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한국의 미적 기준
영국에서 난 가끔 운전을 할 때 한국 노래를 들을 때가 있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앞에 오는 차 안의 운전자를 보거나 지나가는 행인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어, 외국인이다" 하면서..
처음에는 솔직히 백인들을 보면 얼굴이 잘 구별 안되기도 하고, 그 사람이 영국인인지, 프랑스인인지, 미국인인지 모르는 건 물론, 그 사람의 나이 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십 몇 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대충 외모만으로 그 사람이 영국인인지, 북유럽 사람인지, 남유럽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고, 나이도 평균 오차 다섯 살 이내로 맞출 수 있게 되었지만.
초반에 사람들이 대충 비슷해 보이거나 혹은 대충 다 잘생기거나 예뻐 보인다는 '얼굴 적응 시기'가 지나고 나면 아마 '얼굴 비교 시기'가 찾아올 거다. '나 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혹은 '왜 난 저렇게 눈도 안 크고 코도 높지 않을까'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외모를 현지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그러다가 길가에서 꽤 괜찮아 보이는 외국인 남자와 함께 걸어가는 동양인 여자, 혹은 한국인 여자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냥 평범해 - 혹은 나보다 못생겨 - 보이는데 저 외국인 남자는 저 여자의 어디가 좋은 걸까?'
혹은 파티나, 펍, 길에서 모르는 외국 남자가 자꾸 쳐다본다거나 다가오거나 하면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나 혹시 여기서 좀 먹히는 얼굴인가?'
비슷하게 다른 외국인 - 서양 - 여자들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여긴 몸매가 다 다를 순 있어도 대부분 다 얼굴이 진짜 예쁘구나'
혹시라도 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봐 수다 떠는 기분으로 준비해봤다. 영국을 기준으로 한 다른 미적 기준.
1. 예쁘다 vs. 내 눈에 예쁘다
한국에서는 여자의 외모를 논할 때 알파벳을 많이 사용한다 - V라인, S라인, U라인, 등등.. 이런 얘기가 나온다는 건 한국에는 어떤 객관적인 미적 기준이 있다는 거다. 예를 들어, 눈, 코, 입의 비율이라든지, 미인상으로 규정될 수 있는 얼굴상이라든지, 코의 형태라든지.
그리고 한국에서 보통 '예쁘다'라고 규정되는 얼굴은 '서양 사람'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다. 큰 눈, 오똑한 코, 갸름한 턱, 그런 것처럼. 그래서 외국 생활 초반에는 서양 여자들이 얼굴이 평균적으로 다 예뻐 보일 수도 있다. 정작 자기들끼리는 그게 평균이라 할지라도. 뭐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그런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점차 인기를 얻는 추세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외모도 패션처럼 어떤 유행을 탄다 - '요즘은 뭐뭐가 대세' 이런 식으로.
그리고 그런 객관적인 기준에 적합한 여자들이 있을 때 주요 사용되는 말이, '예쁘다'다. 농담처럼 남자들이 소개팅/미팅/선 자리가 생겼을 때 처음 한다는 질문이 "예뻐?"라고 하지 않는가? 따지고 보면 그 말에 잠재되어 있는 뜻은 '그 여자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저 기준에 모두 적합한 외모를 가진 여자냐?'라는 거지, '그 여자가 내 (주관적) 이상형인 눈/코/입을 가진 여자냐'란 의미는 아니니까 - 솔직히 그런 걸 묻는 거라면 질문 자체가 두리뭉실한 '예뻐?'일리도 없고.
그럼 영국에서는 "예쁘다"는 말을 안 하느냐, 그건 아니다. 다만 그 뜻이 한국에서 쓰는 것과 살짝 다르다. 한국에서는 누가 네게, "너 진짜 예쁘다"라고 한다면 네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의 미모를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때가 많지만, 영국에서 누가 네게 "You are so pretty"라고 말한다면 그건 "내 눈에는 네가 정말 예뻐"와 같은 말일 때가 많다.
