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개인주의

적응될 듯 아닐 듯

by 민토리

한국은 어버이날이라고 부모님을 위한 날이 일 년에 하루 존재하지만, 영국과 스페인은 어머니날 (Mother's day/ Dia de la Madre)과 아버지 날 (Father's day/ Dia del Padre)이 따로 존재한다. 참고로 영국에서는 어머니날이 3월에 먼저 있고 (Easter Sunday 부활절 3주 전 일요일) 아버지 날이 6월의 셋째 주 일요일에 있고, 스페인에서는 아버지 날이 3월에 먼저 있고 (3월 19일, 조셉의 날), 어머니날이 5월 첫째 주 일요일에 있다. 한국의 어버이날이 5월 8일로 요일 불문하고 날짜가 고정된 것과 달리, 스페인의 아버지 날을 제외하면 영국과 스페인의 어버이날들은 가족끼리 모이라는 배려인지 일요일이라서 매해 날짜가 조금씩 바뀐다.


영국에 있을 때야 다른 가족들이 없으니 어머니 날/아버지 날이라고 해봐야 별 의미 없이 지나갔지만 (아이들이 학교에서 뭘 만들어 오는 걸 제외하면), 이번에는 시부모님이 계시는 스페인에서 보내다 보니 아무래도 느낌이 조금 달랐다.


올해 아버지 날은 금요일이라서 일을 하느라 점심이 끝나가는 마지막에 겨우 내려와 인사하는 정도였지만, 어머니날은 일요일이다 보니 좀 더 신경 쓰게 되었다. 시부모님은 아침 일찍 볼 일이 있으셔서 점심때 돌아오신 다며 나가셨고, 남편과 나는 점심 식사 준비를 맡았고 남편의 형님네가 나중에 디저트 같은 걸 사 오기로 이미 합의를 끝내고, 하루를 준비하기 위해 아침에 내려왔을 때다.


웬일인지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서 미리 내려와 있던 아이들은 내가 내려오자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이내 손에 뭘 가득 들고 내 앞에 나타났다. 작은 손으로 하나씩 내게 내미는 것들. 예쁘게 장식한 카드부터 '엄마'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그림들, '엄마를 위한 쿠폰'에, 손수 제작한 꽃에 화장지 심지를 이용한 인형에, 하여튼 푸짐했다. 아이들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내 반응을 살폈고, 내가 감탄하며 웃을 때마다 뿌듯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렇게 선물만큼이나 푸짐한 아이들의 마음과 사랑을 받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식탁에 같이 앉았을 때다. 아이들이 그 많은 선물들을 어떻게 준비한 건지 재잘재잘 떠드는 걸 듣고 있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할머니 선물은 뭘 준비했어?"


그러자 아이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며 답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


그 말에 살짝 당황해서 아이들에게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으니 카드라도 만드는 게 어떠니, 하고 권하자,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왜요? 할머니는 우리 엄마가 아니잖아요?"


어? 그 말에 내가 좀 더 당황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럼 전에 아버지 날에는? 할아버지한테 아무것도 안 해드렸어?"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답한다.


"네, 안 했는데요? 할아버지는 아빠의 아빠잖아요?”


이런.. 아버지 날이 금요일이라 솔직히 아이들이 으레 할아버지도 챙겼겠지, 하고 넘어갔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왠지 눈앞에 은근히 서운해하는 시부모님의 모습이 그려지는 듯해서, 어머니날이라도 만회하자 하는 마음에 다시 아이들에게,


"그래도 어머니날인데.. 할머니한테도 뭘 해드리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고 넌지시 말했더니 둘 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답했다.


"왜요? 할머니는 아빠 엄마잖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챙겨야죠. 우린 우리 엄마 것만 챙기면 되잖아요?"


즉,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자기들 소관이 아니란 소리다. 그래. 논리적으로는 아주 맞는 말이긴 한데.. 뭐랄까.. 좀 당황스럽다고 할까.


