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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박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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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Jul 31. 2024

7월 30일 의식의 흐름 끄적임

오늘 아침, 이미 계약서를 작성하던 강사 자리를 거절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비자 문제, 돈 문제, 경력 문제에 모두 도움이 될 자리였기 때문에, 고심 끝에 결정한 사안임에도 찝찝함을 지울 수 없었다. 약속을 철회하기로 한 결정적 이유에는 내게 그동안 현실감각이 부족했던 점이 있었다. 대학원생으로 일하며 받던 임금에 익숙한 상황에서, 그리고 그 임금이 이미 넉넉지 않았던 상황에서, 박사 학위를 가지고 더 많이 일하며 받는 임금이 설마 하니 그 반도 안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사실 가까운 학교였으면 그것도 감수하고 일하고 싶은 자리였지만, 신체 건강을 최우선으로 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에서 왕복 4시간에 달하는 통근을, 교통비도 안 나오는 월급을 받아가며 취준과 병행하는 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이 결정이 가능했던 건 졸업한 학교와 진행하고 있는 다른 강사 계약이 있기 때문이었다. 전날 면접을 보면서 생각보다 더 수업 환경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전에 너무 박하다고 생각했던 임금도 사실은 업계 평균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는 오히려 이 자리를 맡을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른 학교의 임금 수준을 알게 되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났다. 복에 겨운 철없는 고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안일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땅 파서 돈 나오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현실의 각박함이 피부로 치고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그러면서 학과에 대한 다른 시선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학과에 대해 응어리져 가슴에 얹힌 상처와 불신이 있었기에 그 감정이 이렇게 금방 바뀔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학과는 나를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어떻게든 도와주려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졸업하기 전에도 머리로는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졸업 직후 학교에 대한 관점이나 경험이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것을 요즘 경험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줄어들고 권력관계가 바뀌니, 스위치를 끈 것처럼 즉각적으로 많은 일에 감정적으로 너그러워지게 되었다. 


그동안 학과에 대한 악담을 하고 다녔던 것이 떠오르면서 내 말을 주워 담고 싶어졌다. 주변에 희생양 행세를 하며 도움과 동조를 구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질문들이 생겼다. 나는 다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그리고 내가 경험한 것들은 정말 나의 철없는 좁은 시야에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그 답은,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리고 추측 이상의 실질적 문제가 많았다, 였다. 왜일까 생각해 보면, 그게 나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감정과 생각에 확신이 생기기까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고 이해해 보는 시간을 들인 후, 어떠한 확신이나 명확함이 생겼을 때 그것을 표현하고 행동에 옮기는 편이다. 이 때는 오히려 행동하고 표현하지 않으면 병날 정도의 어떠한 강한 확신이 나를 움직인다. 그래서 내게 존재하는 과거는, 지나간 뒤 떠올렸을 때 부끄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그때의 내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걸 알아주기로 했다. 


과거를 돌이켜 봤을 때, 나는 학과에 이미 하고 많은 소통과 이해의 시도를 한 후 가망이 없다고 느끼며 좌절하고 분노하는 과정이 있었다. 당시에도 내가 겪는 이야기들을 아무 곳에나 털어놓을 수 없다고 느꼈고, 털어놓고 동조받고 나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 자료가 너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짧은 시간 안에 내가 전달하고 싶은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표현이 강하고 압축적이고 과장되게 나왔다. 그게 가장 내게 솔직한 표현이었다. 사실관계만 나열해서는 지나치게 구구절절해지다가 정작 중요한 부분은 전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정황증거만 가득한 것이다. 학과와 직접적으로 충돌할 당시에도 늘 머릿속 한편에는 우리가 법정에 선다면 모든 문제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내가 꼭 불리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상대측에서 얼마나 억울해하며 뭐라고 구체적으로 변명할지도 선명히 예상되었다. 


여기에는 임원직을 이미 여럿 맡고 있어서 증거를 남기지 않고 소통하는 방식에 능통한 학과의 리더십 문제도 있었다. 사실 미국에 있다 보면 이곳 행정절차의 많은 부분이 법정 증거로의 효력을 의식하여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곳에서 지내면 지낼수록 고소 문화의 만연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행정이 느리다고 욕먹는 데에는 불리한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핵심을 빼고 빙빙 돌려 일을 처리하는 - 또는 과도하게 모든 절차에서 서명 등 증빙을 요구하는 - 습관이 담겨있지 않나 싶다. 결론적으로 여느 일적인 관계에는 번지르르한 말들 뒤로 뿌리 깊은 불신이 팽배한 사회가 있다. 진심과 거짓이 적절히 섞인 좋은 말들 이후 막상 중요한 사안에서 은근슬쩍 뒤통수를 맞는 경험을 자꾸 하다 보니 그 말들에 섞인 진심마저 굳이 찾아 듣지 않게 됐다. 선명한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이상 자기 방어에 급급한 상관들과 굳이 소통의 시도를 하는 것은 오히려 내 약점만 늘리는 시간낭비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학과 임원들의 불만은 늘 "왜 말을 안 해"이다. 여기에 달린 부제는 "그래야 우리가 어떻게든 도와주지"가 아니라 "그래야 왜 네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내가 아니라 네 문제인지 일깨워줄 수 있지"였다. 