그러니 영국에서 누군가 네게 예쁘다,라고 말한다면 그냥 고맙게 받아들이면 된다. 그 사람이 가진 미적 기준에 네가 적합한 사람이라는 뜻이니까. 그러니 그 말을 듣고 굳이 당황하거나 어색해하며 "아니, 난 예쁜 건 아닌데.."하고 내뺄 필요도 없고 괜히 주위 눈치를 볼 필요도 없다. 주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말을 '아, 저 사람에게는 이 사람이 예뻐 보이는구나'하는 취향의 표현 정도로 받아들이지, '저 사람이 객관적으로 예쁘다고?' 하며 그 말을 미모 품평회의 초대장으로 받아들이진 않으니까.
2. 우윳빛 피부 vs. 꿀 빛 피부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하얀 피부'가 미인의 조건으로 뽑힌다. 화장품도 화이트닝 기능이 있는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선크림의 SPF가 높을수록 좋고, 높으면서 화이트닝 기능까지 있으면 더 좋고, 바닷가에 갈 때도 얼굴 안 타게 챙 넓은 모자를 쓰는 게 좋고, 요즘에는 비키니를 많이 입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가능한 살은 태우지 않으면서 섹시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겉옷이나 몸매를 드러내는 래시가드 같은 게 유행이기도 하고.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구릿빛 선탠 한 피부를 가진 건강 미인들도 다수 나타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한국에서 유행하는 매체들을 보면 '우윳빛/ 투명한/ 하얀' 피부에 대한 미련을 아직 다 버리진 못한 것 같다.
반면 영국에서는 해가 나면 일단 사람들이 다 밖으로 뛰쳐나온다. 주택가는 잔디 깎는 소리로 시끄럽고, 공원마다 사람들로 넘쳐나며, 실제 기온과 상관없이 해만 뜨면 사람들이 걸쳐 입는 옷가지 수가 현저히 줄어든다. 그런 이들에게 선호되는 피부색은 자연스럽게 잘 선탠 된 된 'honey brown'같은 피부색이다.
남유럽 사람들과 달리 북유럽, 특히 영국에는 하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유달리 많은데, 이들은 선탠을 해도 자연스레 구릿빛이 된다기보다 그냥 벌겋게 달아오르거나, 주근깨, 기미가 생기는 피부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걸 콤플렉스로 여기는 사람들도 꽤 된다. 그래서 선탠 크림도 피부가 약하니 SPF가 높은 걸 선호하면서도 자연스러운 태닝 기능이 포함되어 있는 게 더 인기가 있고. 선크림이 아니더라도 화장품에 natural tanning 기능이 있는 걸 사용하는 여자들도 꽤 된다 (한국에서 whitening 기능이 있는 걸 쓰는 것처럼).
비슷하게 수영복도 가능하면 자국이 남지 않는 튜브탑, 혹은 얇은 끈으로 된 비키니를 선호하고. 그걸로도 성이 안찬지 스페인의 해변가에 가면 topless (윗도리를 벗고)로 누워있는 여자들도 꽤 많다.
그래서 한국 여자라면 외국에서 남녀 불문 외국인들에게 그런 칭찬 좀 많이 받았을 거다. 피부가 너무 부드럽고, 피부색이 너무 좋다고.
3. "I'm too fat" vs. "You are too thin"
영국인 여자 친구들 뿐 아니라 대부분의 서양 여자 친구들이 가장 동양 여자들을 이해 못할 때가 바로, 동양 여자들이,
"I'm too fat"
이라고 말할 때다. 아무리 뚱뚱해봐야 서양인의 중간 수준밖에 못 올뿐더러, 대부분 이렇게 '나 뚱뚱해'라고 말하는 여자들의 대부분이 그들의 눈에는 정말 마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친했던 중국 여자 친구 한 명과 중국계 말레이시아 여자 친구 한 명은 만나면 늘 하는 소리가, '나 살찐 거 같다, 내 허벅지를 봐라' 그러면 다른 한 명이 '네 허벅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 허벅지를 봐라, 내 이중턱을 봐라' 하면서 마치 가학성 취미를 가진 마냥 스스로가 더 살쪘다며 배틀을 벌이곤 했는데.. 같은 동양 여자인 내가 봐도 날씬한 그 둘의 반복되는 '살 타령'은 정말 지겨울 정도였다.
