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뱀을 피하듯, 지진을 피하듯 논쟁은 피하라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럴 때는 변명하려 하지 말고 상대가 진정될 때까지 거듭 사과하고 경청, 공감만 하라고 배웠다. 하지만 가끔 그러고 있으면 나도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때가 있다.
말도 안 되는 것으로 트집 잡으면 차라리 '블랙컨슈머 만났네', '진상이네'하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이성적인 사람이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갖고 따지는 컴플레인이 사실은 그 사람의 오해에서 비롯되었을 때 나는 더 억울하고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북경 퀵턴은 중국비행 중에서 힘든 비행에 속한다. (퀵턴이란 인천-북경과 북경-인천 이렇게 두 구간을 연속 근무하는 것을 말한다.) 그 이유는 우선 비행시간이 2시간 남짓으로 어중간하게 길어 서비스 단계가 많기 때문이고, 다음으로 비즈니스맨, 단체 관광객, 중국인 손님이 많아 면세품 판매가 많기 때문이다.
그날의 나는 에어버스 321 항공기의 북경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비행 편 이코노미클래스 시니어를 맡고 있었고, 그 비행에는 회사동료로 보이는 사람들이 연수겸 여행을 다녀왔는지 단체로 탑승하였다.
식사 서비스 중 후배로부터 그 일행 중 한 사람이 배탈이 나서 밥을 안 드신다고 보고 받았다. 그래서 그 손님을 찾아가서 괜찮은지 물어보고 지사제 복용했다고 하셔서 따뜻한 물을 준비해 드렸다.
식사 서비스가 모두 끝나고 면세품 판매 서비스에 한참일 때 그 아픈 손님 일행이었던 여자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람이 아프다는데 이렇게 많은 승무원 중 아무도 왜 간호를 안 해주냐? 갈 때보다 훨씬 작은 비행기에 왜 승무원은 더 많냐! 이 많은 승무원들이 다 왔다 갔다 하면서 대체하는 일이 뭐냐!'
아픈 손님은 복도 왼쪽에 앉아계셨고, 컴플레인 한 손님은 복도 오른쪽 좌석에 앉아 계셨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계셔서 지날 때마다 '실례합니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하고 양해를 구하고 다녔는데도, 워낙 바빠서 승무원들이 자주 왔다 갔다 하다 보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보통 항공기는 복도가 1개 있는 소형기종과 복도가 2개 있는 대형기종이 있고, 소형기종은 승무원이 6~7명, 대형기종은 12~14명 정도 탑승한다. 아마 그 일행이 북경으로 갈 때 탄 큰 기종은 2개의 복도가 있는 대형기종이었으리라. 그리고 보통 중국 비행은 한국에서 출발하는 편은 바쁘지 않다. 면세품 판매도 거의 없기 때문에 식사 서비스가 끝나면 승무원이 복도를 다닐 일은 없고, 한 번 이쪽으로 가면 다음에는 반대쪽으로 돌아 들어가기도 하기 때문에 같은 손님 옆을 굳이 계속 지나가진 않는다.
하지만 한국 귀국 편은 상황이 다르다. 말했듯이 321 기종의 승무원은 총 6명 많아도 7명이다. 그중 4명이 뒷갤리에서 160명의 손님을 담당하게 되는데, 복도가 하나뿐이기 때문에 다른 손님들을 응대하러 갈 때마다 그들 사이를 지나갈 수밖에 없다.
여행을 마친 손님들은 갈 때에 비해 뒤풀이라고 하듯 술과 음료를 많이 찾고 면세품 주문도 물밀듯이 들어와서 한 손님에게 두 번, 세 번 품절 상품을 안내하러 가기도 해서, 내릴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실 시간도 없이 바쁘게 휘몰아치는 비행이다. 컴플레인 한 손님과 일행인 손님들도 다 식사도 하고 면세품도 사고하느라 몇 번 왔다가 간 걸로 아는데, 왔다 갔다 하며 하는 일이 뭐냐니.
