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오게 된 이유는 남편이 주재원으로 나가게 되면서였다. 주재원은 본인의 선택으로 지원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가야 하는 건 아니었다. 마침 내가 퇴사를 하고 쉬고 있던 때, 남편은 내게 제안했다.
“해외로 주재원 가면 어떨 것 같아?”
사실 남편은 몇 년전 내가 늦깍이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막 직장에서 자리를 잡았을 때 처음으로 이 제안을 했었다. 일을 시작해야 할 시기에 다시 장기간 해외로 나가는 건 무리수였기에 난 단칼에 거절했다. 하지만 4년이 흘러 다시 이 질문을 던졌을 때는,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를 한지 팔개월 이상 지난 시점이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난 지금 이 막막한 현실로부터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인도라는 선택지는 망설여졌다. 낯설고도 생소한 나라에서 4년이라니… 언젠가 버킷리스트에 있는 여행지들을 모두 다 가본 뒤, 인생에 한 번쯤 요가 여행으로 가보지 않을까 싶었던 나라였는데, 그곳에서 생각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훨씬 오래 머물 수도 있는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와버렸다.
게다가 일을 하던 나에게 이 선택은, 4년이 넘는 공백을 의미했다. 그렇게 되면 직장인으로서의 복귀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미 직장 생활 중간에 유학으로 3년을 더 보냈던 터라, 평균적인 속도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던 동료들보다 한발쯤 뒤처져 있었다. 그렇기에 헤드헌터들에게 좋은 제안이 올 때 하루 빨리 이직해서 직장으로 빨리 복귀하는 게 맞았지만 불행하게도 건강상의 이유가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평소에 잔병치례도 잘 하지 않는 건강 체질이었는데 코로나 시기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족저근막염과 피부 자가면역 질환이 갑작스럽게 찾아와 브레이크를 걸었다. 거의 매일 매장과 이벤트 장소들을 오가며 외근이 잦고 오래 서 있어야 하는 VMD(Visual merchandiser)라는 직업을 가진 나에게 발에 생긴 질환은 최악의 조건이었다.
패션과 주얼리 업계에서 일하던 나는 나 자신을 어느 정도 꾸미고 적당한 굽이 있는 힐을 신고 출근하는 걸 좋아했다. 힐의 높이가 올라갈수록 작은 키는 자연스럽게 커버되었고, 바닥을 울리는 또각또각 소리는 나를 지탱해 주는 작은 자부심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발바닥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쿠션이 두둑한 나이키 러닝화만 신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조금만 오래 서 있거나 조금만 많이 걸으면 통증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발바닥에서 시작된 고통은 다리와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고 머릿속까지 혼미하게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알을 빠르게 굴려 근처 의자를 찾거나 화장실로 가서 주저 앉아야했다.
할 수 있다는 치료는 웬만한 건 다 받아봤다. 정형외과도 여러 군데 찾아다니며 충격파 치료도 받았고, 한의원에가서 주기적으로 약침도 맞았다. 도수치료와 비싼 전신 마사지도 꾸준히 받아봤지만 눈에 띄는 호전은 없었다. 의사들은 도돌이표처럼 늘 같은 답변만 했다. “발을 최대한 쓰지 말고 스트레칭 하세요”라며. 그 말이 틀리진 않겠지만, 내 일상에서는 적용될 수 없는 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동시에 찾아온 피부 질환은 나를 더 약하게 만들었다. 어릴 적 아토피를 앓은 적도 없었고, 살성이 좋은 편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기에 이런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가려운 곳을 긁을 때마다 시원함은 잠깐뿐, 곧바로 더 큰 가려움과 따가운 통증이 찾아왔다. 긁은 부위와 그 주변의 피부는 빨갛고 흉측하게 울룩불룩 부어올랐다. 시간이 갈수록 증상은 점점 더 잦아졌고, 가려움은 온몸으로 번져갔다.
