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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랑 Oct 19. 2023

우리 집 보릿고개

보릿고개란 햇보리가 나올 때까지의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으로, 묵은 곡식은 거의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아니하여 농촌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운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우리 집에는 보릿고개가 있다. 바로 음력으로 7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 약 두 달여간의 기간이다. 이 기간 안에 많은 가족행사가 몰려있다. 시할아버님 생신을 시작으로 시아버지 시어머니 생신, 그리고 추석 명절을 지나면 친정 엄마, 친정 아빠의 생신까지. 이 가족 행사들은 각각 일주일에서 열흘 간격쯤으로 계속 이어져 있기 때문에 계획적인 행사(?) 준비와 생활비 긴축 재정이 꼭 필요하다. 남편과 나는 이 기간을 '보릿고개'라고 부른다.


원래 이 시기가 되면 적어도 한 달에 3번씩 고향에 방문했다. 고향은 서울에서 기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여서 가끔 기차로도 갔지만, 운전을 하면 보통 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여서 보통은 자차로 갔다. 짐도 많고 아이들과 함께 가기에는 기차를 타는 것보다 운전하는 것이 편하다. 하지만 가끔 차가 너무 많이 밀리면 더 힘들기도 한데, 지난 명절에는 고속도로에 차가 너무 많아 내려가는데 1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제주도에 온 뒤로는 무조건 비행기로 가야 하게 되었는데 생각지 못한 문제가 생겼다. 고향을 한 번 다녀오는데 이동만을 위한 돈의 지출이 엄청 커진 것이다. 비행기 값은 정가에서 도민할인을 받는 것보다 할인석이나 특가석이 저렴하기 때문에 도민할인은 소용이 없었고, 명절에는 표값도 가뜩이나 비싸지고 표마저 많이 있지 않아서 네 가족의 비행기 표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국내선 비행기는 새벽이나 밤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시간적인 부담도 커졌다. 서울에서 다닐 때는 아이들이 차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새벽시간이나 밤 시간을 이용해서 이동하며 시간을 절약했다.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이동해야 하니 아이들도 어른들도 활동하는 시간을 이동에 써야 한다. 그러니 주말만 이용해서 다녀오자니 머무르는 시간이 너무 짧아지고, 금요일과 월요일을 붙이자니 남편도 매번 연차를 내야 하고, 아이 학교에도 (친지 방문을 위한) 교외 체험활동 신청서도 내야 한다.

 

왜 제주도로 이사하는 것을 이민이라 하는지 이사를 하면서 느꼈던 것처럼,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면서 제주도가 ‘해외’ 임을 또 깨달았다. 이런저런 일로 육지로 갈 일이 많을 거라 예상하여 공항 근처로 집을 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공항 가는 일은 참 어렵다.


상의 끝에 올해는 추석과 시할아버님의 생신을 스킵하고 시부모님 생신 그리고 친정부모님 생신과 가까운 주말연휴에 맞추어 두 번만 육지로 다녀오기로 했다. 비행을 할 때도 명절 연휴에는 장거리 비행을 갔다가 새벽에 도착해서도 인천공항에서 바로 리무진을 타고 고향에 내려가기도 했었는데… 퇴사 한 뒤에 안 가는 일이 생기다니 정말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9월 중순에 시부모님 생신 겸 시댁을 방문하였고, 친정에도 들러 이번 추석에는 못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시댁과 친정이 같은 도시여서 한 번 방문할 때마다 양쪽을 들리게 되어 바쁘지만 한편으로는 자주 갈 수 있어 다행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지난주 금요일에 연차를 쓰고 한글날 연휴를 이용하여 추석 때 못 간 시댁도 가고, 친정에도 가서 엄마 아빠의 생신을 미리 축하드렸다. 그렇게 올해 우리 집 보릿고개는 무사히 지나갔다.




보릿고개가 지나면 한 해 마무리만 남은 기분이다. 물론 아직 가족행사로 첫째 아이의 생일이 남아있지만, 그리고 자꾸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생일 파티를 하고 싶다고 해서 조금 부담이긴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한 번도 집으로 친구를 초대한 일이 없었던지라 올 해는 초대를 해서 생일파티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아이의 생일까지 지나고 나면 진짜 크리스마스와 연말만 남고 그렇게 2023년이 끝나겠지.


일 년이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 서울 친구들은 벌써 겨울이 온 것 같다던데, 그래도 제주도는 아직 낮에는 덥고 아침저녁으로 시원하다. 잃어버린 계절을 여기서 찾은 듯? 제주의 가을이 너무 마음에 들어. 제주의 겨울은 어떨까?


유독 빠르게 지나가는 올해의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해서 너무 아쉽다.

조금만 천천히 가자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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