자기 동생이 일본인과 결혼했다며 결혼식에 다녀온 영국인 친구도 내게 물었다. 일본인인 신부의 가장 친하다는 한국인 여자 친구가 들러리의 입장으로 스피치를 했는데, 그 주된 내용이 뭐였냐면... 둘이 친해진 계기가 다이어트를 하면서부터다, 신부가 저 정도면 정말 많이 빠진 거다, 그러자 신부가 그래도 아직 많이 남았다, 드레스 안에 다 숨겨 넣은 거다, 뭐 그런 식으로 말을 받아치고 , 그랬단다. 친구는 재밌으라고 한 건 알겠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전혀 뚱뚱하지도 않은 두 사람이 마치 고도비만이라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얘기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다른 동양의 나라뿐 아니라 한국 역시 내 살뿐 아니라 '남의 살'에도 관심이 많은 나라다. 무조건 마르고 쭉쭉 일자로 빠질수록 좋아한다고 할까. 특히 팔다리 같은 경우 - 그러면서 가슴과 엉덩이는 풍부하게. 그것도 개인이 스스로에게 정한 기준도 아니면서.
살이 찐 사람에게는 아무 안면도 없고, 그 사람의 살에 자신이 보태준 것도 하나 없으면서 잔인하게 비난을 가하거나 조롱을 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자기 몸도 아니면서. 아주 오지랖이 주제를 넘어 번지 점프하는 수준이다.
영국에도 아주 마른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영국의 옷 사이즈가 대부분 6, 8, 10에서 시작해서 20, 22, 24까지 가는 걸 감안하면, 평균의 몸매는 영국 옷 사이즈 12-14, 이 정도면 한국에서는 대부분 몸무게 60이 넘는 체격의 여자다. 그런 거야 인종에 따른 체격 차이이니 뭐라 할 수 없지만, 적나라한 차이점이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누구도 자신의 몸, 혹은 남의 몸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가학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 거랄까.
사이즈가 22인 여자라도 드레스 입고, 짧은 치마 입고, 입을 거 다 입고 다닌다. 자기 취향이라는데 누가 뭐라 할 것도 없다. 대신 아무리 친한 친구든 가족이라도 자신에게 'You are fat/large'라고 하면 상당히 무례한 거고 - 친구 한 명은 의사가 자기에게 'overweight'이라고 했다며 무례하다고 욕을 퍼붓기도 했으니까.
4. 유행 따라 vs. 취향 따라
요즘은 그 정도가 덜한 것 같긴 하지만, 한국은 대체로 유행을 알기 쉬운 곳이다. 몇 년을 안 가다가 돌아가도 번화가 2층 커피숍에 앉아 통유리로 1-2시간 동안 사람들을 구경하면 유행을 알 수 있을 정도니까. 그래도 요즘에는 예전보다 훨씬 다양한 스타일이 보이는 것 같은데, 또 그것도 보다 보면 '개성 있는 스타일'이란 이름을 달고 곁가지 유행을 만드는 것 같다. 어떤 스타일 그룹별 유행이랄까.
반면 영국은 각양각색이다. 이게 스타일리시하다, 패셔너블하다, 뭐 이게 아니라 말 그대로 제멋대로라는 거다. 영국에서도 10대 아이들 같은 경우는 유행이 보이긴 한다. 덩달아 High Street shop이라고 불리는 가게들 쇼윈도를 봐도 대충 파악할 수도 있고.
