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학 석박사 논문 쓰기
영국 케임브리지에 대학원 과정으로 유학 온 뒤, 가장 당황했던 건 쉴 새 없이 몰려오는 '글쓰기' 과제들이었다. 아니 뭘 그렇게 설명하고 증명하고 토론해보라는 과제가 많은지. 석사 때에는 일주일에 기본 3-4편 정도의 에세이를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6월 마지막 졸업 논문. 한국에서 학부 졸업 논문을 쓸 때도 바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박사 과정. 하하하. 헛웃음 밖에 안 나오는 그 미지의 모험. 그 과정을 지나서 대학에서 일하면서 이젠 석사 논문과 박사 논문을 '지도'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고 나니 매년 담당 학생들이 찾아와 아주 익숙한 표정으로 - 불안과 걱정이 스며든 - 내게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How should I write a dissertation? - 논문을 어떻게 써야 하나요?"
그래서 아주 소소하게 써보는 논문 쓸 때의 작은 팁들이다. 이미 너도 알고 있을 수 있지만, 그냥 내 경험을 토대로 정리한, 선택적으로 읽어도 상관없는 그런 거.
1.
일단 담당 지도교수와 면담 약속은 빨리 잡는 게 좋다. 석사 과정이라면 학기 시작하고 3개월 이내에, 박사과정이라면 학기 시작 3주 안에. 석사 논문의 경우, 2차 심사가 있긴 하지만 어차피 최종 점수의 거의 90%를 결정짓는 사람은 1차 심사를 담당하는 지도교수이기 때문에, 미리미리 만나서 그 사람의 성향과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는지 파악해놓는 게 좋다. 박사 과정이라면 지도교수가 너의 연구 자체를 뒤집어 흔들 수도 있으니까, 당연히 미리 그리고 자주 만나야 하고.
2.
면담 전에 가능한 명확하고 간단하게 작성한 논문 계획서를 가지고 가는 게 좋다. 계획서에는 research topic, objectives, key research question(s), research approach/method (어떤 식으로 문제에 접근할 것인가, 어떤 방법을 써서 자료를 모으고 분석할 것인가 - 크게는 Quantitative 인가 Qualitative), 그리고 예상하는 결과 등을 요약해서 쓴다. 특히 초반에 가장 중요한 건 research question - 이건 너무 광범위하거나 모호하지 않도록 하자 ("The narrower and the more focused the better!"). 아니면 나중에 배경 연구 (Literature review) 할 때 아주 피를 토하며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할 거다.
3.
논문의 주제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논문은 크게 Introduction (연구 배경, 연구 주제, 논문의 개요 등이 소개됨), Literature review (기존의 연구들을 소개), Research method (연구 방법 소개 - 보통 research philosophy, data collection and analysis method, limitation 등이 포함된다), Data collection/analysis (자료 수집과 분석. 이 안에 본인의 논문 주제와 직접 관련된 자료 수집, 분석 방법만 소개한 후 따로 쳅터를 만들어 그 디테일을 논할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에 디테일을 같이 소개할 수도 있다), Discussion (본인의 연구를 바탕으로 이미 기존에 나와있는 연구결과와 비교하거나, 기존 연구 결과를 반박하거나, 기존 연구의 틈을 공략하거나, 기존 연구결과를 증명하는 등, literature review와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Conclusion (말 그대로 Finding을 정리하고 결론을 얘기하는 공간. Contribution, Limitation과 Future direction을 첨가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으로 구성된다.
4.
대략 방향을 잡은 이후에는 보통 literature review부터 시작하게 된다. 자신의 연구주제와 관련된 기존의 페이퍼들을 읽는 과정이다. 가장 많이 하기 쉬운 실수 중의 하나가 여기에 엄청난 시간을 들이느라 정작 자료 수집과 분석 등은 시간에 쫓겨 급히 해버리고 마는 건데, 그러지 않으려면 미리 Literature review를 할 때 크게 틀부터 잡는 게 좋다. 흐름을 짜고, 크고 작은 타이틀을 미리 정해둔 뒤, 그 타이틀 밑에 연관된 글들의 중점 아이디어만 기록하는 식으로 적기 시작하는 거다. 문장의 완성도가 아주 뛰어날 필요는 없고, 대신 나중에 헷갈리지 않기 위해 referencing은 분명히 해야 하며, 최근에 나온 페이퍼들과 그 분야에서 뼈대가 되는 논문들은 당연히 들어가 있어야 한다. 각 타이틀의 내용이 어느 정도 찼다는 생각이 들면 과감히 다음 쳅터로 넘어가자. 이 챕터는 어차피 나중에 자료 수집과 분석이 끝난 후 Discussion까지 쓴 뒤에 다시 돌아가서 연관성을 생각해서 다듬어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에.
5.