그 여자손님은 불의를 못 참는 멋진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승무원이 면세품 더 팔아 인센티브 받으려고 혈안이 되어 아픈 사람을 간호하지 않는 게 제정신이냐'며 약자의 편에 서서 큰 소리 내어 줄 수 있는 분이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친구하고 싶을 정도로 의리 있고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승무원이 면세품을 많이 판다고 해서 회사로부터 인센티브를 받지는 않는다. 다른 항공사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회사는 하나도 안 팔든 많이 팔든 전혀 차이가 없다. 업무 중 하나이기 때문에 하는 것일 뿐.
그리고 배가 아픈 사람을 승무원이 어떻게 간호를 해야 할까? ‘엄마 손은 약손’이라도 해드렸어야 했나..? 따뜻한 팩은 이미 안고 계셨고, 약은 드셨다고 하고, 내릴 때 휠체어가 필요한지 여쭤보니 필요 없다 하셨고 기내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더 이상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 손님은 '이 많은 승무원 중 적어도 한 명은 옆에 있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했다.
결국은 그 비행 매니저가 와서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를 드리고, 휠체어를 준비해 드리겠다고 했다. 그 아픈 손님은 휠체어까지는 괜찮다고 손사래 쳤지만 옆에 그 손님이 말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언니 짐이랑 다 언니가 못 들고 가잖아. 직원 부르라고 해!'
퇴근하면서 휠체어를 지원해 준 공항서비스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 손님들은 이미 짐 찾아서 공항 밖으로 걸어 나갔다고 했다.
탑승 전부터 환자 정보를 받은 승객도 승무원이 옆에 붙어서 간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이 아픈 승객이 보호자 없이 탄다면 탑승을 거부할 수 있다. 물론 기내에서 급체를 하거나 고열이 있거나, 저혈당 혹은 이코노미 증후군 등의 이유로 쓰러지는 환자가 발생하면 승무원이 대처하기도 한다. 그런데 탈 때부터 이미 배탈이 난 손님은? 나도 배탈이 난 적이 있어 배탈이 나면 많이 아프다는 건 알지만, 그 아픔을 북경에서 인천을 오는 동안 승무원이 옆에서 공감해주고 있어야 했을까? 모르겠다.
물론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시간이 없어 주문받은 면세품을 못 주고 내리는 일이 있더라도 아픈 손님 옆에서 그 아픔을 도닥여 주는 것이 진짜 승무원의 업무이었을지도 모른다. 후배들에게 그 손님들 사이를 지나갈 때마다 어떠시냐고 한 마디씩 묻거나 눈빛으로라도 위로하라고 지시했더라면 그렇게까지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세심한 배려의 아이콘 승무원은 그때도 퇴사하기 직전까지도 못되었다.
그래서 내가 비행이 적성에 안 맞아 그만둔 승무원인가 보다.
이건 내 MBTI 성향 문제인 것 같기도 한데, T성향이 강한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 컴플레인에 '학습된 공감의 리액션'을 하기가 너무 힘들다. 빤히 보이는 억지 요구에는 오히려 '아, 네네~' 하고 넘어갈 수 있었는데, 뇌피셜을 근거로 정당하다고 믿고 따져오는 요구에는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변명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고 눌러야 했다. 매번 내가 가진 자제력을 총동원하며 되뇐다. 데일 카네기가 그랬지. 방울뱀을 피하듯, 지진을 피하듯 논쟁은 피하라고..
당신이 주장을 펼치는 동안은 정말 옳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문제라면 당신의 옳고 그름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인간관계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라. 절대로 그 사람이 틀렸다고 이야기하지 마라.
[인간관계론]
그래서 그럴 땐 밑을 보고 속으로 주문을 걸었다.
'다시 볼 사람 아니야, 그냥 넘어가자, 수긍해 주자, 일 키우지 말자, 나만 참으면 돼, 나만 욕먹으면 돼..'
왜냐하면 그런 컴플레인은 대부분 내 선에서 끝나는 일이 많고, 나중에 손님 스스로 알게 되어 오해가 풀리기도 한다. 그리고 계속 오해를 하더라도 내가 손님과 언쟁을 벌여 이기거나 지지 않았다면 적어도 회사의 고객으로 계속 남아주기 때문이다.
그 당시 변명을 하지 않은 이유는 회사 직원으로 나름 최선을 다한 노력이었고,
지금 이 글로써 그때의 일을 변명하는 이유는 당시의 나를 내가 위로해주고 싶어서다.
다행이다.
이제 어느 정도는 자기 방어를 하고 살 수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