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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美酒)과 미술(Art)

by JANE

난 잘 알지는 못해도 아름다운 미술을 애호하고 맛있는 술들을 찾아 먹는 사람이다. 이 둘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지만 아마 우리 집에 놀러 와본 사람이라면 벽마다 걸려있는 그림들과 긴 벽장 하나를 채우고 있는 술과 술잔들을 보고 단번에 눈치챌 것이다. 나름 잠깐 공부를 해본 적도 있다. 예술사 수업을 들어본 적도 있고 와인 자격증들을 따기도 했지만 어디 써먹을 데도 없는데 그 지식이 온전히 머릿속에 남아있겠는가. 순전히 개인적인 기호와 느낌으로 즐기는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만은 한결같으니까.


아마 남편이나 나 둘 중에 하나가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지 않는다면 계속 여행하며 유명하다는 미술관을 찾아다니고 맛있는 술을 발견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술 퍼마시고 네 발로 걷는 그런 술고래로 보면 오산이다. 엄연히 맛만 즐기는 애주가라 하자. 엣헴!


어렸을(?) 때부터 술을 좋아한 건 아니다. 20대 초반에 처음 마신 맥주와 소주는 왜 그렇게 쓰고 맛이 없던지. 대학생 때는 학과 행사가 있을 때만 억지로 마셨고 여자 친구들과는 가끔 슬러시 같은 과일소주 이런 것만 먹었다. 소주, 맥주가 맛없는 것부터 이미 매력이 없는데 무엇보다 술 마시고 취하는 기분은 더 별로였다. 취하기 위해 술을 마신다지만 개인적으로 취했을 때 어지럽고 정신이 흐려져 몸도 같이 둔해지는 그 느낌이 싫어서 취한다 싶으면 내 살을 꼬집고 정신 차리라며 나를 깨웠다.


그나마 좋아한 게 와인이었다. 무엇보다 과일향이 나니까. 그리고 맛이 다양해서 좋았다. 소주처럼 첫 향에 알코올 향이 확 느껴지지도, 맥주처럼 밍밍한 보리차 맛이 나지 않아서 포도 종류별로 나라별로 한 병 두병 사보는 재미가 있었다. 나의 이 편협적이었던 술 입맛이 넓어진 건 경상도 출신 구남친(현남편)을 만나게 된 이후다.


구남친은 완전 소주, 맥주, 막걸리만 먹는 전통 입맛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연애 초반에는 여친에게 잘 보여야 하니 와인을 함께 마셔주러 다녔다. 하지만 그는 한식과 소주의 조합을 애정하는 사람이었던지라 연애 초반이 지난 뒤 그는 나에게 소주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오리지널 버전을 권장하면 퇴짜 각이니 당시 한창 유행했던 순하리 과일소주부터 권했다. 달달하고 과일 맛이 나는 게 꽤 입맛에 맞았다. 이게 시작이었다. 그의 노력 덕에 나의 입맛은 점점 더 발전(?)하여 편의점 노상에서 김, 참치캔 이런 것만 있으면 오리지널 소주를 비우게 되는 경지까지 오게 되었다.


한 번은 남편과 함께 경주를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유명하다는 최부자댁 경주 교동법주를 소개해주었다. 조선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했다는데 이 법주는 여기에서만 살 수 있고 다른 법주들과는 맛이 다르다는 것이다. 300년이나 내려져오는 무형문화재 술은 무슨 맛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부모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 한 병 사가지고 올라왔다. 그날 저녁상에서 이 고고하고 하얀 긴 도자기 병에 담긴 술을 따라보자니 마치 양반이 된 기분이었다. 왠지 없는 소맷자락을 잡는 시늉이라도 하며 따라야 할 것 같은 느낌. 드라마를 너무 봤나;;


아무튼 맑고 투명한 레몬빛의 이 술은 부드러운 곡향, 누룩 향이 느껴지고 섬세한 단맛과 고소한 맛이 어우러지는 게 일품이었다. 사실 좀 충격적으로 맛있어서 ‘전통주=제사상에 올리는 맛없는 술’이라는 나의 무식했던 편견에 강력한 펀치를 날린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또 전통주와 막걸리에 관심이 가기 시작해 마트나 백화점 주류 코너에 가면 꼭 하나씩 사오게 되었다.


구남친 시절부터 지금의 현남편까지 오는 십 년의 세월 동안 서로가 가진 술 취향을 공유한 덕에 우리가 즐기는 술의 반경은 무한대로 넓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여정은 인도에 와서까지 이어졌다. 술이라고는 기대도 안 했던 인도에서 와인과 위스키를 만든다니 호기심에 안 사보고는 못 배기지. 매번 사 먹기만 하다가 기어이 작년엔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나식 지역에 있는 술라(Sula) 와이너리를 찾아갔다. 이번 고아에 와선 폴존(Paul Jhon)위스키 증류소도 방문했다. 그리고 하나 더 체험해 보기로 한 술이 있었는데 바로 고아의 특별한 전통주 페니(Feni)였다.


어느 나라를 가나 곡물이나 과일로 만든 전통주는 많이 봤어도 캐슈넛으로 만든다는 술은 처음 들어봤다. 고아에 가면 이걸 꼭 먹어봐야 한다는 글을 보고선 무슨 맛일지도 궁금했지만 무엇보다 술은 발효가 되어야 하는데 넛이 어떻게 발효가 된다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뭔진 몰라도 고소하고 맛있겠지 하고 고아에 가면 시도해 봐야겠다 생각했다.


