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고 포근한 형태의 달콤함
지금 다니는 직장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제품 출시가 확정될 때까지 다양한 버전의 레시피를 먹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레시피가 80% 정도 확정될 때 즈음 임직원들의 의견이 필요할 때면 공장에서 퀵으로 시 생산 제품들을 보내주곤 하는데, 본사에 있는 여러 팀들이 점심시간에 함께 모여 시 생산 제품들을 맛보며 ‘이건 진짜 맛있다.’, ‘이건 조금만 더 달아도 될 것 같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시간을 매번 기다린다.
당근 구이 만드는 법 : 당근 3개, 올리브유 두 큰 술, 소금 1/2 작은술, 후추 약간 뿌려서 대형 에어프라이어 기준, 160도 25분 + 140도 15분 동안 굽는다.
22년 여름, 조금 색다른 도시락 제품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로 출발한 도시락 제품을 테스트하던 때였다. 이 제품은 공장이 아닌 오프라인 매장에서 일하던 분들이 직접 레시피를 구상한 제품이었는데, 밀가루, 생크림을 사용하지 않고 소스와 미트볼도 직접 만든 제품이었다. 이 중 구황작물로만 구성한 도시락이 하나 있었다. 오븐에 구운 사과에 시나몬과 메이플을 살짝 입히고, 고구마와 단호박을 구워 함께 곁들인 이 도시락에 구운 당근이 가니쉬 중 하나로 들어있었다.
생당근도 익힌 당근도 모두 좋아하는 나로서는 익힌 당근과 비슷한 맛이겠거니 하며 구운 당근을 하나 집어먹었는데, 마치 곶감 말랭이 같은 전혀 예상치 못한 쫀득함과 달콤함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놀라며 다른 분들에게도 권했는데, 평소 당근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던 분들도 마지못해 한 입 먹어 보고는 "어 뭐지?? 왜 이렇게 달지?"라며 함께 놀랐다. 구운 사과처럼 메이플이나 아니면 설탕에 조린 건지 물어봤는데 전혀 아니라는 답을 받았다.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로 살짝 간을 하고 그냥 오븐에 뭉근하게 오랫동안 구웠다는 것이다. "당근이 진작부터 이랬으면 내가 자주 먹었지"라는 말들이 오갔고, 그날 구황작물 도시락은 다른 도시락보다 빨리 동이 났다.
직원분께 다시 한번 상세한 레시피를 물어보고는 그날 이후 당근을 넉넉히 사 두고 이렇게 종종 구워 먹고 있다. 다른 간 없이 올리브유 고르게 발라주고 소금과 후추 솔솔 뿌려 오븐에 끈덕지게 구워주기만 하면 먹을 때마다 신기함에 웃음이 절로 날 만큼 쫄깃하고 부드럽고 달콤한 당근을 맛볼 수 있다. 입이 심심할 때 설탕에 절인 다른 군것질거리 보다 죄책감 없이, 아무 거리낌 없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https://youtu.be/fn6Ory7x5UQ?si=Uk1dLfHXEn-Ofw9J
해외 비건 레시피들을 찾아다니다 보면 눈에 많이 띄는 재료 중 하나가 바로 땅콩 호박이다. 선명한 주황색에 표주박 같은 생김새. 호박이면 호박이고 땅콩이면 땅콩이지 왜 하필 땅콩 호박일까? 대체 어떤 맛이길래? 궁금해지는 이름.
어글리 어스에서 땅콩 호박을 고를 수 있길래 받아 보았었다. 감자 필러로 쉽게 껍질이 까지고 칼도 쉽게 들어가는 것이 손질하기 쉬웠다. 어떻게 먹을까 고민하다, 원물 그대로의 맛을 살린 레시피를 가장 먼저 시도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세로로 절반 크게 잘라 오븐에 천천히 굽고, 다진 마늘과 메이플 시럽을 섞어 달콤한 소스를 만들었다. 구운 땅콩 호박에 갈릭 메이플 소스를 양면 골고루 충분히 바르고 좀 더 스테이크처럼 꾸며볼까 싶어 가니쉬에 힘을 주었다. 상큼한 드레싱에 버무린 샐러드와 갈릭 메이플 소스의 달달함이 밋밋할 때 점 킥으로 곁들일 요거트 소스와 아몬드 페퍼 시즈닝까지. 입맛을 확 돋우는 주황빛의 땅콩 호박은 한번 구워내니 그 달콤한 냄새가 온 집안에 부드럽게 퍼졌고 반질반질 발라놓은 갈릭 메이플 소스의 달콤한 듯 알싸한 향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마지막에 욕심내어 추가한 식용 꽃까지. 특별한 날 내어 놓기 좋은 디쉬였다.
무는 멀뚱멀뚱 생겨서는 제법 매운맛이 매력적인 채소이다. 국을 끓이기는 귀찮고 무난하게 언제든 먹을 수 있고 만들기 쉬운 요리를 생각하다가 나물로 만들기로 했다.
감자 필러로 슥슥 껍질을 벗기고 두껍게 채 썰어 들기름에 한번 코팅해 주다가 물, 간장, 연두 넣고 자박해질 때까지 끓였다. 들깻가루 취향껏 넣고 조금 더 뜸 들이면 야들야들 부드러워 자꾸 먹게 되는 무나물이 순식간에 완성된다. 비빔밥에 한 움큼 넣어도 좋고 담백한 국수에 한 숟갈 얹어 슴슴한 듯 부드럽게 먹기도 좋다. 턱관절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는 음식은 언제나 옳다.
슬슬 구운 당근과 땅콩 호박의 고유한 단맛이 자꾸 생각나서 아예 크림으로 만들어 파스타로 해 먹었다. 구운 당근이나 땅콩 호박에 견과류와 마늘, 혹은 두유 분량만큼 넣고 곱게 갈아내면 생크림 없이도 충분히 부드럽고 크리미 한 크림소스가 완성된다. 소스가 많이 묻을 수 있는 푸실리나 탈리아 텔레 면과 궁합이 좋다. 면수 부어가며 크림을 풀어주고, 면에 소스가 베이도록 천천히 뭉근하게 끓인다. 토마토나 크림, 오일 말고 색다른 파스타 소스를 만들어보고 싶을 때 쉽게 따라 하기 좋은 요리이다.
너무 익숙해서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맛을 보여줄 때가 있다. 중약 불로 뭉근히 삶았을 뿐인데, 쪄서 갈았을 뿐인데, 오븐에 구웠을 뿐인데 보란 듯이 색과 맛이 선명해지는 채소들이 참 매력적이다.
뭐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심산에 미적지근한 온도에 애매한 시간으로 구워낸 것들이 주는 기대 이상의 달콤함을 한 번이라도 느끼고 나면 또 달리 먹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열심히 찾아보게 된다. 우연치 않게 알게 된 당근의 쫀득한 달콤함과 땅콩 호박의 순한 단맛, 무의 든든한 단맛을 맛본 후 이 달콤함 들을 어떻게 더 맛있게 먹어볼까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전혀 모르는 길이어도 뭐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도해 보는 것, 맛있는 길을 찾는 데에도 꽤나 도움이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