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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랑 Sep 06. 2023

처음인 아이처럼, 관광온 외지인처럼

도민부심은 도민 할인받을 때만

주말에 시할아버님 생신과 시댁 부모님 생신을 겸사겸사하여 육지에 다녀왔다.


제주에도 두어 달 살았겠다 그 사이에 유럽 여행도 다녀왔겠다 이제는 비행기 타는 것이 익숙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5살 아이에게 공항은 아직도 신기한 것 투성이었다. 항상 언니가 창가에 앉아서 창가자리는 처음이었나... 비행기가 이륙하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우와, 너무 멋지다'라고 외쳐서 주변의 어른들을 다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주공항에 도착해서도 공항공사에서 예쁘게 만들어 놓은 곳을 지날 때마다 '엄마, 여기서도 사진 찍을까?'라며 포즈를 잡고 서는 바람에, 이런 관광객을 위한 포토스폿쯤은 쿨하게 지나가는 도민이고 싶은 엄마의 허세를 무너뜨렸다.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


왜 나는 제주관광객이 아닌 제주도민이고 싶은 걸까? 아니, 그전에 왜 나는 어떤 일이든 처음이라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늘 몸을 사리고 주변을 의식했을까?


처음 보는 광경에 감탄을 내뱉고 예쁜 곳이 보이면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아이의 순수함에, 타인의 시선에 갇혀있던 내 모습이 보였다. 어수룩해 보이지 않으려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예쁜 곳이 있어도 '찍을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재기만 하던 어그러진 나의 모습이.




처음 상경했던 날 길도 잘 모르면서 물어보려 하지 않고 사람들에 휩쓸려 어디론가 갔던, 처음 호텔 뷔페를 먹던 날 눈치껏 하다가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따라 담을 수밖에 없었던, 처음 뮤지컬을 본 날 공연에 집중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웃을 때 따라 웃고 박수 칠 때 따라 치느라 바빴던, 언제부턴가 초보티를 내지 않기 위해 주변을 관찰하며 묻어가려 애썼던 지난날들이 있었다. 주변에서도 흔히들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비행기 처음 타 본 티 내지 마라', '초보 티 내지 마라.'


왜? 그게 뭐가 그리 중요했을까?

중요한 건 어수룩하지 않은 내 이미지가 아니라 내가 지금 가야 하는 곳, 내가 먹고 싶은 것, 그리고 내가 즐겁게 즐기는 것이었는데..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건데.


처음이 아닌 척하다 보면 제대로 알거나 배울 기회는 줄어든다.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경험만 쌓이면 '해봤는데 모른다고 하면 비웃겠지...'라는 생각에 더 자신감이 없어지고 위축된다. 헬스장에 가서도 '헬스 해보셨어요?'라는 질문에 '아, 예전에 해봤는데요.'라기보다 '아니요, 처음이에요.'라고 하면 더 자세히 설명해 주는데.. 아이가 처음 배울 때 모든 것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것처럼 우리도 처음일 때 가장 정확하게 제대로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제주도민이면 어떻고 관광온 사람이면 뭐 어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우리는 여행을 할 때는 주변을 하나라도 더 보려고 노력하고,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 맛을 음미하고 알려고 하고, 하루라도 잠시라도 그곳을 더 진하고 깊게 느끼려고 노력한다. 그곳이 처음이니까. 혹은 처음이 아니더라도 낯설고 새로우니까.

하지만 일상에서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하고, 끼니를 때우기 위해 먹고, 주변에 무관심하다. 그러면서 일상이 권태로워지는 것이다. 나의 일상도 관광하듯 여행하듯 살아가면 하루하루가 더 의미 있게 지나갈 텐데, 그리고 그러다 보면 정말 처음 보는, 처음 알게 되는 일들이 쏟아져 나올지도 모른다.


제주도에 오래 계셨던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맛집이고 핫플레이스고 관광온 사람들이 더 잘 알아, 사실 사는 사람들은 잘 몰라' 이곳에서의 삶이 일상인 사람들은 유명 관광지가 어딘지 관심이 없다. 파리에 살면서 에펠탑을 보러 간 적이 없거나, 서울에 살면서 남산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처럼.

'현지인들은 어디 카페 가요? 숨은 맛집 없어요?'

'스타벅스 가, 스타벅스!'


실제 인스타 현지인 맛집도 제주살이 하러 온 나 같은 외지인들 사이에서의 맛집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현지인들에게는 일상인 것들이 여행객들에게는 얼마나 새롭고 소중한 경험인지 생각해 보면 그 일상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제주가 좋아서 제주에서 일상을 보내고 싶어서 왔으면서, 겨우 두 달 되었다고 공항에서 '제주도민' 기분이나 내려했다니 대단히 부끄럽다.




잊고 있었던 제주에 살고 있는 이유가 떠올랐다.

앞으로 많은 것을 처음 경험하게 될 아이처럼, 관광온 외지인처럼..

내게 주어진 일상을 호기심 있게 살아가야겠다.

어차피 모두가 이번 생은 처음이니.


 

이 지구별 처음이고요, 제주 여행 중입니다.
하지만 도민이니 도민할인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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