나의 궁금증을 바로 풀어준 건 우연히도 바가 아닌 고아의 현대 미술관 수나파란타(Sunaparanta Goa Centre for the Arts)를 갔을 때였다. 내가 다니고 있는 화실의 미술 선생님은 고아는 기존의 인도의 예술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졌다며 꼭 미술관을 찾아가서 많은 작품을 보고 오라고 추천해 주셨다. 과연 달랐다. 신에 대한 이야기보단 사람과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고 표현 방식도 입체적이고 다양했다. 고아의 예술 위트도 있고 정말 매력적이라며 수도 없이 감탄했다. 나와 남편은 자기 속도에 맞춰 따로 또 같이 천천히 작품들을 음미하며 하나씩 구경해나갔다. 그리고 거의 마지막 차례에 있던 관을 보려고 발길을 옮겼는데 순간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아니겠지만) 페니를 소개하는 영상이 내 앞에 딱 나타났다.


이 작은 관 안에 있던 영상들은 옛 고아의 모습들을 촬영한 짤막한 영상들을 현대 기술로 복원해 글과 함께 붙여 만든 필름이었다. 신기하게도 그 영상들 중 한 편이 페니에 관련된 것이었다. 전혀 기대치도 않았던 이 영상이 나오자 앞에 있던 벤치에 앉아 홀린 듯이 감상했다.


눈이 번쩍 뜨였던 건 우리가 흔히 보는 캐슈넛이 열매로 달려있는 모양새였다.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빨갛고 노란 사과들이 탐스럽게 열려있고 그 사과들의 꼭지 부분에 작고 귀엽게 콤마 모양으로 튀어나온 것이 캐슈넛인 것이다. 이 사과들을 캐슈 애플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 전체 형태는 마치 버섯, 초코송이 과자 같았다. 세상에 견과류가 사과와 함께 열릴 것이라고 감히 상상이나 해봤을까. 역시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많다.



바로 이 넛을 빼고 남은 사과로 만든 술이 페니였다. 바로 이해가 갔다. 넛이 아니고 과일이니 발효가 되는 것이다. 아 궁금증이 해결됐을 때의 이 짜릿함, 예상치 못한 발견을 하게 되었을 때의 쾌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난 거의 유레카 급으로 남편을 불렀다. “오빠 오빠! 이게 이래서 ~~ 이렇게 된 거래!! 신기하지?” 나만큼 신기하지는 않았는지 남편은 역시나 “어~그러네~” 하며 맞장구를 쳐줬다. 내가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너무 호들갑을 떨었나 싶기도 했지만 시원찮은 리액션에 남편에게 가던 길 가시라며 보내고 난 좀 더 보기로 했다.


결국 페니는 이 발효된 술을 증류시켜 뽑아낸 고도수의 증류주였다. 이 모든 작업들은 손이 참 많이 갔다. 영상들만 봐도 기계도 없이 수작업으로 하는 과정이 너무 고되게 보였다. 하지만 찾는 소비자들이 많지 않아 점점 사라져 가서 이제는 만드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며 이 전통주가 사라져 감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내용이 이어졌다. 우리나라도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전통이 참 많은데 요즘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것이 그리고 나조차도 찾지 않는 것이 씁쓸했다.


그래서 생각했다. ‘진짜 앞으로 페니라는 단어가 메뉴에 보일 때마다 먹어봐야겠다!’ (응? 그렇다고 술을 그렇게 매번 찾아마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전시 하나가 사람을 이렇게 바꾼다. 전시 기획자는 의미 전달을 확실하게 했고 그 의도를 간파한 관람객 하나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려 이렇게 글까지 쓰고 있다. 인도의 전통주가 한국에까지 전달되는 샛길을 터주고 있지 않는가(의미 부여가 너무 과했나?ㅋ).


나의 페니 모험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고아에 AAA (All About Alcohol) 뮤지엄을 찾아갔다. 개인이 운영하는 것 같은 소규모의 알코올 뮤지엄이라는 곳이 있어 예약하고 가보았는데 이곳에서는 다양한 술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페니 만드는 과정을 설명해 주고 이 술을 만들 때 사용했던 실제 도구들도 보여주었다. 40분 정도의 투어가 진행된 뒤 바텐더가 (알코올 뮤지엄답게 상주하는 바텐더가 있다! 아주 옳다!) 페니가 들어간 칵테일 4가지와 오리지널 페니 한 잔을 샘플러로 만들어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 오리지널 페니의 맛을 설명하고 싶은데 묘사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는 게 개탄스러울 따름이다. 증류주니 당연히 도수가 높고 바디감이 있고 드라이하면서 약간의 단맛이 느껴지는데 페니는 도드라지는 향이 있다. 굉장히 강렬한 인상의 이 향이 호불호를 갈리게 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페니는 코코넛이나 사탕수수로도 만들어진다고 들었는데 이 특유의 향은 진짜 이 캐슈 열매로 만든 술에서만 느껴진다고 했다.


이 향은 나에게 ‘극호’는 아니었다. 거짓말 일도 없이 진짜 음식점이나 바를 갈 때마다 페니라는 단어가 보이면 하나씩은 꼭 시켜 먹어봤는데 열에 아홉은 입맛에 잘 맞지 않았다. 먹다 보면 맛있는 거 하나는 걸리겠지 하는 마음에 시도해 봤건만 이렇게 많이 실패한 술도 없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느끼고 말았다.

페니 넌 나의 데스티니는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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