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식스티즈"와 흑인 예술 운동
다양성하면 미국, 미국 하면 다양성이죠. 다양성 문제가 대두되면서 백인 배역에 유색인종을 캐스팅하는 등 연극계에서도 다양성을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눈에 띕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언제 어떻게 이러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연극계는 그 안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세계대전 이후로 시작된 실험적 근대극을 지나, 조금 더 현대로 와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현대 미국 연극에 대해 알아볼 건데요. 다양성이 키워드인 현대극의 물결은 더 식스티즈 (The Sixties)라고 불리는 1960년대를 통해 생겨났습니다. 60년대부터 미국의 비주류 소수자들이 차별에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거든요. 이전에는 미국의 정체성이 멜팅팟(melting pot, 여러 가지가 한꺼번에 뒤섞여 하나로 합쳐지는 도가니)의 이미지로 표현되었다면, 60년대에는 이에 대한 비판적 의견이 두드러지게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가 하나로 뒤섞인다는 것은, 결국 모든 다양성이 백인 정착민에게 맞추어 획일화된다는 뜻이었죠. 이에 반대하는 “다양성” 개념은 차이를 없애기보다는 그 자체로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양성”이라고 하면 인종적, 성적 차별부터 떠올리기 쉬운데요. 60년대 미국에서는 나이, 세대, 종교, 계급, 가족 관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성의 물결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서 마윅(Arthur Marwick, 1936-2006)은 60년대를 기성사회에 대한 비판, 개인주의, 청년 세력, 기술적 발전, 국제 문화 교류, 물질적 삶의 향상, 인종, 계급, 가족 관계의 대변동, 성적 자유, 새로운 자기표현 방식, 락음악의 전 세계적 공감, 다문화에 대한 의식 등으로 묘사했습니다. 전반적으로 기성 사회에 대한 반발적 감성을 찾아볼 수 있죠. 또한 기존에 반문화 또는 언더 문화라고 여겨 공적인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던 소수 문화가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반문화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히피 문화 역시 60년대의 산물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하나로 묶는 개념이 인권이었기에, 60년대는 인권운동의 시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미국 이야기를 하는데 왜 영국 학자가 나올까 싶죠. 물론 다양성이라는 키워드는 미국의 정체성을 이루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장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발전된 개념이지만, 이 60년대의 감성은 서양 전반을 강타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후기 식민 시대로 들어오면서 인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죠. 아프리카와 남미 등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식민 통치를 벗어나면서 전쟁, 쿠데타, 테러, 가난과 기아 등 상당히 혼란스러운 정치적 과도기 상태를 경험하고 있었고요. 계속되는 냉전 또한 나라의 주권과 인권에 대한 논쟁을 점화하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면, “더 식스티즈”는 대략 1958-1974년경을 일컫는데요. 그 정가운데의 3년인 1967-1969년에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역사적 사건들이 있습니다. 1967년에는 첫 “휴먼 비인(Human Be-In)” 행사가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공원(금문공원)에서 열리는데요. “히피”로 대표되는 청년 세대들이 기존 관습에 대한 순응, 전쟁, 물질주의에 반대하고 공동체 정신의 함양을 주창하며 존재감을 과시하였습니다. 히피 감성의 평화 시위 분위기를 살짝 들여다볼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evjEZZbryw0
이듬해인 1968년에는 흑인 인권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터 킹과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될 것이었던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합니다. 이에 대한 충격으로 가난한 흑인 게토 지역을 중심으로 폭동, 약탈, 방화 등이 일어나고, 경찰의 과잉 진압 사건 또한 연속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에 더해 1968-1971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로 대학 캠퍼스에서 집단 항의 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는 미국이 대학생 나이의 젊은 청년들을 차출해 가는 것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60년대의 분위기 속에서 연극인들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연극이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공원, 문화 회관, 교회 등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장소에서 공연을 하곤 했습니다. 지금까지도 풀뿌리 민주주의 모토를 달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브레드 앤 퍼펫 씨어터(빵과 인형의 극, Bread & Puppet Theatre) 또한 이때 등장한 극단입니다. 이 극단은 인형극이라는 친근한 소재를 활용하여 짧은 풍자 씬을 여러 개 짜깁기한 공연을 야외에서 선보이고,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과 빵을 잘라 나누어 먹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kFzR8l5_Gs
사실 60년대를 소개하면서 흑인 권력 운동(Black Power Movement)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0년대의 인권 운동은 흑인, 동양인, 남미인,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성소수자, 정신질환자 등 다양한 소수자의 목소리가 각지에서 터져 나오는 것을 통칭하는데요. 이렇듯 다양한 집단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정을 요구할 수 있게 된 시발점이 바로 흑인 권력 운동이었습니다.
한 번 더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1920년대에는 대이동(Great Migration)이라고 불리는 흑인의 대규모 이주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당시 노예제로 인해 200만 정도의 흑인 인구가 남부에 몰려 있었는데요. 이는 미국 전체 흑인 인구의 20퍼센트였습니다. 노예제 폐지와 함께 이들이 미국 전역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고, 주로 촌에서 도시로의 이주가 이루어졌죠. 특히 뉴욕의 할렘가에 큰 흑인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도시 흑인의 삶에 대한 꿈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긍정적 분위기에서 낙관적 성향의 예술이 꽃피었고, 이를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라고 부릅니다.
할렘 르네상스의 특징은 백인 예술가와 관객에게 사랑받았다는 점인데요. 흑인들이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표현함에 따라 백인은 여기에 자신들도 참여하고자 했습니다. 흑인 예술에 자신을 투영하기도 하고, 백인 정착민에게는 없는 문화적 깊이를 갈망했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흑인 중산층보다는 더 이질적이고 흥미로운 시골 소작농이나 도시의 하층 계급에 대한 집중적 관심으로 드러났습니다.
할렘 르네상스가 지녔던 아메리칸드림은 곧 찾아온 대공황으로 그 거품이 꺼지게 되었지만, 60년대에 흑인 예술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백인들이 참여하고 싶어 했을 정도로 낙관적이고 희망적이었던 20년대와는 달리 60년대의 흑인 예술 운동은 훨씬 공격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극작가이자 시인인 아미리 바라카(Amiri Baraka, 1934-2014)가 있는데, <더치맨(The Dutchman)>, <노예선(Slave Ship> 등 백인의 흑인 착취와 차별을 정면 비판하며 흑인 예술운동을 이끈 사람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faLDvvM7S4
흑인 예술 운동은 흑인 권력 운동의 일환이었는데요. 흑인 권력 운동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틴 루터 킹(1929-1968)과 말콤 엑스(1925-1965)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등장해 흑인 인권에 대한 인식을 혁신적으로 높인 대대적인 움직임을 일컫습니다.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암살되어 큰 충격을 불러오기도 했죠. 때문에 역사에 더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기도 합니다.
미국의 인구 통계나 이주 역사를 보면 이들이 가지는 다양성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더 식스티즈"는 이러한 의식이 상당히 최근에 생겨난 것이며, 의식 있는 인물들이 목숨을 내걸고 혈투를 벌이며 얻어낸 것임을 알려줍니다. 인권 문제에 관하여 치열하게 고민해 온 미국의 역사에서 배울 점이 많아 보입니다.
이렇듯 최전방에서 인권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싸워준 흑인 운동들 덕분에 그 흐름을 타고 다른 소수자 집단들도 하나둘씩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미처 다 손꼽을 수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운동이 있었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그중 하나였던 아시아계 미국인의 연극을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