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미국과 대학 캠퍼스
좀 전에 UC 어바인 캠퍼스의 가자지구 연대 시위 현장에 다녀왔다. 여기서는 Encampment라고 부른다. 학생들이 교내에 텐트를 치고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내가 아는 배우 친구들 위주로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정치 쪽으로는 까막눈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매일이 과로로 점철된 취준 중에는 도무지 팔로업할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상황은 더 심각해지고 운동은 점점 더 커졌다. 처음에는 이게 다 무슨 소용일까 싶었던 나도 60년대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벌였던 미국 캠퍼스의 역사가 이번에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심각한 과로의 나날도 끝이 보이던 무렵 상황이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4월 말, 콜롬비아 대학과 뉴욕대를 비롯한 메이저 뉴욕 캠퍼스에서 경찰의 시위대 무력 진압과 백 명이 넘는 학생들 체포가 진행됨과 동시에 근처 엘에이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USC와 UCLA 위주로 시위와 진압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USC에서는 어바인 및 오렌지 카운티에서 온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USC 학생이 아니면 캠퍼스에 들어올 수 없도록 통제를 시작했다. 사유지라는 이유로 텐트도 전부 강제 철거했다고 했다. UCLA는 수업을 온라인으로 돌렸다고 들었다.
그리고 우리 학교에도 encampment가 생겼다. USC 캠퍼스에서 진을 친 학생들이 어바인과 오렌지 카운티 출신이라고 들었을 때 나는 너무 이해가 갔다. 이곳은 밖의 세상과 완전히 동떨어져, 유유자적하고 고요한 버블(그들만의 세상)을 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시대적 상황에도 도무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조용함이다. 마치 LA 폭동이 일어났을 때 문을 걸어 잠그고 모른척하며 모든 게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던 할리우드의 세상 같다.
Encampment가 생기자 학교는 패닉하기 시작했다. 하루 간격으로 '학교는 다 잘하고 있다'라는 일방적인 메세지와 정당화를 담은 장문의 메일을 보내는가 하면, 학교 규정을 들먹이면서 공포심을 조성했다. 지난해 UC 전체 대학원생 파업을 진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 학교, 즉 UC 어바인은 의도적으로 시위를 어렵게 만들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인권운동과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에 지어진 터라, 학교의 중심 공간이 없게, 가운데의 공원을 둘러싸고 모든 건물이 동그랗게 분산된 구조로 지어졌고, 가장 급진적 색채가 강한 예술대학은 한층 더 멀리 따로 떨어트려 놓았다. 우리 학교는 여느 학교 캠퍼스와 분위기가 전혀 다른, 대학이라기보단 회사에 가까운 모습이다. 공간이 문화를 형성하다고 믿는 내게 UC 어바인은 공동체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고 그래서 유학생으로서 학교에 정을 붙이기 어려웠다. 작년 대대적인 대학원생 파업 시위도 소고를 들고나가 열심히 참여했지만 허무하리만치 힘없게 시작해서 처참하게 끝났다. (여기에는 심각한 노조 리더십 문제도 있지만 일단 그 얘기는 안 하고 지나가기로 한다.)
