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막 보기 시작한 영화를 한숨 쉬며 견디다 10분 만에 꺼버리는 저를 보며 룸메이트가 “대체 넌 좋아하는 영화가 뭐니?”라고 물어봤습니다. 그 질문이 무언가 제 상황과 맞지 않다고 느낀 저는 더듬더듬 떠오르는 생각 아무거나 이야기했고, 돌아오는 코멘트는 “넌 참 취향이 확고하구나” 였습니다. 두 코멘트에 담긴 “좋아하는 영화,” “취향”이라는 표현이 왜 불편한지 깨달은 건 조금 지나서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저는 종종 영화나 공연 감상이 제게 쉬는 시간이 아니며, 영화나 공연을 봐야 한다는 것이 스트레스를 준다는 사실을 여러 번 설명했지만, 아직도 이들에게 있어 영화는 취향의 영역 내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질문의 요지를 파악했더라면, 저는 연구적 가치가 떨어지는 컨텐츠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이번 포스트에는 대중에게는커녕 학계에도 잘 알려지지 않아 오해와 차별의 온산이 되는 “공연예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소개해보려 합니다.
룸메이트의 질문이 딱히 놀라웠던 것은 아닙니다. 박사생들 사이에서도 제가 공연예술을 공부한다고 하면 “재밌겠다”며 부러워하는 반응이 일곤 하거든요. 이공계와 인문학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이공계 친구들의 반응까지는 그러려니 하더라도,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같은 반응을 보일 때면 상당히 힘이 빠지곤 합니다.
공연예술학이 속한 인문학이라는 커다란 학문적 영역 자체도 이미 큰 오해와 차별의 대상입니다. 쉽게 전문성을 인정받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기대할 수 있는 이공계에 비해 인문학의 전문성은 개인이 적극적으로 증명을 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단순한 예로 우리는 의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고 그 권위를 인정하지만, 인문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단순해 보이는 한 생각 뒤에 오랜 시간 쌓아 올린 다양한 역사, 문화, 정치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화자가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증명하기 이전에는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현재 내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입밖으로 내뱉는 나의 생각이 실은 수많은 담론과 사조의 영향이라는 사실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고요. 여러 세기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일평생을 바친 ‘지식’에 대한 연구가 마치 누구나 쉽게 취할 수 있다고 인식되어 그 가치가 폄하되는 것이 인문학이 처한 현실입니다.
이 인문학 내에서도 더욱이 학문적 가치를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바로 공연예술학입니다. 공연예술학의 역사를 생각하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20세기 중반에서야 등장한 신생 학문이라 한국에는 학과가 존재하지도 않고, 미국에서도 예산 부족으로 학과들이 운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거든요. 주로 극소수의 학생만 뽑아 운영하는데 (저희 학과의 경우 매년 한 명이나 두 명의 학생을 뽑습니다), 그 마저도 불안정하여 불과 몇 년 전까지 이름을 떨치던 학과들이 제가 유학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문을 닫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공연예술학’은 대체 무얼 연구하는 학과일까요? 주로 받는 질문들은 박사과정 연구를 어떻게 진행하는지, 논문의 형식이 연기나 연출과 같은 실기로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실 실기 위주의 학문에는 박사과정이 없고, MFA라는 Master of “Fine” Arts, 즉 실기 석사 과정을 통해 고등 학위를 부여받습니다.
공연예술학은 철학과 인류학이 결합하여 탄생한 것으로, 다른 인문학과 마찬가지로 읽고 쓰는 것이 주가 되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실기적 경험, 지식, 능력이 더불어 요구됩니다. 연구 소재는 공연과 종합예술 전반에 대한 것인데, 철학과 인류학의 뿌리에서 유추할 수 있듯 현상적인 부분 이면에서 예술이 어떻게 사회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으면서 삶의 방식과 인식을 형성하기도 하고 반대로 이미 형성된 것에 반응하기도 하는지를 분석합니다.
