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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May 10. 2022

가짜와 진짜는 어떻게 가려지는가

아시아계 미국인 연극 1 - 인종과 역사

“인종은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을 분류하고 구분 지을 때 종종 쓰이는 인종이라는 카테고리가 실은 선천적이 아닌 후천적 개념이라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국적이나 문화적 소속감과는 다른, 피부색으로 결정되는 “인종”이라는 개념은 정복과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인간의 외형과 유전자는 끊임없이 서로 섞이며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는데요. 이를 특정 시기에 특정 인물들을 분석하여 마치 그것이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의 틀을 만들어 규정해버린 것이 인종입니다. 두개골과 뇌의 크기를 분석하여 백인이 유색인종보다 과학적으로 우월하다고 증명하는 연구 등이 이에 속하죠. 인간을 최대한 빠르고 단순하게 파악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인 만큼 실제와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인종 문제는 생각보다 많이 복잡하여 이해하려면 시간을 많이 두고 공부해야 하는데요. 각 인종의 형성 과정이나 정치적 배경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흑인의 경우, 노예제 시절 한 방울 원칙(one-drop rule)이라고 하여 조상에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 즉 노예로 규정하였습니다. 노예의 수를 확보하여 안정적으로 노예제를 유지시키기 위함이었죠. 따라서 어떤 혼혈이든 흑인 조상이 있으면 흑인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지금까지도 강합니다. 혼혈인 오바마 대통령만 해도 그를 백인보다는 흑인으로 단번에 파악한 사람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한 방울 원칙"이 배출한 다양한 흑인 운동가들의 인종적 문제에 대해 분석하는 책 표지입니다.

(출처: https://www.tridentbookscafe.com/book/9780985351205)


혼혈일 경우 유색인종의 정체성을 부여한 흑인의 경우와는 반대로, 아메리카 원주민은 원주민을 제외한 다른 정체성, 즉 주로 백인/정착민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를 완전히 지우기 위함이었는데요. 원주민 여성이 미국인 남성과 결혼할 경우 해당 여성은 아메리카 원주민으로서의 권리와 지위를 모두 박탈당하였습니다. 원주민 부족이 대부분 모계 사회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여성의 족보를 끊어 부계 미국 사회에 편입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살에 이어 한 인종의 개념을 지워버리는 정책을 통해 물리적, 인식적 인종 말살 정책을 취하는 것입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의 형성


그렇다면 동양인의 경우는 어떨까요? 우리나라에서는 “한국계 미국인” 또는 국적을 특정하지 않는 "동양인"이라는 말을 더 자주 사용하지만, 미국에서 동양인을 일컬을 때 쓰는 말은 “아시아계 미국인(Asian American)”입니다. 아시아라는 커다란 대륙을 통칭하는 이름인 만큼 상당히 허술하고 애매한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아시아계 미국인”은 누구를 의미하는 걸까요?


다른 인종과 달리 아시아계 미국인은 정치적 힘을 가지기 위해 동양 이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카테고리입니다. 실은 사회적 운동의 산물이에요. 이주 시기도 상대적으로 늦고 서양에서 동양을 꾸준히 타자화했던 역사 때문에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미국 시민으로서 인정되거나 정당한 권리를 보장받기 어려웠습니다. 어떻게든 존재감을 부각하기 위해 포괄적인 인종 카테고리를 만들어 가시성을 획득하고 아시아 여러 나라 간 유대를 쌓으려고 한 것이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시아계 미국인”이 상징하는 모습은 무엇일까요? 대규모 이민은 항상 그에 상응하는 역사적 사건들로 인해 발생하죠. 첫 이민의 물결은 19세기 중반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로 중국인들이 몰려들면서 시작하고, 이어 대륙횡단철도 건설 작업에 중국인 노동자가 대거 동원되면서 2차 이민이 있게 됩니다. 이에 따라 취업난에 시달리던 백인 이민 노동자들의 반중 감정 또한 고조되죠. 1882년에는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라고 하는, 전무후무한 나라 특정 이민 금지법이 제정되기에 이릅니다.

중국인 배척 법안의 통과를 환호하며 파티를 알리는 포스터입니다. 중국인 배척을 민주주의의 승리 및 백인의 1위 확정으로 직접적으로 표현한 점이 놀랍습니다.