피부과와 알러지 전문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지만, 알러지도 아니고 특정한 병 때문도 아니라는 진단만 돌아왔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자가면역 질환이라 했다. 내 몸이 나를 공격하는 거랬다. ‘대체 왜?’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저 이만하면 피부 질환 치고는 양호한 편이라며, 죽을 때까지 항히스타민제를 매일 복용하라는 이야기밖에 듣지 못했다.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는 두 질환은 삶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트렸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서 아픈 티조차 나지 않았지만, 조금만 걸어도 발 아프다, 피곤하다,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왔다. 매일 수도 없이 가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눈을 질끈 감고 깊은 숨을 내쉬며 참아내야 했다. 하루 일과를 끝내는 게 전보다 훨씬 길고, 버겁고, 힘들어졌다. 너무 서러웠다.
‘왜 하필 지금이냐고! 지금은 쉴 시기가 아니라고!!’
더 잔인했던 건, 나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감기나 상처처럼 시간이 지난다고 괜찮아지는 것도 아니었고, 약을 먹는다고 눈에 띄게 상태가 달라지지도 않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다행히 훨씬 좋아졌지만, 여전히 증상은 남아 있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고통은 사람을 서서히 지치게 했다. 그렇다고 쉴 수도 없었다. 암처럼 ‘큰 병’이 아니니 병가를 내기에도 애매했고, 그저 버티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머릿 속을 강하게 지배한 건, 이직 이전에 다녀온 3년의 유학 기간을 하루빨리 경력으로 메워야 한다는 조급함이었다.
이럴 때 가장 큰 피해자는 늘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이다. 쉽게 지치는 탓에 예민함과 짜증은 자주 치솟았고, 바로 옆에 있던 남편에게 전달되기 일쑤였다.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매일같이 “아프다”, “힘들다”는 말을 듣는 게 얼마나 버거웠을까. 그 역시 속이 상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사직과 사업을 제안했다. 일단은 좀 쉬면서 몸을 회복하고, 내가 정말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해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사업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주변에 관련 업종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그 말을 들었을 때 막연한 두려움만 가득했다. 그런 제안을 한 남편에게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나는 그럴 깜냥이 안 된다며, 그러다 망하면 책임질거냐고 되레 날을 세웠다. 어떻게든 직장은 계속 다니겠다고 바득바득 우겼다. 그때의 나에게 쉼과 실패는 시간 낭비이자 사치라 생각했다.
미련하게도, 참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코로나 초반에는 재택근무와 외근을 번갈아 하며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오피스가 정상화되면서 다시 매일 출퇴근이 시작됐고, 거의 매일 외근까지 겹치자 몸은 백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매일 한숨만 쉬며 무너져 가는 나를 남편은 계속해서 설득했고, 결국 질환이 시작된 시점으로부터 열 달을 더 근무한 뒤 퇴사를 결정했다. 30대 나이에, 그것도 건강상의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게 될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게 되버렸다.
회사에서는 아프다는 티를 많이 내지 않았던 터라, 건강상의 이유로 퇴사를 한다고 했을 때 다들 놀라거나 선뜻 믿지 않는 눈치였다. 차라리 쿨한 척 “저 사업 하려고요”라고 말하는 쪽이 더 쉽게 납득되는 분위기였다.
당시 직속 상사였던 부장님께는 퇴사를 공식적으로 알리기 전에 면담을 신청했다. 코엑스 현대백화점에 매장에서 근무를 마친 뒤, 근처 파리 크로와상에서 마주 앉아 개별 면담을 했는데 그 시간이 너무 생생하다. 내가 직장 생활에 욕심도 있고 만족도도 높다는 걸 알고 계셨는지, 부장님은 직장 선배로서, 또 여자로서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셨다. 한 시간이 넘도록 차라리 병가를 쓰라며 퇴사를 말리셨다. 직장 생활을 통틀어 가장 존경했던 상사였는데 그런 부장님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발견한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언제 괜찮아질지도 모르는 이 망할 몸 때문에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았다. 나조차도 이런 내 몸뚱아리가 너무 원망스럽고 미웠다. 몸과 마음의 배터리가 빨간불을 깜빡이며 1%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더는 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남편과 충분한 상의 끝에 1년이란 시간을 정했다. 몸도 추스르면서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시도해 볼 수 있는 시간. 막연한 기대였지만,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을까, 쉬면 나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사업도 해보다 안 되면 복직하면 되고. 아무리 길어봐야 일년이잖아.'
그땐 그렇게 믿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