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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상티망, 극우 감정의 뿌리

- 원한과 복수심으로 가득찬 사회가 된다면....

by 김현수


우익 행동을 실행하게 하는 감정적 동기 — 깊고 오래된 원한, 르상티망


극우 집단의 집회에 흔히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가 조커이다. 우리 나라의 한 극우 집회에서도 조커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왜 조커 복장을 했을까? 조커를 통하여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익 집단의 심리 이해를 접근하는 학자들은 원한의 감정, 특히 오랜 시간에 축적된 깊은 원한의 감정, 르상티망이 우익 행동을 하게 만드는 감정적 동기라고 지목한다.

영화 조커에서 원래 조커는 아서 플렉의 변신이다. 여러 신경학적 장애를 가진 아서 플렉이 조커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작용하는 감정 또한 원한이다. 세상을 그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으며, 그 상처가 가슴 속에 쌓여 있었다. 그는 약자이자, 병자였으며, 복지의 수혜자이자 대상자였다. 성장사 중에도 버림받음, 방임, 학교 폭력, 사회적 무시를 포함한 다양한 트라우마 그리고 수모로 가득찬 힘든 삶을 살았다. 그리고 자신이 흠모하던 사람에게 사회적 조롱거리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는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사람을 기억해내기 어렵고, 그런 존재를 만난 적이 없다. 조커의 가슴 속에 남은 감정은 그저 무력감, 원한 그리고 공멸 뿐이다. 이 감정이 그를 파괴적 행동으로 이끈다.

일부 우익 청년의 심리는 이런 감정으로 가득 찼다. 자신을 냉대한 사회의 가해자들은 정부 관료, 지식인, 셀레브러티들이다. 그리고 비슷하게 어려움을 겪지만 자신의 파이를 뺏어간 이주민들과 여성들 또한 원한의 대상이다.


깊고 오래된 원한 감정의 변화 과정


이 원한의 감정을 주목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 니체다. 그는 원한의 감정, 그리고 단순한 원한을 뛰어넘는 중요한 감정으로 르상티망을 언급했다. 단순한 분노나 원한과 차별하기 위한 명명이었다. 니체로부터 시작된 르상티망 개념은 현재 더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다.

르상티망을 불안하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패배주의적 분노로 정의하는 학자도 있고, 어떤 분석가들은 르상티망을 깊고 오래된 원한으로서 기존의 단순한 원한이나, 원망, 시기, 질투심, 복수심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조명하기도 한다. 르상티망을 적대적인 외부 대상(타자)을 향한 장기적인 성향 또는 감정적 태도라 보고, 르상티망을 갖는 사람 또는 집단(자아)은 외부 대상이 부당한 지위를 차지 하고 있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고 보기도 했다.

또 르상티망은 분노나 증오와 같은 잠시 ‘뜨거운’ 감정보다 더 강렬하고 지속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르상티망은 시간이 지나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 쌓이고, 르상티망을 품은 대상에 대한 분노나 원한이 자신의 자아를 모두 물들이면서 복수를 꿈꾸는 상태라고 할 수도 있다.

단순한 원한이 정의를 실행하는데 실패한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지만, 르상티망은 더 깊고 오래된 원한으로 자신의 지위, 삶의 자리를 모두 빼앗겼다는 낭패감에 대한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제 테러 대응센터의 소피 칸도르는 수십명을 살해한 우익 테러 가해자들의 선언문을 분석하면서 이 르상티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르상티망을 갖게 되는 경로와 과정을 이해하게 되면, 즉 분노와 원한이 쌓이는 과정이나 단계를 잘 분석하면 극우화와 극우 행동을 하게되는 것을 예방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깊은 원한의 감정은 어떻게 쌓여가면서 변화를 갖게 되는가? 니체는 3단계 과정으로 이해하고 제안했다.

첫째,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는 좌절과 좌절의 인식이 일어나는 것이 첫 번째 단계이다.

둘째, 자신이 원하는 열망에 대한 좌절을 경험하면서, 성취될 수 없는 이유를 합리화하려고 한다.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낫다는 우월감을 가지려고 애쓰는 단계이다.

셋째, 무력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한에 갇힌 자는 자신을 짓밟고 승리한 경쟁자가 자신이 마땅히 누려야할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권력이나 명성을 누리는 것에 대한 증오로 뒤덮이게 된다.

좌절, 합리화, 그리고 증오의 각 단계를 이해하고 각 단계에 따른 개입책을 대처하는 심리, 사회적 처방이 필요하다. 이를 더 잘 인식하기 위해서 이런 단계마다 감정이 어떻게 표출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감정들이 자라나서 뿌리가 깊어지고 강렬해지면 사람들은 새로운 상태로 나아간다. 사실이냐, 거짓이냐에 상관없이 그들의 원망이 어떤 믿음이 되면, 그 믿음이 가슴을 뛰게하는 원동력이 되면 사람들은 달라진다. 깊은 원한이 자리 잡으면 어떻게 달라질까?


