데, 가끔은 이런 인식이 유학 생활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니 문제가 된다. 


예를 들면, 영국 대학은 토론이나 그룹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이나 과제 방식이 많은 편이다. 강의 자체를 학생들이 주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디자인 하기도 하지만 학생들도 손을 들고 질문하거나, 교수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수업뿐 아니라 학회나 세미나도 비슷하다. 학회는 어차피 말을 하거나 글을 써서 자신의 지식을 증명해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내가 침묵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아는지, 얼마나 그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관심이 있기나 한 건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즉, 내가 영어가 서투르거나 혹은 토론 중에 끼어들 틈을 찾지 못해 아무 말도 못 하고 토론이 끝났다면, 사람들은 내가 '모르거나, 혹은 관심이 없어서' 참여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거다. 


이건 사실 학회에서만 한정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최소 영국은 침묵이 금이라는 말이 미덕으로 통하지 않는 곳이니까. 말은 해야 하는 거고, 소통을 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알 수 없으며, 불만을 표현하지 않으면 내가 어떤 취급을 당했다 해도 알아서 배려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곳에서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으려면.. 

첫째. 말을 해야 하고, 둘째. 내 말을 사람들이 듣게 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어처구니없게도 저 '동양인 여자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뜬금없이 내 발목을 잡을 때가 있다. 내 침묵이 당연하다는 냥 아예 발언권을 주지 않거나, 아니면 내가 말을 하는데도 'naive'하다는 식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거나. 또는 내가 아주 진지하게 논문 주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귀엽다는 식으로 지분거린다든지. 심지어 화를 내도 귓등으로 안 들으며 어린아이 투정 부리는 것 보듯 한다든지. 




그래서 동양인 여자 유학생으로 살아남으려면 좀 더 독해져야 하고 좀 더 공격적이 돼야 한다. 같은 말을 쓰는 한국에서도 여전히 여자가 '큰소리'내는 걸 좀 못마땅해하는 분위기가 있는데, 그런 시선, 환경에 익숙해져 있다가 난데없이 외국에서 그것도 외국말로 공격적이 되고 목소리를 내라,라고 하는 게 좀 과한 요구일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을 바꾸자면 한국을 나왔으니까 그래도 되는 거다. 영국은 그래도 되고, 내 밥그릇 챙기려면 그래야 하는 나라니까. 


그러니 숨겨뒀던 네 안의 공격성을 꺼내서, 노래방에서나 내 보였던 우렁찬 발성으로 네 목소리를 일상생활에서 내는 연습을 해보자. 그랬는데도 누군가 - 국적을 불문하고 - 저 스테레오 타입의 잣대를 들이대려 한다면.... 간단히 말해주자. 


"나 너랑 썸타러 온 거 아냐, 그러니까 내가 어려 보이든 말든 신경 끄고 내 말 들어. 내 말 귓등으로 흘리면 아주 후회하게 될 거야", 하는 앙칼진 마음가짐과 눈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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