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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쉼표

by JANE

남편과 저녁으로 와인 한 병과 맵고 짠 인도 음식을 먹고 잤더니 퉁퉁 부은 얼굴로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아침 7시 30분. 우린 조식을 먹고 호텔 수영장에 가기로 했다. 여기저기 여행지들을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이 수영장 가는 시간이야말로 늘 기대하는 시간이다.


어느 나라를 가든 어느 도시를 가든 최소 하루 오전은 꼭 호텔 수영장에서 머문다. 수영은 잘 못하지만 물에서 노는 걸 좋아하고, 난 꼭 여행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여유’라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낯선 나라에서 여행을 하면 매 순간이 선택이고 계획을 짜고 가도 예외의 상황은 늘 발생하기 때문에 약간은 긴장된 상태에서 계속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몇 날 며칠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풀가동하게 되면 피로가 몰려오기 마련이다. 더 즐거운 여행을 위해선 꼭 쉼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남편과 유럽에서 대판 싸운 뒤로 깨닫게 되었다).


이런저런 조건을 따지다 보면 아직까진 호텔 수영장이 최고의 쉼표이다. 아침에 눈 뜨면 어딜 가야 하나 고민 없이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옷만 갈아입은 뒤 아무 생각 없이 포만감에 취해 선베드에 벌러덩 누워서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누리는 게으름을 피워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몸이 덥혀지면 간단히 수영을 하고 다시 선베드에 누워 몸을 말리면서 책을 읽는 행위가 그 어떤 디저트보다도 참 달콤하다. 그래서 이런 호캉스 일정을 잡은 날엔 특별히 인생의 행복한 사치를 누려본다.


우리가 머문 곳은 타지 홀리데이 빌리지 리조트라는 곳이었다. 인도에선 어딜 가나 타지 호텔이면 5성 급의 숙소 퀄리티와 부대시설 및 서비스를 보여준다. 그래서 호캉스 일정이 있을 때 가는 호텔 체인 중 하나이다. 고아는 인도의 휴양지로 유명해서 좋은 호텔들은 많고 많지만 이곳을 고른 이유는 아름다운 뷰의 수영장과 이 고아 전통 집처럼 생긴 알록달록한 빌라 디자인의 숙소들이 마을처럼 구성되어 있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경험상 인도에서만큼은 모던한 호텔을 가는 게 재미가 없다.


선베드에 누우니 울창한 야자나무들과 반짝이는 수영장의 물결들, 저 멀리 뿌연 바다의 수평선까지 보였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이 순간의 여유를 만끽하고 내쉬는 숨에 여행의 피로를 몰아냈다. 이 축복 같은 시간을 온몸으로 느끼며 집에서 챙겨온 책을 펼쳐들었다. ‘무의미한 날들을 위한 철학’이라는 책인데 코로나 시기 때 사서 아직도 다 못 읽었던 책이었다. 철학적인 내용이 담겨있는 책들은 아무래도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생각이 많아져 빨리 읽기가 어려운데 유난히 이 책은 중간을 못 넘어가고 자꾸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행지에선 또 이런 책들이 잘 읽혀서 이번엔 완독을 해보자 하고 가져왔다.


한 시간 정도 책을 읽으니 몸이 더워지고 땀이 삐질삐질 나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남편에게 신호를 보냈다. “수영하자!” 난 바로 온몸을 감싸고 있던 새로 산 오렌지빛의 화려한 카프탄을 벗어던지고 수영장에 발을 들였다. 발끝부터 적당히 시원한 온도가 느껴졌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니 얼굴만 나오는 깊이다(그렇다, 난 아담한 키다). 어쭙잖은 평형으로 앞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중간에 숨이 차서 한 번 멈췄다. 숨을 고르고 다시 앞으로 직진했다. 수영을 대학생 때 한 삼 개월간 배운 적은 있지만 여전히 못하고 물을 무서워한다. 언제가 수영장 끝에서 끝까지 한큐에 가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수영장의 끝으로 가니 평화로운 고아의 바다가 더 잘 보였다. “아 너무 좋다” 남편도 고개를 끄덕였다. 맘 같아선 수영장이 아니라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고 싶지만 고아의 파도는 수영보단 서핑에 적합해 보였다. 멀리서 보니 평화롭지 막상 들어가면 몇 걸음 가지 못해 모래와 함께 뒹굴다 나올 게 뻔해 보였다. ‘역시 바닥이 고르고 깊이가 예측 가능한 수영장이 안전하지.’라고 생각하는 나였다.