르상티망, 무력감, 복수심 그리고 폭력 행동


깊은 원한에 사로잡힌 청년들은 무력감, 취약성, 복수심을 키우며 지내게 된다. 자신의 지위를 빼앗아간 사람들로 인하여 자신의 고귀함과 명예 조차도 짓밟혀 치욕적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지위를 되찾고 치욕을 갚아주는 폭력은 정당한 폭력이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가정에서의 부모, 학교에서의 교사들과 친구들, 그리고 동네의 어른들과 형들에게 겪은 치욕을 되갚아주는 것이 삶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자신의 보복하는 행위는 정의의 회복일 뿐이고 원래의 규범이나 가치를 복원시키는 일이다.

분노한 청년들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가해자의 지위가 확고해져갈 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될 때, 복수심 표출의 행동이 선택된다. 그리고 이 복수 행동은 정상을 되찾고, 타락을 막고, 불균형을 되찾는 일, 정의롭고 정당한 일로 생각한다. 이 확신은 때로 망상의 수준에 가깝다.

르상티망, 깊고 오래된 원한 감정은 공격적, 폭력적 행동을 정당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피해망상에 기초해 극단적 우익 테러라고 생각하지만, 이 르상티망을 품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오직 정의를 회복하는 일이고, 폭력이 아니라 침략에 대한 방어이고, 보이지 않는 전쟁을 보이게 하는 선전행위이자, 일종의 순교 행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익 테러는 참혹하고 거침없고, 죄책감이 없거나 혹은 한참 뒤에 그 망상의 숲을 빠져 나와야 죄책감을 갖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들을 이 깊은 르상티망, 원한에 사로잡히게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가장 증오하고, 가장 파괴되어야할 엘리트 집단


르상티망을 가진 우파 집단의 청년들이 자신들의 자리나, 권한, 문화, 규범 가치를 빼앗아간 사람들이라고 지목하는 자들은 여성, 엘리트, 좌파, 타민족, 이주민, 타종교, 동성애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가장 큰 분노의 칼끝을 겨누는 대상, 가장 증오하는 집단은 바로 이들을 초대한 사람들, 엘리트들이다. 자신들의 문화나 규범, 혹은 기존의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음모와 계략을 꾸며서 타락의 문화를 만드는 이들이 엘리트라고 여긴다. 또 여러 부당한 세력들에게 문을 열어주어서 침략의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들이 바로 엘리트들이다.

엘리트 집단이 증오의 표적이 되는 두세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엘리트 집단의 정치적 올바름 문화이다. 이들의 잘난 척, 무시에 경멸감을 받았던 수치와 모욕이 큰 원한이 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애 취급하고, 잔소리하고, 잘난 척하지만, 엘리트들은 자신과 가족의 이익에는 매우 위선적이면서, 우아한 방식으로 공익을 갈취해온, 알고보면 더 더러운 집단들이라고 생각한다.

모멸과 수치심, 위선에 대한 분노에 이어 엘리트 집단에 대해 원한이 깊어진 또다른 이유는 세금으로 모여진 수천억, 수조원의 예산을 탕진하는데 있다. 잘난 척하면서 세금에 기초한 예산을 가지고, 온갖 연구와 실험을 해서 무언가 나아질 것처럼 해놓고 사실은 돈만 받아갔다. 마치 인류에게 진보와 혜택을 엄청 줄 것처럼 해놓고, 많은 비서와 연구진을 두고, 해외나 다니고, 골프나 치고, 자신이 필요한 물건이나 산다. 낭비로만 생각되는 일들을 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엄청난 연구비가 지급되고 있다는 것에 분노한다. 더욱이 그 연구 결과는 그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기는 커녕 소수자, 다문화, 여성, 이민자들의 삶에 유리하고 그 그룹의 사람들에게만 효과를 거두는 일이 더 많다. 그래서 엘리트 집단의 연구는 믿을만하지 못한 것으로 인식한다. 엘리트 집단은 자기 집단과 초대받지 말아야할 집단을 초대해서 침략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사기치는 집단이다. 그들의 말을 믿어왔던 것이 오히려 문제라고 생각한다.


르상티망이 폭력 행동으로 폭발되는 전환점, 자각과 행동


르상티망을 갖고 분노와 증오에 가득찬 생활을 하는 우익 청년들에게 극단적 행동을 촉구하는 자각을 주는 것은 방송과 소시얼 미디어이다. 소시얼 미디어와 커뮤니티에서의 선동은 강렬한 영향이 있다.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사람이 특정 폭력 행동을 하고 남긴 후기나 소감문, 고백서, 투쟁기록은 이들에게 큰 자각과 용기를 준다.