그런데 10대를 넘어서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취향껏 옷을 입고 다니기 시작한다. 굳이 직업 때문에 나타나는 유사성 (예, 유니폼, 검은 정장 바지 등)을 제외하면 비슷한 스타일을 찾기도 좀 힘들다. 하긴 옷의 종류뿐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사이즈도 그렇게 다양하니 당연한 소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옷을 잘 입고 다닌다는 말은 아니다. 굳이 '잘 입는다'라고 따지자면 한국의 평균이 훨씬 높을 테니. 어떤 사람은 - 사실 많은 사람들이 - 정말 '왜 저러고 다니나, 거울도 안보나'하는 생각이 들도록 옷을 입고 다니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그냥 그렇다는 거다. 그 사람이 뭘 입고 다니든 그냥 길거리 지나가다 표지판 보고 지나치는 정도지, 흑백영화에서 혼자 빨간 드레스 입고 있는 것 마냥 튀지도 않는다는 것.
5. 상황에 맞게 변신하기 vs. 늘 적정 수준 유지하기
유학 생활할 때 교환 학생으로 잠시 온 한국분이 있었는데, 그분을 두고 다른 외국인 친구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Why does she always dress up as if she's going to a party?" (왜 저 사람은 늘 파티 가는 것처럼 차려입어?)
한국의 대학에서는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는데 - 메이크업, 하이힐, 살랑이는 치마, 블라우스 - 매일 그렇게 하고 학교에 나타나는 그분의 모습이 많이 낯설었던 모양이었다. 솔직히 미국은 모르겠는데, 영국에서는 대학에 수업을 들으러 오면서 하이힐을 신고 나타나는 경우는 좀 드물다. 사실 이건 문화 차이라기보다 실용성 때문일 때가 많은데, 영국의 웬만한 대학들은 차를 타고 통학하는 경우보다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경우가 많고, 무엇보다 도로포장이 개떡 같아서 하이힐은 적당한 신발이 아니기 때문에 - 케임브리지 시내를 하이실 신고 반나절 걷다 보면, 다리가 부서질 것 같이 아픈 건 기본에, 바닥의 유서 깊은 돌 틈에 하이힐이 낀다던지, 힐이 순식간에 반 정도 갈린다던지 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거기다 날씨가 엉망이라서 비바람을 뚫고 다니려면 자연스럽게 입고 다니는 옷도 비슷하게 보호복처럼 변해간다. 그런 까닭에 평소에는 편하게 굽 낮은 구두나 부츠, 운동화를 신고 다니다가 무슨 행사가 있거나, 파티, 미팅, 소개팅, 클럽 같은 게 있으면 마치 한을 풀듯 정말 변신하는 것도 여기 사람들이다.
한겨울인데도 아주 짧은 드레스에 발이 부러질 것 같은 하이힐을 신고 어떨 때는 코트 하나 없이 클럽에 간다던지, 눈이 오든 비가 오든 Formal Hall/ May Ball처럼 차려입어야 하는 파티가 있으면 바닥을 끄는 드레스도 마다하지 않고 입기도 한다. 평소에는 민낯에 안경을 끼고 범생의 아우라를 발산하던 여학생이 파티에서는 완전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는 것.
반면 한국에서는 그런 말을 종종 들을 수 있다. "그게 뭐냐, 평소에도 좀 꾸미고 다녀라" 같은. 즉 일상에서의 끊임없는 매력 발산 혹은 외모의 적정 수준 유지를 요구하는 거다. 그게 공부를 하러 가는 길이든, 운동을 하러 가는 길이든, 소개팅을 하러 가는 길이든 간에.
그러니 결론은 그런 거다.
너는 매일 너를 꾸며야 한다는 강박감 없이 너의 그 모습 자체로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도 괜찮고, 그런 네 모습에 반해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면, '훗, 내게 반했군'하고 자신감부터 탑재시켜도 괜찮다는 말이다 - 물론 이런 남자는 좀 조심하라는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겠지만.
다른 이들과의 비교는 사실 아무런 득도 안되고, 대신 꾸며야 할 순간이 찾아오면 마치 스스로가 Fairly God Mother과 신데렐라의 이중인격을 가진 것처럼 온전히 너 자신을 꾸미고 빛내자.
'이제야 내 매력적인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군, 후후' 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