(출처: https://www.opendemocracy.net/en/were-not-all-same-boat/)


1885년의 록 스프링스 폭동(Rock Springs Riot)은 백인 이민 광부들이 중국인 이민 광부들을 혐오 학살한 사건인데요. 당시 팽배했던 반중 폭력을 대표하는 사건입니다. 실제로 중국인들이 백인의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도 용납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인데, 사실 중국인 노동자들은 백인 노동자의 입지를 줄이는 데에 직접적으로 일조하지도 않았습니다. 값싼 노동력을 찾는 미국 회사, 그리고 저렴한 인건비에 훌륭한 노동력을 제공했던 중국인 노동자의 상황이 맞아떨어진 거죠. 중국인 노동자들은 백인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착취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반중 폭력의 역사는 줄어드는 일자리에 대한 백인의 불안감이, 보호받지 못하는 인구에게로 분출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1886년의 세탁세제 광고입니다. 당시 중국인이 주로 세탁 사업을 했기 때문에, 좋은 세제를 쓰면 중국인을 몰아낼 수 있다고 어필합니다. 백인은 세탁사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hinese_Exclusion_Act)


반중 감정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1924년, 이민법(Immigration Act)이라고 하여 국적에 따른 이민 가능자 수를 제한하는 법이 또다시 만들어집니다. 특히 동양인의 이민을 규제하려고 한 이 법은 반 세기가 지나 1965년에 이르러서야 철회됩니다. 60년대의 인권 운동의 흐름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렇듯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는 주로 동아시아 노동자가 "아시아계 미국인"을 이루었는데요. 20세기 중반부터는 동남아시아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1975년 베트남 전쟁 난민이 미국에 도착한 것이 큰 사건이었고요. 현재 "아시아계 미국인"이라고 하면 개념적으로는 동아시아인을 가리키지만, 실제 인구는 동남아시아가 더 많은 상황입니다.


"아시아계 미국인"이라는 정치적 카테고리가 적극적으로 도입된 계기가 된 사건을 하나 알아보겠습니다. 1982년 디트로이트에서 발생한 빈센트 친(Vicent Chin) 사건인데요. 일본 차 산업이 미국 자동차 시장을 장악할 정도로 성장하자 백인 자동차 회사 노동자들이 불만을 가지게 됩니다. 회사에서 해고당한 두 백인 노동자는 술집에서 총각파티를 하던 중국계 미국인인 빈센트 친을 일본인으로 단정하고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벌금형을 받고 풀려나고, 이 사건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큰 분노를 사게 됩니다. 이는 이상적 소수자, 즉 모델 마이너리티(model minority)로서, 조용히 미국에서 요구하는 바에 순응하고 맞춰가는 모습으로 비치던 동양인이 본격적으로 정치적 움직임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빈센트 친의 가해자들은 아직도 벌금을 다 내지 않고 참작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또한 술에 의한 우발적 범행이었다며 인종혐오 범죄임을 부정하는 상황입니다.


















(출처: https://www.michiganradio.org/news/2021-06-23/atlanta-killings-revive-memory-of-vincent-chin-and-another-time-of-anti-asian-sentiment)




East West Players


한편 연극계에서도 이러한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백인 극작가들은 아시아계 미국인을 열등한 스테레오 타입으로만 표현했습니다. 순종적 하인, 신비로운 현자, 가냘픈 여성, "드래곤 레이디"라고 표현되는 악랄한 요부 등이 이에 속하죠. 이러한 관습에 반발하고 스스로의 연극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6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1965년 East West Players(이하 EWP), 직역하자면 동서 연희패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인 극단이 LA에 설립됩니다. 이 극단은 아시아계 미국인의 경험과 통찰을 공유하는 여러 작품과 극작가를 지원하고, 미국 무대에서 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에게 연기 훈련과 다양한 배역을 제공하는 중요한 일을 하였습니다. EWP의 행보에 힘입어 미국 전역에 아시아계 미국인 극단이 설립되기도 했죠. 지금도 EWP는 뉴욕으로 거점을 옮겨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EWP 로고입니다. 벌써 5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s://eastwestplayers.org/east-west-players-continues-its-50th-anniversary-season-golden/#)


우리나라의 예시를 볼까요? 슈퍼스타 K로 스타 반열에 오른 가수 김예림이 2019년 "림 킴(Lim Kim)"으로 새롭게 활동을 시작하며 발매한 곡 "옐로우(YELLOW)"의 뮤직비디오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5S3sPpkd8w

영상에서 림 킴은 서로 다른 나라들의 문화적 요소들을 정교한 컨설팅 없이 마구잡이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서양인은 이를 다 같은 "동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하죠. 강렬한 색채와 정신없는 빛, 날카로운 목소리 등에서 느껴지듯 "옐로우"는 동양에 대한 고정관념적 이미지들을 일부러 과도하게 사용하여 그 부조리함과 그로테스크함을 드러냅니다. 영상에서 "동양성"은 하나의 연극입니다.




"인종은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말이 아시아계 미국인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과연 "인종"이라는 개념에 진실과 거짓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처음부터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고, 다양한 착취적 또는 혐오적 용도로 사용되어 온 개념입니다. 이에 맞선다고 "진정한 인종"의 개념을 도입하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이죠.


진실에 대한 왈가왈부보다는 이 개념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 이해하고, 하나의 연극과도 같은 이 인종이 공연을 통해 어떻게 재구성되고 해체될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초기 아시아계 미국인의 연극은 인종의 허구성과 인위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곤 하는데요. 다음 시간에는 이러한 시도를 대표하는 연극 M. 버터플라이(M. Butterfly) 속으로 들어가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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