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대략 2개월에 걸친 모든 이직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지막 하나에서 인터뷰까지 갔기 때문에 아주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건만 또 "We are sorry that..." 하는 메일을 받고야 만 거다.
금요일 오후에 연락을 받고 나니 뭐랄까 좀 허탈하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하고, 그럴 줄 알았다 싶기도 하고.. 그러면서 일할 의욕이 바닥 끝으로 떨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자꾸만 곱씹게 되었다.
어떻게 말을 했어야 좋았을까, 그때 그 말을 하지 말걸 그랬나, 내가 그때 이 말을 했던가, 아니 그 말 말고 저 말을 할걸..
물론 그런다고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자리를 얻지 못했다고 내가 갑자기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란 걸 안다. 이 일은 그저 지나가는 그런 무수한 실패들의 하나일 뿐이고, 수많은 책과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실패를 경험 삼아, 양분 삼아 다음 길로 가면 된다.
그렇게 내 이성이 나를 도닥여줬다. 그래, 좋은 경험 했어. 이걸로 많은 걸 얻었잖아? 한번 해봤으니까 다음에 또 도전하면 되지.
반면에 내 감성이 나를 끄집어 내렸다. 또 실패야? 도대체 몇 번이나 이런 걸 겪어야 돼? 혹시 나 사실은 정말 형편없는 인간인 거 아닐까.
내 이성의 도움을 받아 나는 차분하게 인터뷰 패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혹시 피드백을 받을 수 있겠느냐, It would be helfpul for my personal and career development 같은 소릴 정성스레 써서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세 명 중 두 명의 면접관과 개별 면담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내게 호의적이었고, 그들의 피드백에는 공통되는 부분들이 있었다.
공무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공무원 사회, 특히 고위공무원에게 기대되는 경험들을 조금 더 쌓는 게 좋겠다 (지원한 게 고위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실무적인 선에서 좀 더 물러나 Strategic view를 기르는 걸 연습하는 게 좋겠다.
사실 놀랄 것도 없는 피드백이었기에 딱히 충격적이거나 하진 않았다. 시기가 이르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욕심이 나서 덤볐다가 일차 서류전형은 물론 이어지는 인성 테스트와 group engagement test까지 다 통과하고 나니 더 욕심이 생겨서 그랬지.
그런데 그 두 번째 피드백은 좀 아이러니했다. 내가 실무를 너무 잘 알고 그에 대한 관련 지식이 많기 때문에 도리어 내가 'strategic'하다기보다 'practical'하게 보였다고. 그게 마이너스 요소가 되었다는 말.
그 말에 새삼 깨달았다. 이 문턱은 무조건 열심히 한다고 넘을 수 있는 문턱이 아니구나. 그리고 일만 잘한다고 넘을 수 있는 문턱도 아니구나. 이래서 사내정치가 중요하단 소릴 하는구나.
이래서 위로 올라갈수록 대충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이나 스타일이 비슷해져 가는 건가.
예를 들어, 영국 고위공무원들은 보통 얼굴 마담 정도의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대외적으로 중요하다는 일이나 모임에 나가며 얼굴을 비추긴 하지만, 그들에게 할당된 Action point라도 그들이 그 일을 직접 처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 일을 해결하는 건 보통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대신 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들에게 주어진 최종 결정권이다.
결정을 내리긴 해야 하지만 관련된 모든 문서나 상황을 직접 알아볼 시간이 없으니 대신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거다. 이걸 간단히 요약해서 제출해. 그렇게 1-2페이지로 줄여 요약해도 가끔은 너무 많다며 3-4 문장으로 요약하라고 하거나, 아니면 15-30분 내에 브리핑하라는 요구가 떨어진다.
혹은 누군가 보낸 이메일을 바로 forward 해서 보내주기도 한다. 이거 읽어보고 처리해. 그 말은 그 메일이 담고 있는 요구, 혹은 배경 상황을 조사하고 이해해서 정리한 다음 그 메일에 대한 답문까지 준비해서 제출하라는 말이거나, 말 그대로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게 네 선에서 처리해,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결정권 발동을 요청하려면 주관식 보기보다는 객관식 보기를 준비해서 제출해야 한다. 1번 옵션의 장점과 단점, 위험도는 이렇다, 2번 옵션은 이렇다, 등등. 문제 해결을 요청하는 것도 비슷하게 이루어진다. 호소형은 피하고 문제 핵심형으로. 이런 상황이 발생했고, 문제가 이거고, 이런 요구들이 올라왔다. 그 요구들 중 이건 실현 가능성이 없고, 저건 할 순 있지만 위험도가 높고, 어쩌고 저쩌고, 그러니 이거 아니면 저게 가장 합리적인 대체 방 안으로 여겨지지만 그래도 네 의견이 궁금하니 next step에 대해 조언 부탁드립니다, 뭐 이런 식으로.
당연히 내게도 저런 보고를 해야 하는 팀원들이 있지만, 나 같은 경우 먹이사슬의 애매한 중간 단계에서 이런 분들의 요구에도 부응하기 위해 일하다 보니 실무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즉, 예를 들자면, 팀원들이 각종 재료를 구해서 돌아오면 그걸 내가 위에서 요구하는 데로 재주껏 요리해 올려야 하는 그런 상황인 거다.
그런데 이제 내가 요리를 좀 할 줄 아니 나도 같이 맛 평가단이 되고 싶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넌 요리 방식이나 요리에 정통하지만, 맛 평가단은 그 요리를 넘어선 뭔가를 보는 게 필요하지. 굳이 요리를 하진 못해도 그 요리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잘 팔릴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그런 걸 봐야 한다는 거야'
하며 퇴짜 맞은 거다.
그런 이유로 요즘에는 일을 하면서도 생각이 좀 많아졌다. 좋은 점이라면 내게 부족한 걸 알게 되었다는 것과 이젠 뭘 준비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거고, 나쁜 점이라면 이젠 요리를 잘한다는 칭찬을 받아도 왠지 기쁘지 않다는 거랄까...
세상에는 배울게 넘쳐난다는 걸 요즘 들어 새삼 깨닫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한번 더 탈피에 가까운 도약을 꾀해야 한다는 것도.
얼마큼 갈 수 있을까. 아니 갈 수 있기는 할까.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가다가 너무 지치지 않기를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