절대 한 쳅터를 완벽히 마무리 한 다음에 다음 쳅터로 넘어가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자. 글을 쓰면 알겠지만, 문장 하나 가지고 몇 시간 버틸 수 있다. 대신 세부 타이틀까지 다 정해놓은 후 그 안을 채우는 기분으로 글을 쓰자. 언제든 다시 돌아가도 생각을 잊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도록, 중심이 되는 아이디어를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방법으로 충분히 적어놨다면 다듬는 건 일단 전체 내용을 채운 후 해도 늦지 않으니까.
6.
중간중간 지도교수와 수시로 만나 진행 상황을 체크하는 게 좋다. 굳이 한국인이 아니라 동양인 학생들의 공통점이랄까, 스스로 해 놓은 게 없다고 생각하면 자꾸 지도교수를 피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면 자신만 손해다. 그러니 준비한 게 없어도 정기적으로 만나는 대신 그냥 솔직하게 얘기하면 된다. 이런저런 방향을 잡으려는데, 이런 점이 힘들었다, 그래서 진도를 못 나가겠다, 아니면 그냥 요즘 너무 힘들었다, 같은 소릴 해도 괜찮고.
담당 학생들을 만나는 건 지도교수의 의무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런다고 해서 '너 내 시간을 낭비하는구나!'하고 할 사람은 거의 없다 (있으면 대학에 정식으로 항의해도 된다 - 최소 영국에서는 그렇다!). 도리어 방향을 제시해 주거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얻을 가능성이 많지. 솔직히 나 같은 경우도, 자꾸 학생이 만남을 미루고 자신이 한 글을 보여주지도 않으면, 신경도 덜 쓰게 되고 그렇게 미루는 게 반복되면 그 학생에 대한 신뢰도도 조금씩 떨어지더라. '얼마나 놀았길래 해 놓은 일이 없나..' 그런 생각도 들면서.. 그러니 만나자!
7.
보통 석사 논문의 경우 쓰는데 대략 2-3달의 기간을 주는데 - 연구 자료 모으고 그런 시간을 제외한, 수업 없이 온전히 논문을 마무리하라고 주는 시간 -, 그게 어찌 보면 참 넉넉한 시간 같지만 한 달만 지나가면 발등에 불 떨어진 느낌이 들 수 있다. 박사 때도 비슷하게 영국은 기본 3-4년, 미국은 5년 정도 되니 참 여유롭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막상 2, 3년 차 넘어가면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거다.
그런 걸 방지하기 위해서, 하루에 어떻게든 글을 몇 자 적겠다, 라는 목표를 정하면 좋다. 대학원 과정은 솔직히 말이 좋아 연구지, 끊임없는 혼자와의 싸움과 같으니까.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서 뭘 많이 읽고 한 거 같은데 막상 뭘 했는지는 모르겠고, 그런 초조한 마음에 잘 쉬지도 못하고, 저녁 먹고 와서도 책상 앞에 앉거나 컴퓨터를 들여다 보고, 그렇게 잠은 잠대로 못 자고 쉬지도 못하고 피곤한데 능률은 안 오르고...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루마다 나름의 목표를 정하는 거다. 예를 들면, 매일 논문 몇 편을 읽고 정리하겠다, 최소 500자는 (완성된 형태라 아니라도) 무조건 적겠다, 등등.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그게 오전 11시든, 저녁 9시든 그날 하루 일은 마무리해도 좋다고 스스로 정하는 거다. 그러면 일찍 끝나면 스스로에게 상을 주는 기분이고, 늦게 끝나도 일단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상쾌할 수 있으니까.
8.
마지막으로.. 글을 쓸 때 Reference 붙이는 거 정말 철저히 하자. Academic writing을 처음 해 보는 사람들이 가장 하기 쉬운 실수가 기존의 논문이나 학회지의 글들을 인용할 때 주석을 달지 않고 넘어가는 건데, 주석을 너무 많이 달면 정작 내 생각은 없어 보이는 것 같아서 일부러 피하는 사람도 있고, 설마 모르겠지 하면서 그대로 베끼는 경우도 봤고, 위키피디아 같은 곳에서 본 글을 단어만 살짝 바꿔 논문에 집어넣는 경우도 봤다. 그런 경우 모두 plagiarism에 걸린다. 쓰는 입장에서는 설마.. 할 수 있겠지만, 논문과 에세이를 채점해 본 사람 입장에서 말하자면, 그런 거 다 보인다. 정말로! (200명 들어가는 대학 강당 앞에 서면 뒤에서 집중 안 하고 폰 들여다보고 있는 학생들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결국 유학을 왔으니 학위를 받으려면 논문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학회에 남으려면 논문은 앞으로 쓸 학회지의 초석이 된다. 그러니 지치더라도 벽돌로 집 짓는 아기 돼지 같은 심정으로 열심히 써보자.
가끔 지치면 Acknowlegement 란에 뭐라고 적지, 그런 걸 고민해봐도 좋다. 난 'To... '라고 헌정하는 부분을 한국어로 쓴 뒤 아예 그림으로 저장해서 영어와 함께 넣었는데.. 그 장을 볼 때마다 솔직히 지금도 울컥한다.
지금도 하얀 워드 창에서 떠돌고 있는 알파벳, 외지 언어들과 씨름하는 너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