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넓고 선입견은 다양하다

국경을 초월해서

by 민토리

내게는 두 아이가 있다. 첫째인 남자아이와 둘째인 여자 아이. 두 살 터울이고 첫째에 비해 유달리 낯가림이 심하던 둘째는 현재 아주 애교 많고 까불랑 거리는 아이로 최근 7살이 되었다.


성별이 다른 두 아이를 키우지만,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어차피 금방 자라는 거 굳이 크게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친구들에게 옷을 얻어 입히거나 중고로 사다 입혔기 때문에 둘째 역시 첫째가 입던 옷을 물려 입거나 친구들이 물려준 옷을 성별 관련 없이 믹스 매치해 입으며 자랐다.


장난감 역시 아이들이 어릴 때는 돈을 주고 따로 사지 않고, 선물해 주는 걸로만 놀게 했다. 어차피 취향을 모르니 괜히 지레짐작해서 사줬다가 돈 낭비하기보다 나중에 자기 취향이 좀 잡히면 원하는 걸 사주려고.

그러다 보니 당연히 둘째가 태어났을 때는 첫째 취향의 장난감이 많았다. 레고, 자동차, 기차 세트, 이런 것들. 둘째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놀다가 좀 자라면서 자신이 원하는 장난감을 요구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전자기기라든가, 역할놀이, 악기 종류가 많았다. 대신 으레 여자아이들이 한 번씩 겪는다는 '유니콘/공주/요정' 장난감의 시기를 겪지 않았다.


아이들의 방과 후 활동은 대부분 운동과 관련된 것들인데, 둘째가 자란 뒤 나도 딸 있다는 친구들 따라 둘째를 발레/댄스 수업 등에 데리고 가기도 했지만 아이가 별로 흥미 있어하지 않아서 결국 두 아이 모두 럭비, 태권도, 축구, 수영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둘째는 인형 놀이 같은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놀이 (술래잡기, 닌자/경찰 놀이, 축구 등 공을 이용하는 놀이 등등)를 훨씬 좋아하고, 남녀 상관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며 노는 걸 좋아한다.


그러다 작년. 코로나 바이러스로 학교가 문 닫고 다들 재택근무를 하고 있던 때.


보통 첫째의 이발은 내가 집에서 담당하는 까닭에 그날도 첫째의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주고 마무리하려는데, 둘째가 자기도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싶다고 하는 거다.


여자아이들이 긴 머리카락에 집착하는 걸 다른 친구들의 아이를 통해 봐 왔길래 괜히 잘랐다가 아이가 후회하며 울어대지 않을까 싶어 진짜냐고 몇 번을 물은 뒤에, 가위를 손에 들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레 단발을 만들어 줬는데, 자꾸 '더, 더 짧게!' 하는 거다. 그래서 짧은 단발을 만들어줬는데, 아이가 첫째처럼 잘라달라고 조르는 거다. 진짜 이래도 되는 생각이 한편 들긴 했는데, 이토록 원하니 뭐 한번 당해봐라(?!) 그런 마음으로 싹둑 잘랐다. 쇼트 커트로.


다 자르고 나자 그제야 둘째는 환하게 웃었다.


대신 첫째가 신기하다며 쳐다봤고, 뒤늦게 욕실로 들어온 남편이 할 말을 잃었고, 시부모님과 한국의 가족들이 다 놀랐지만, 둘째가 좋아하니 뭔 상관인가 싶어서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매일 아침 산발이 되는 둘째의 머리카락과 더 이상 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좋기도 했고.




그리고 스페인.


스페인에서는 여아가 태어나면 바로 귀부터 뚫는다. 그래서 여자 아이일 경우 출산 선물로 귀걸이를 선물해 주기도 하고. 그런 까닭에 스페인에서는 신생아 시절부터 아이의 성별 구분이 대부분 가능해진다. 외국인이 아닌 이상, 스페인 여자 아이들은 다 귀걸이를 하고 있으니까.


그런 환경에서 내 둘째 아이는 머리카락이 짧고, 귀를 뚫지도 않았고, 가끔은 제 오빠의 옷도 물려 입고 다닌다. 거기다 마스크까지 끼고 있으니 사람들에게 종종 ‘남자아이’라는 오해를 받곤 한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그런데 오늘. 여름학교에서의 첫날.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오는 길.


사교성이 좋아 늘 활발하게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둘째 아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웠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이런저런 질문을 했더니 둘째가 그러는 거다.


“자꾸 사람들이 나보고 여자 아이(chica)인지 남자 아이(chico)인지 물었어요."


그랬다가 ‘chica’ (여자 아이)라고 대답했더니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거나, 다른 여자아이들이 이상하다고 ‘저리 가’라고 했다며 시무룩해하는 거다.


그 말을 들으면서 순간 든 생각은 '또?'였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들은 사람들이 자꾸 자기를 '중국인'이라고 부른다며, 아니라고 해도 자꾸 부른다, 눈이 째진 제스처를 하며 놀린다, 내가 아무리 '한국인'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 그런 얘기를 하면서 속상해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여자 아이 답지 않아서 뭐라 한단다.


진짜 가지가지하네.


솔직히 화가 나면서도 조금 지쳤다. 나 역시 수없이 겪어왔던 순간들이고, 그런 '선입견'은 내가 뭘 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동양인이니까 중국인이겠지, 한자를 다 읽을 수 있겠지, 수동적이겠지, 친절하겠지, 조용하겠지, 예의 바르겠지, 매운 걸 좋아하겠지, 직업이 없겠지, 남편이 영국인이겠지, 남편 따라 외국 갔겠지, 영어를 못하겠지, 말을 못 알아듣겠지, 등등등.


이건 국경을 초월해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한국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입은 옷 보고, 스타일 보고, 인상 보고, 말투 보고, 쟤는 저렇겠네, 이렇겠네, 왜 저래, 등등등.


그렇기에 아이가 겪은 일이 속상하고 화가 나면서도 무턱대고, '뭐 그런 애들이 다 있어, 엄마가 혼내줄게' 이런 소릴 못했다. 앞으로 부딪치게 될 선입견들의 바다에 비하면 이건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니까.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아이의 마음을 다독이고, 적어도 아이들은 선입견이 적은 사람으로 키우는 방법밖에 없는 걸까....


(덧. 이틀째. 둘째에게 오늘은 어땠냐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오늘도 사람들이 어김없이 자꾸 자길 찾아와서 'eres chica o chico?'하고 묻더란다. 그래서 괜찮았냐, 하고 물었더니, "내가 반은 여자고 반은 남자라고 대답했더니 사람들이 더 이상 안 물어봤어" 하고 쿨하게 대답한다.

아이들의 멘털은 내 생각보다 훨씬 단단한 건지도;; 도리어 내가 배워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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