조금 단순한 비유를 사용해보자면, 현대 사회에 만연한 다양한 컨텐츠를 식품으로 보고 개인과 사회를 신체로 보았을 때, 우리가 이 식품을 어떻게 가공하고 섭취할 것인지, 또는 이미 섭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학문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대부분의 공연예술이 초가공의 영역에 있고, 상업예술은 한술 더 떠 초초가공된 식품이라는 점입니다. 인문학이 주로 분석하는 글이라는 매체는 일차 가공된 것으로, 독자는 자신의 속도와 방식을 고려하여 같은 내용을 몇 번씩 다시 읽고 쉬어 가기도 하면서 다소 거친 재료를 천천히 소화시킵니다. 반면 공연예술은 더 다양하고 많은 재료를 모아, 적당한 자극까지 첨가하여, 섭취자가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받아들이고 소화과정으로 넘어가게 합니다. 이때 상업예술은 섭취자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자극을 최대화하여 섭취과정의 효율성을 최대화하죠. 이러한 특성 때문에 글은 여러 번 볼수록 이해도가 높아지지만, 상업예술을 여러 번 접한다고 해서 그에 대한 분석력이 발달하지는 않습니다.
단순화된 비유를 하나 더 들어보자면, 이공계가 1+1=2의 영역을 분석한다면, 인문학은 1+1=???인 영역을, 공연예술학은 1+???=@#$%&의 영역을 분석하는 것과 같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음식으로 봤을 때 초가공식품은 군것질과 인스턴트 식품과 같이 그 재료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지만 노력 대비 편의성이 뛰어난 상품들을 일컫습니다. 하지만 군것질과 인스턴트 식품이야말로 그 성분과 위해성을 이해하고 소비자가 절제와 소비 기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죠. 하루가 다르게 미디어의 지배력이 커지는 사회에서, 그리고 OTT 서비스의 등장과 함께 더더욱 개인의 삶 속 깊이 침투한 미디어의 팽배 속에서, 미디어의 가공성에 대한 인지가 부재에 가깝다는 사실은 분명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공연예술의 물리적 접근성이 높아질수록 공연예술학에 대한 필요성이나 권위에 대한 저항성 또한 커집니다. ‘쉼’이라는 목적으로 접근하는 매체에 복잡성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저항과, 개인이 주체가 됨으로써 얻게 되는 소비의 만족감을 저해하는 것에 대한 저항입니다. 특히나 ‘과몰입’ 방식이 컨텐츠 소비의 주류인 한국의 경우 예술학자가 컨텐츠에 대해 더 다양하고 깊은 층위의 접근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공연예술학의 여러 가지 특성은 이러한 저항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여 학문과 실생활의 괴리를 벌리고 있는데요. 그 특성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선 공연예술학은 ‘학제융합’적(interdisciplinary) 특성 때문에 정체성을 정확히 세우지 못합니다. 마치 아메바처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과도한 융통성을 가집니다. 제 연구의 경우, 무속신앙, 장르 불문의 현대무용, 시위, 취식행위와 같이 넓은 소재의 공연적 영역을 검토하며, 심리학, 민족학, 사회학, 젠더학과 같은 다양한 다른 학문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왜 공연예술학은 꼭 학제융합적이어야 할까요?
애초에 학문이나 대학이라는 개념이 서양에서 출범하여 서양에서 쌓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무슨 과목이든 서양 학위가 더 크게 인정받곤 합니다. 그런데 서양이 만들고 발달시켜 온 학문이 제국주의적, 가부장적, 식민주의적 담론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 유럽에서는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는 60년대 이후로 대두되며 문제시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지금의 학문적 트렌드는 수 세기동안 쌓아 올린 지식의 전제를 깨부수고 전복하는 대체적 사고를 키우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쉽지 않은 일이지요.