이 얘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남편이 쿨하게,


"맞는 말이지. 걔들이 왜 할머니 할아버지를 챙겨?"


그러는 게 아닌가?


뭐랄까.. 새삼 문화충격 같은 걸 받았다고 할까; 남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들마저 그게 아주 당연하단 태도를 보이는 게 당황스러웠다. 내가 이상한가, 그런 생각까지 들고..


그러다가 얼마 전 한국의 어버이날.


한국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를 하니, 아니나 다를까 내 형제들은 물론 내 형제의 아이들도 다 할머니에게 연락을 하는 건 물론 카네이션까지 배달했다는 소릴 했다. 그래, 이게 내가 '보통 그렇지'라고 생각하는 기준이었지.


그러고 보니 또 생각났다. 전에 말했듯이 지금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시부모님과의 뜻하지 않았던 동거를 이어가고 있는데, 거주 공간이야 2층, 3층으로 나눠져 있어서 문제 될 게 없지만, 주방은 1층에 하나밖에 없어서 나눠 쓸 수밖에 없다. 주방에는 냉장고 외에 음식물을 따로 보관하는 작은 방 같은 수납공간 (Pantry/ la Despensa)이 있는데, 우리가 올 때마다 내부 공간에 우리 것들을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긴 했지만, 그게 장기간이 되자 시간이 갈수록 '소유'의 경계가 분명해짐을 느낀다.


어느 정도냐면, 그분들이 먹는 특정한 브랜드의 쌀과 우리가 먹는 쌀에 구분이 있는 거야 그렇다 치지만, 감자, 양파, 당근 같은 채소와 과일에도 그 구분이 지어진다는 거다. 예를 들면, 집에 과일이 넘쳐나지만, '우리가 산' 과일이 다 떨어지면 그분들의 과일을 먹는 대신 다음 쇼핑 때까지 기다린다든지, 양파를 쓰기 전에,


"Is it ours or theirs?"


하고 확인을 한다든지... 그러다 보니 공간 문제도 문제지만 (대부분의 필수품이 중복되어 2개 이상 존재하니까), 어떤 상황이 벌어지냐면, 집에 먹을 것이 넘쳐나지만 '우리가 먹을' 음식은 없어지는 경우도 생기고, 한쪽이 잘 쓰지 않는 식재료 (그러나 다른 한쪽은 잘 쓰는)가 상하는 경우도 생긴다 (한쪽이 사다 놓은 식재료를 사용하는 대신 다른 쪽은 그 식재료가 떨어지면 새로 사다가 쓰니까).


이런 상황을 겪을 때마다 굳이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남편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그게 편하니까"하고 답하고, 심지어 어이들도 과일이 먹고 싶다고 할 때, "That's abuelos'" 하고 답하면 그냥 수긍하고 넘어간다는 거다.


그럴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한국에서 부모님 댁에 머물 때에는 '네 거/내 거'라는 생각을 안 했던 거 같은데.. 아니, "그래도 그거 엄마 건데.."하고 말하면 엄마는 도리어 "어이구, 네 거, 내 거가 어딨니, 그냥 가져가면 되지. 엄마는 나중에 또 하나 사면 된다"하고 말했던 거 같은데..




어느 쪽이 더 낫다 아니다, 뭐 그런 얘기를 하려고 쓴 글은 아닙니다. 그냥 최근의 경험들이 새삼 이런저런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고 할까요?


참고로 스페인의 어머니날에 아이들에게 할머니를 위해 뭐라도 해라, 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딱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이들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어려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까요. 아이들은 성탄절이나 조부모님의 생신에는 또 열심히 수작업을 해가며 마음을 표현하니 그냥 아이들의 논리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웃긴 게, 어머니날에 아침부터 열심히 점심 준비를 하고, 시댁 가족들을 맞이하고, 뒷정리까지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도 '엄마'인데 '어머니날'에 왜 이리 피곤하게 일하고 있는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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