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입사하고 비행을 시작하자 처음 만나는 선배들로부터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다.
'어디 살아요?'
'자취하나요? 월세예요?'
'고향은 어디예요?'
'대학교 어디 나왔어요?'
'전공은 뭐 했어요?'
'남자친구 있어요?'
'부모님은 뭐 하세요?'와 같은 조금 무례한 질문도 있었다. 배려는 없었지만 관심은 많았던 시절인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어떤 후배인지 판단하기 위한 질문이었겠지만..
어느 정도 비행을 하고 난 뒤에는 신입, 막내의 위치에서 벗어나니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되는 날이 많아졌다. 선배들이 그랬듯이,
'식사하셨어요?'
'집에서 드시고 오셨어요?'
'집 가까우세요?'
'차는 안 밀렸나요?'
막내 때 받은 질문들이 신입후배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불편한 침묵을 깨기 위한 인사치레였음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 속에 약간의 관심도 있었겠지만.
이후로 거의 매 비행 처음 보는 선후배들이었지만 매번 같은 대화를 하자니 식상했다. '어, 그래그래'하다 보면 대화가 끊겨 또 다른 질문들로 말을 걸어봐야 했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경우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다. 상대의 기혼여부, 자녀유무, 친한 동료관계.. 무엇이 아킬레스건이 될지 몰랐기에 어느 선까지 물어보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취미나 관심사에 대해 묻는 건 너무 질문을 위한 질문 같았고.. 반대로 내 이야기는 어디까지 오픈해야 되는 걸까..? 늘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서 먼저 말을 건네기가 힘들었고, 그때는 그게 상대에 대한 배려와 예의라고 생각했다.
작년엔가 TV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만화가 기안 84님이 가수 송민호님과 친해지고 싶어서 질문지를 적어온 게 방송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게 어떤 마음인지 너무 잘 알기에. 기안 84님 MBTI는 나와 같은 INTP이라고 한다. 그의 일상이 방송에 많이 나와준 덕분에 평소 뚝딱거리는 INTP들이 그나마 조금 이해받고 있는 것 같아 고맙다.
드라마와 영화도 안 좋아하던 내가 그나마 할 수 있었던 질문은 ‘도착하면 뭐 하실 거예요?’라는 거였는데 이 또한 위험한 질문이었다. 한 번은 선배가 '왜? 어디 같이 갈려고?'라고 되묻기도 했다. 그 선배는 농담으로 말했지만 나는 긴장했다. 자칫 잘못 말을 꺼냈다가 힘들게 비행 와서 뜻하지 않게 나랑 오늘 손발이 잘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르는 선배를 모시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리고 사실 이건 선배의 입장에서도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후배가 예의상 '네, 같이 가요'라고 말하는 것인지 진심으로 같이 가고 싶은 것인지 모르니 무턱대고 같이 가자고 하기도 안 하기도 어렵다. 지금 생각에는 그냥 솔직히 말하면 되는 데 이게 어렵다는 게 웃기지만 그땐 그랬다. 배려인지 자기 방어인지 쇼잉인지 케어인지 후배는 솔직히 말하지 못했고 선배는 후배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그냥 해외 나가면 서로 뭐 할지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다니는 분위기다. 개인 존중, 사생활 존중이 강해지면서 서로에 대한 관심은 없고 배려만 가득하다. 하지만 아무리 워라밸이 중요하고 직장을 삶과 분리하는 게 좋다지만 우리가 직장에서 인생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내는데 매번 그러다가는 회사 내에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이제 내게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 그런가, 웃기게도 가끔 그 무례했던 선 넘음이 그립다.
'하랑씨가 중국어 전공 했으니까 하랑씨랑 다니면 되겠네! 가서 할 거도 없잖아?'라던 선배와 팔자에도 없던 삼국지 투어를 하고, '이거 왜 안 사? 이거 진짜 좋아~ 여기 오면 이것도 사야 돼!'라며 내 장바구니를 채워주는 선배 덕분에 계획에 없던 쇼핑을 하고, ‘우리 힘들었으니까 한 잔 하고 들어가자. 여기 샴페인 진짜 맛있어 ‘라며 으쌰으쌰 해주는 매니저님에 한밤중에 호텔 도착한 뒤 호텔 바에 가서 마시지도 못하는 술잔을 들고 꾸벅꾸벅 졸다가 들어가던 그 시절이.
그동안 마음과 다르게 자꾸 선을 그었던 나여서 너무 죄송하고,
그 선을 넘어 다가와준 선배 그리고 후배들이 너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