이 시기를 틈타 공연예술학이 큰 가능성을 보이며 급부상합니다. 공연이 글과 사고에 기반한 학문의 전제를 뒤집는, 신체와 감각에 기반한 지식의 영역을 탐구하기 때문입니다. 시작부터 공연예술은 오랜 기간 서양이 미신이라고 묵살했던 다양한 문화권의 제의(ritual)를 진지하게 재검토할 것을 촉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에너지들을 실질적 지식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었죠.
제국주의적, 가부장적, 식민주의적 담론의 특성이 중심 사고를 배출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형태의 지식은 중심과 주변의 위계를 없애고 수평적 사고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때 음향, 시각, 대본, 동선, 관객 등등 여러 요소가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야말로 적합한 미래의 학문적 모델이 됩니다. 그러나 수평적 사고 속에서는 정확히 정체성을 세우기 어렵고, 그만큼 다양한 지식이 잘 검토되어야 의미 있는 분석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 공연예술학 자체로서 단단히 서기 어렵게 만듭니다. 미래적 모델인 만큼, 현실의 벽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고발하는 것이 공연예술학입니다.
실제로 다양한 인문학적 영역에서 공연예술학에 대한 공부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당 학문의 영역을 넓히는 혁신적인 시도라는 표어를 내걸고 무책임하게 예술을 분석하는 현상이 최근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를 학제융합적 연구라고 소개하고 그에 따라 공연예술학에 대한 책임감있는 공부가 수반되어야 하지만, 예술에 대한 소비자로서의 일차원적 반응이 새로운 시도라고 발표되는 경우가 잦습니다. 현재 학문적 트렌드가 예술적 접근을 요구한다는 점과, 공연예술학의 존재감이 약하다는 현실을 동시에 보여주는 예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연예술학의 입지를 흔드는 두 번째 특성은 예술가와 학자 사이의 간극입니다. 사회에 대한 흔들림 없는 명확한 비전을 카리스마있게 제시하는 예술가와,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학자가 각각 추구하는 가치는, 같은 목표를 가질지언정 너무나 상반된 것입니다. 단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에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서로에 대한 불신은 공연예술학의 성과에 대해 끊임없는 의심을 제기합니다. 학자들 내에서도 예술가의 배경을 가진 인물들과 이론가의 특성을 가진 인물들 사이의 긴장감이 뚜렷이 존재합니다. 자기반성은 미래를 위해서는 좋은 기반이 될 것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그럴듯하게 어필하기에는 전략적이지 못하죠.
마지막이자 가장 치명적인 공연예술학의 문제는 자가당착입니다. 아무래도 서양을 오래 지배해 온 사고의 붕괴에 가장 크게 영향받는 주체들이 백인 남성이라는 점, 그리고 서양 사회에서 예술은 특권계층에게 더 접근성이 높아왔다는 점에서 공연예술학은 매우 백인 남성적 학문입니다. 다양성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출범했지만 그 다양성이 진정 무엇인지 아직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줍니다.
다행히도 학제융합적 특성으로 인해 백인 남성의 관점이 주류를 이루지 못하고 유색인 여성들이 의미 있는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데요. 아무래도 학부와 대학원 사이의 괴리가 정말 큽니다. 연극영화과에 오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브로드웨이 등 백인 남성의 세계관을 재생산하는 상업공연에 매료되어 오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점과 한계를 교육하여 후학을 양성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문제점’이라고 제시한 부분들이지만 사실 공연예술학은 진정 틀 밖에서 생각하는 미래적 학문이고, 학자적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기존 학문의 방식에 환멸을 느끼는 많은 이들을 불러모으는, 그런 잠재력을 가진 매력적인 학문입니다.
언젠가 더는 싸워 쟁취하지 않아도 공연예술학자로서 전문성이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꿈꿔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수많은 한국인 공연예술학자들이 의미 있는 행적을 만들어내고 있고, 한국에 돌아와 지식을 나누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문화컨텐츠에 대한 적극적 수요과 공급만큼 소재에 대한 이해 또한 높은 한국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