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오후 다섯시쯤 길쭉한 고아의 폰타나스(Fontainhas)라고 불리는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라틴 지구가 위치한 곳으로 이동했다. 나는 서둘러 예약한 숙소를 체크인하고 남편에게 빨리 나가자고 재촉했다. 해가 지기 전 다채로운 컬러들로 가득한 이 아름다운 동네를 한 시라도 더 빨리 더 많이 구경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아의 상징인 이 동네를 천천히 걸어보았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게 채도 높은 연두, 노랑, 핑크, 파란색의 등등의 건물들이 촘촘하게 붙어있어 거대한 세트장 혹은 놀이공원을 연상케 했다.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은 아름다운 타일들, 아기자기한 이정표들까지 디테일이 살아있다. 남부의 유럽을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확연한 인도의 색이 존재했다. 이 어우러짐의 매력은 국경을 초월하는지,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곳곳의 벽을 배경으로 끊임없이 셔터를 눌렀다. 남편도 이에 질세라 여기 서봐, 저기 서봐하며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와이프의 인생샷을 건져주기 위해 분발했다.
개인적으로 고아의 폰타너스 구역처럼 비비드한 색채들로 넘실거리는 건물들로 채워진 그리고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지역들을 상당히 애정한다. 우리나라의 회색빛 가득한 모던한 빌딩들과 아파트에만 눈이 노출되다 보니 그 반대의 매력을 가진 것들에 끌리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동안 수많은 곳들을 여행했지만 제일 좋았던 여행지로 늘 이탈리아의 포지타노, 포르투갈의 리스본, 미국의 산타모니카 같은 곳들을 꼽는 것만 봐도 내 취향은 확고하다.
그곳들이 뭐가 그렇게 좋냐고 물어본다면 그 도시가 주고 있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마치 SNS에서 본 일러스트가 살아 일어난 것 같은 도시의 느낌이다. 팔레트에서 가장 예쁜 컬러들만 골라서 칠해 놓은 것 같은 건물들,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의 물결, 길가의 꽃과 나무들, 휴양지 옷차림 등등 이 많은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시각적인 영감들을 끊임없이 밀려드는 곳들이다. 게다가 보통 이런 천혜의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곳들은 식재료들까지 훌륭해 맛있는 음식들을 언제든지 맛볼 수 있다는 훌륭한 옵션까지 있다. 직업도 비주얼! 머천다이저였고 식도락가인 나 같은 여행자에겐 인생 여행지가 될 수밖에 없는 곳들이다.
그래서 유난히 이런 곳들에 가면 행복함이 분수처럼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어느 곳을 가도 어떤 것을 보아도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나는 더없이 자유로움을 느끼고 그로 인해 왠지 모를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햇살에 반사된 무지개 같은 컬러들이 나에게 입혀지는 착각이 들기 때문일까. 반복되는 일상의 답답함에 뿌옇게 돼버린 머릿속에 먼지들을 걷어내고 다시 본래의 색을 찾는 기분이 든다. 컬러가 나에게 해방감을 안겨준다.
또 다른 이유는 행복했던 날을 추억할 수 있게 해줘서 일 수도 있겠다. 이런 곳에 가면 난 꼭 같은 회상에 젖는다. 2010년 미국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 당시 나는 한국에서 20대 초반 대학생이었는데 그때 마침 디즈니에서 여러 나라를 돌며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할 학생들을 뽑았던 적이 있었다. 운이 좋게 나는 우리나라에서 3기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어학연수 4개월의 시간을 제외하고 7개월 정도 유급 인턴십을 할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놀이공원에서의 인턴십이라니. 게다가 돈을 받고! 듣기만 해도 설레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나의 첫 해외 생활이었다. 첫 자유가 생긴 것이다.
놀이공원 알바 까짓것 뭐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생각했었다. 디즈니라는 환상에 홀려 별로 알바 경험도 없는 내가 용기와 무식함만 장착하고 나름 해외 취업을 한 것이다. 근데 역시 일은 일이었던가. 단순 업무이긴 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 현지인들 혹은 다양한 나라의 관광객들과 말을 섞고 하루 종일 서서 근무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나는 우스꽝스런 유니폼들을 입고 가장 유명한 신데렐라 성이 있는 메인 파크에서 팝콘이나 스낵들을 파는 일을 했는데 이 단순한 일에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심한 길치인 나는 이 큰 놀이공원에 수십 개의 카트들 중 내 카트가 어디인지 몰라 방황하기 일쑤였고, 지지직거리는 무전에서 흘러나오는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근처에 있는 동료에게 매번 물어보아야 했다. 야외에서 근무하니 날씨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서비스업이 주는 피로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배경은 그 힘듦을 잊게 해주는 (디즈니가 너무 사랑하는) 매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이 꿈같이 아름다운 풍경은 동화 속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유럽 작은 마을의 집들을 본 떠 만든 것 같은 아기자기한 샵들, 동심을 자극하는 형형색색의 세트들, 익숙한 디즈니 음악,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 친절한 직원들까지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 게다가 매일 화면 속에서 보았던 미키 미니, 공주 왕자들이 등장하는 퍼레이드나 거대한 규모의 불꽃놀이를 보다 보면 어느새 스트레스는 눈 녹듯 사라지고 행복한 기분만 남았다. 매일 봐도 절대 질리지 않았던 것들이다. 놀이공원에서 일하던 직원들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손님들에게 하는 말이 있었는데 “마법 같은 하루 보내세요! (Have a magical day!)였다. 내가 수없이 뱉은 말이 나에게 돌아온 건지 이곳에서의 추억은 컬러들로 가득한 곳들을 마주할 때마다 마법처럼 환기되어 그 순간, 그 하루를 행복하게 만든다.
고아의 폰타너스 구역도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