그래서 큰 기대 없이 그냥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오늘 저녁 룸메이트와 encampment 쪽으로 걸어가 보았는데, 예상치 못한 감동을 받았다. 생각보다 규모가 정말 컸고, 동그랗게 친 울타리를 따라 정말 많은 연대의 메세지를 담은 글귀와 그림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전공생이라 그런지 시위 때마다 그 그림들의 예술성에 감탄하게 된다. 팽목항을 지키는 수많은 그림 타일도 생각났다. 큰 규모만큼 안에도 한 동네를 이룰 만큼 많은 텐트가 쳐져 있었고 정말 늦은 시간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비상 연락처와 구금시 필요한 사항들, 그리고 무력 충돌 발생 시 언제 빠질지(초록, 노랑, 빨강으로 정해서 각자 얼마나 최전방에 있을지 선택한다) 등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 정보를 적어 제출해야 했다. 무의식 중에 서로의 연락처를 적던 룸메이트와 나는 앗 잠깐, 무슨 일 생기면 우리한테 같이 생길 텐데? 하고 멈칫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조용한 분위기여서 그냥 그대로 적어냈다.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건 그 늦은 시간에 한참을 연설하고 있었던, 지금 내가 조교로 일하고 있는 수업의 교수님이었다. 영화학과 교수님들이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단 건 알았지만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인데, 나보다 훨씬 바쁠 텐데, 그리고 지금 어떤 수업을 얼마나 하고 계신지 아는데. 그런데도 그 늦은 시간에 그곳에 앉아 정말 필요한 이야기들을 해주고 계셨다. 흑인 여성으로서 팔레스타인 시위를 참여한다는 점에서 오는,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 시위가 끝난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라는 것, 각자의 시위를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나갈 수 있단 것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대학이란 배우고 실천하는 곳이라는 것, 생각하고 토론하기 위한 곳이라는 것,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교수들이 있고 교직원들이 있단 것, 학생들은 그런 대학의 어른들에게 기댈 수 있단 것, 우리들이 있어주겠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오로지 쓰고 버리는 대상으로 학생을 여기고 그 학생이 조금이라도 도움을 요청하려 하면 도망가고 진압하기 바쁜 우리 학과와 너무 비교되어 마음이 울렸다.
그리고 교수님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하나 보여주셨다. 다소 영혼 없는 지금의 수업 내용과 대비되는 정말 생생하고 살아있는 영화였다. 연대를 이야기하고 현실을 이야기하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영화학과 신임 교수님들이 보는 영화를 같이 보다 보면 영화에 관심 없던 나도 절로 눈이 트이고 영화를 사랑하게 된다. Encampment 안에서 그 영화는 드디어 제 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더 블랙 파워 믹스테이프 1967-1975>(2011)라는 작품이었다.
처음엔 나도 국제정세를 잘 모르기도 하고 이 시위를 어떤 목적으로 언제까지 하고자 하는 걸까란 의문을 가졌다. 하지만 교수님의 연설을 들으면서, 그렇구나, 시위가 꼭 결과일 필요는 없구나, 과정이면 되는 거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답이 없는 문제, 즉 너무나 오랜 시간 꼬일 대로 꼬여버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미국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텐트를 치고 시위를 해봤자 무슨 효용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베트남전 때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세상의 전쟁들이 결국은 미국의 군국주의에서 나오고, 분명히 미국의 책임과 역할이 있음을 조금이라도 더 인지하고 그에 대해 뭐라도 해보려는 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움직임인 것 같다. 그 시도들은 아주 철저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적극적으로 공격받고 무력화되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건국 자체가 대량 학살과 노예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그 질서에 의해 유지되어 왔기에, 이를 전복시킨다는 건 어차피 끝이 없고 패배가 예견된 싸움인 것이다. 종종 그런 미국의 제국주의적 감옥 안에서 상대적으로 내가 여유 있을 수 있는 건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미국 건국에 가장 참혹하게 이용되고도 아직까지 자유롭지 못한 흑인, 특히 흑인 여성의 외침이, 미국 역사에서 늘 그래왔듯 또다시 시위를 이끌고 동력이 되고 방향성을 제시해주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시위는 현재진행형이다. 매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 가장 앞장서야할 것만 같은 예술대는 예산 문제와 뿌리깊은 권위주의로 역시나 잠잠하다. 기댈 곳은 이번에도 아시안 아메리칸학과, 어쩌면 비교문학과일까. 그리고 역사학과, 영문학과, 영화학과의 일부 교수님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나도 코앞으로 다가온 논문 디펜스를 준비하면서 어디까지 참여할지 아직 모르겠지만 상황이 어떻게 변하는지 계속 지켜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