우리는 수영장 끝에 붙어 발을 저으며 도란도란 그동안 갔던 여행지들 얘기를 하다 작년에 갔던 몰디브 여행을 추억의 서랍에서 꺼내었다. 우리의 가장 완벽했던 휴양 여행.


신혼여행을 하와이로 다녀와서 앞으로 내 인생에서 몰디브 갈 일은 없겠구나 했는데 인도 항공사에서 겨울 시즌에만 잠깐 인도-몰디브 직항을 오픈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려면 경유 포함해서 가는 데만 거의 하루를 잡아야 하는지라 엄두도 못 냈는데 동남아보다 가까운 ‘편도 4시간’이라는 노선에 남편과 나의 눈과 귀는 번뜩였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우리도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잔해보자며 티켓을 끊었다.


몰디브는 아주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 그 작은 섬 하나를 리조트 하나가 숙박 및 편의 시설을 같이 지어 운영하는 게 일반적이다. 쉽게 말하면 몰디브 본섬에 도착해 뭔가를 다시 타고 내가 예약한 리조트가 있는 섬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고립되어 먹고 놀고 자고 하면 된다는 얘기다. 그거 외엔 할 게 없다. 그래서 숙소를 잘 고르는 것이 중요한데 당연한 거지만 먹는 것과 누리는 것의 다양성과 질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우리는 앞으로 다신 오기 힘들 여행지라는 생각에 숙소의 기대치는 점점 올라갔고 숙박료 또한 더 올라갔다. 결국 수상 비행기를 타야 하는 섬으로 가서 물 위에 떠있는 워터빌라에서 묵기로 결정한 우리는 살 떨리는 결제를 했다.

그렇지만 우리에겐 그 어느 여행보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준 여행이었다.


사실 인도에 온 1년차였던 그 해, 남편과 나는 마음이 유난히 지치고 힘든 시기를 지내고 있었다. 그는 불안함과 답답함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헤매며 가고 있었고, 나는 외로움과 자괴감에 끝도 없이 침몰하고 있었다. 다툼이 잦아졌고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자, 쉬고 싶다는 말을 밥 먹듯이 했었다. 끊어질 것 같은 끈을 서로 아슬아슬하게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엔 누구보다 서로가 필요한 걸 알기에 그 끈을 튼튼하게 만드는 노력을 하기로 했다. 몇 가지 공유하자면 솔직한 대화의 시간을 자주 갖기(이때부터 우리의 저녁 술타임보다 티타임이 많아졌다), 미래에 대해 조급해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오늘을 행복하게 살기, 사소한 것이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것이든 서로의 꿈 혹은 위시리스트를 공유하고 응원해 주기 이런 것들이었다.


10년을 만난 우리가 서로를 다 알 거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삼십몇년씩을 데리고 산 나 자신을 그리고 너 자신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동안 바쁘고 귀찮으니 됐다 하고 넘겼던 것들이 낯선 환경에서 수면 위로 하나 둘 문제로 떠올랐다.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솔직하고 많은 대화가 필요했다고 결국 진짜 너와 나를 알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우리는 안정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이 성장통의 끝 무렵 우린 약간의 보상 같은 시간이 필요했다.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리프레시 할 수 있고 아무런 고민도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는. 딱 이 시점에 4시간짜리 몰디브 직항이 나타난 것이었다. 올해 계획했던 여행은 이미 다 다녀온 뒤라 여행 계획이 더 이상 없었는데 이 소식을 듣곤 남편은 며칠 쉬고 오자며 웬일로 추가 여행을 제안했다.


올인클루시브(식사 및 시설 사용이 다 포함된) 옵션으로 몰디브에 간 우리는 그 어떤 휴양지보다 아름다웠던 에메랄드빛 바다를 마음껏 즐기고 왔다. 푹 자고 일어나면 매일 아침 우리의 워터빌라 쪽으로 놀러 온 가오리들 물고기들과 인사하고 조식을 먹고 나면 장비를 착용하고 스노클링을 즐겼다. 점심을 먹고 나면 테니스나 탁구를 치거나 아니면 또 바닷가에 나가서 유유자적 놀았다. 섹시한 구릿빛으로 태닝을 하겠다고 한 시간 누워있다가 강렬한 햇빛에 타버린 간고등어 구이처럼 구워진 서로의 몸을 보며 비웃었다. 밤이 되면 바닷가 한가운데서 별을 보며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그렇게 어딜 가야겠다, 뭘 봐야겠다는 목적 없이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마음껏 흘려보냈다. 둘 다 이전까진 이런 목적 없는 여행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해본 적도 없었지만 이 여행만큼은 예외였다.


여행도 인생도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는 쉼표 같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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