‘약한 남성, 비겁하고 왜소한 소시민, 초식남, 기껐해야 관종’이었던 청년들이 유투브 영상, 커뮤니티 후기를 보면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용기있게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하고 자신도 그런 용기를 갖고 나서야겠다는 머리 속에서의 연습을 엄청하고, 글도 올리고, 선언문도 써보고 하는 자기 훈련을 한다.

영상이나 댓글에서 논쟁이나 댓글을 보고 자신이 평상시 해보지 못한 욕설을 해보고서 느끼는 쾌감과 자신감의 충전이 있다고 청년들은 고백한다. 엑스트라에서 히어로우가 된 기분으로까지 표현하기도 한다.

“잊혀진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 앞에서,

나의 절망은 수치심으로 바뀌었고,

수치심은 죄책감으로 바뀌었으며,

죄책감은 원한으로 바뀌었고,

원한이 광기로 바뀌었다”

극단주의 우익 테러를 저지른 사람의 내적 감동 변화 과정을 자신의 선언문에 담았던 외국의 사례도 있었다. 용기가 없었던, 인터넷에서 손가락부대의 일원이기만 했다가, 마치 인터넷 게임의 공격대에서 역할을 맡아 극우행동의 일부를 자신이 담당한 것이 인생의 영광, 용기있는 나섬으로 자평되기도 한다. 우익 방송은 일부 청년들에게 일종의 고백소, 양성소 그리고 명령을 부여하는 센터 역할을 충분히 한다.


르상티망에 따른 우익행동을 하는 청년들의 공통적 세계관


극단적 우익행동을 하는 르상티망을 가진 청년들의 세계관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 부당한 세상, 빼앗긴 지위

둘째, 부당한 세상을 만든 엘리트와 현존하는 음모

셋째, 부당한 세상을 되찾기 위한 정당한 행동

넷째, 합당하고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과 구원

그런데, 이 부당함과 음모는 망상 수준에 가까운 경우가 많고, 정의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은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설정이 대부분이다.

‘백인들만 사는 교류없는 자급자족 사회’ 혹은 ‘여성을 하급 인간으로 취급하는 중세 사회’, ‘가부장제 전통이 지켜지는 남성 중심 직장의 현대 초기사회’ 같은 설정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당한 행동에는 폭력, 살해, 말살과 같은 강도 높은 테러 행위가 포함된다. 우익 청년이 폭력의 대상으로 삼는 이민족, 여성, 동성애 등의 대상은 흔히 같은 동종의 인간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물이나 변종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나찌 혹은 그 이전시대부터 일상이 었다. 우파 청년들이 더 극단적 폭력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만 있으면 이민족이나 동성애자, 비기독교들이 자신들을 해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들의 민족이나 인종을 개량하려고 하는 음모가 있다는 생각을 거침없이 하기 때문이다. 혐오의 수준을 넘어서는 생각을 갖고 다음과 같은 표현을 거침없이 하는 일은 다반사다.

‘쥐새끼 같은, 독사같은, 균을 가진, 전염성 병을 퍼뜨리는, 변종 바이러스를 가진, 멸종시키려는, 다 혼합해버리려는’

망상적 혐오가 지배하고, 멸망을 주제로 하는 공상과학영화 시나리오의 공포가 그들의 세계에 존재한다. 이성은 작동하지 않고 공포와 불안이라는 감정만 작동하는 세계관이 우익의 폭력 행동을 정당화한다.

오래되고 깊은 원한, 르상티망을 갖게 된 삶에서, 순종을 버리기로 결정하고, 그 르상티망의 대상을 제거하고자 결단하면, 공포와 불안, 망상, 음모를 총동원하여, 앙갚음하는 것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게 된다.

원한의 사회에는 멸망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좀비같은 돌진이 넘치고, 설득되지 않겠다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복수만이 넘치게 된다. 좀비에게 한번 물리면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없다는 점에서 르상티망은 좀비가 되게 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르상티망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예방이다.

조커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따뜻한 지역사회, 돌봄 그리고 좋은 부모, 학교폭력을 잘 해결한 학교, 복지의 지원이 있었다면 아서 플렉은 조커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서 플렉이 자신의 존재가 깡그리 무시 당했다는 그 온갖 사회적 관문마다 돌봄, 포용, 갈등해결, 발언 기회, 부당함에 대한 완화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조치가 필요했었다, 따뜻한 돌봄사회가 되어야 한다.

불안정한 가정의 증가, 공동체의 붕괴, 사회적 지원의 단절, 학교에서의 폭력 증가와 미해결, 철저한 격차, 위선적인 중산층과 지배 엘리트, 효과없는 부패한 정책과 경직된 관료들과 음흉한 관료주의, 취업의 실패, 경멸과 무시의 사회적 냉대는 청년 우파의 사회적 배양지가 된다. 르상티망이야말로 우파의 감정적 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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