트라우마 연구의 출발 지점은 '폭력과 상처의 경험은 표현하는 것에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이다. 고통에 있어서는 논리나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존자들의 표현에 다소 비현실적이거나 과장된 부분이 담겨있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것들이 있는 그대로 표현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치유를 향한 첫 발걸음이 된다. 법정과 같이 상처의 존재를 여러 가지로 디테일하게 증명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생존자들에게는 2차 가해가 되곤 한다. 정신적인 부분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장애와 죽음 등 몸에 남은 흔적을 넘어선 대부분의 영역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 감도 안 오는 것이다. 바로 그 실체 없음의 문제 때문에 생존자는 이미 스스로의 경험에 의심을 안고, 결국 다 나약하고 바보 같은 내 문제라는 생각에 반복해서 자신을 상처 주는 고리에 갇힌다. 그만큼 논리적인 사실관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 적은 것에 비해 그 (사실관계의) 효용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환경은 생존자의 침묵으로 이어지곤 한다. 표현을 하면 할수록 불리한 증거로 작용할 것을 이들은 바로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공식 석상에서 그 아픔들이 자신의 착각, 환영, 상상의 영역이었다는 판결이라도 난다면 그게 생존자의 삶에 가져오는 여파는 이루 말할 수 없게 된다. 


상처는, 트라우마는, 일단 생긴 이상 말끔하게 치유되지 않는다.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뿐이다. 상처를 양분으로 삼아 더 강해지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가장 필요한 것이 가해자에 대한 처분이 아니다. 상처는 이미 내면에 남았는데, 외부를 조절한다고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다. 어차피 가해자는 그 업보를 안고 살게 되어 있다. 스스로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가해 행위 자체에서 이미 자신의 내면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엔 늘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모두가 자기 고통을 끌어안고 해결되지 않아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외부로 요인을 돌리고 책임을 지워 고통을 전가해 보지만, 그럴수록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자기 안의 상처만 늘어난다.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못 배우기 때문이다. 


상처와 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너무 어려운 일이다.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또 모두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어떤 친구는 어른이 되는 것 자체가 상처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다 같이 상처를 겪었음을 알아차리고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어야 조금씩 치유의 순간들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믿는다. 즉 아픔의 경험에서 나아가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진솔하게 표현하고 들어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연구하면서 위안부 문제, 제주 4.3 사건 등 전쟁범죄에 대해 많이 접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세계가 전쟁과 산업으로 하나로 얽히게 되면서 등장한, '근대 나라'로서 한국은, 그 정체성, 민족성, 공동체성을 반일 정서에 기반해 쌓아 올렸다. 이는 진상규명위원회, 국제법정, 일본 정부의 사과 요구 등을 통해 한을 푸려는 나라 전체적인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지금도 열심히 자료화되고 있는 생존자 증언을 들어보면 제발 누가 들어줬으면, 제발 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뚫고 나온다. 특히 성범죄와 관련해서는 구조화된 수치심과 검열로 어디에도 피해 사실을 믿고 털어놓을 수 없는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더 그 억눌린 외침들이 터지듯 나옴을 본다. 공식 석상에서의 '인정'은 그만큼 생존자의 경험을 유효화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멈출 수 있게 해 준다는 실질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공식 사과를 했다. 금전적 보상도 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 기억할 것이다. 과연 그 기다리던 사과가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해결해 주었는가? 당시 많이 얼떨떨하고 이게 아닌데라고 수군거리던 사회 분위기가 기억난다. 여기엔 더 복잡한 정치적 문맥도 있지만 그 본질은 사과가 이미 난 상처를 치유해주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허스토리>와 같은 영화에서는 결국 법정 공방과 판결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생긴,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고 보듬어주고 들어주는 공동체의 생성을 통해 의미를 지님을 보여준다. 




내가 학과와의 갈등 때문에 가장 힘들었을 때, 나를 구원했던 건 내 말 한마디에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믿어준, 내가 존경하고 의지하는 멘토들의 존재였다. 나보다 더 학교 입장을 잘 알고 대변해 줄 수 있는, 같은 교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내 한마디에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그래서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니?"라고 물어봐주고, 어렵게 부탁한 몇 가지 사항들을 너무 작은 도움이라고 안타까워해주는 모습들이, 나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힘이 되었다. 이 분들은 이미 상대방의 말과 내 말이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걸 따지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내 상황을 더 나아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란 걸 잘 아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니 그저 서로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공동체를 만들면 되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권력과 이해관계의 존재가 아주 중요한 고려사항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의 방어기제가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임을 본다. 가장 쉽고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본능적이라고 할 정도로 금방 발동되는 이 방어기제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압도적으로 많이 허용된다.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려 하는 건 결국 그만큼 타인에게 더 빨리 전가하고 스스로 편해짐을 누리기 위함이 아닐까. 반대로 권력이 없을수록 그 전가된 고통을 짊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더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을 가지면 또 그 구조를 재생산하고... 그게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싶었다. 구조 안에 있으니 '누구나 그런 거 아니야?'라는 공범의식으로 의심의 순간들에서 벗어나고 그 구조에 기여하는 자신의 책임을 외면하는 것. 그리고 권력자로서의 습관이 오래될수록, 자신이 가진 권력에 대한 인지가 떨어지면서, 타인에게 전가가 잘 이루어지는 그 상황이 실제로 자신이 옳고 상대방이 틀려서라는 세계관이 굳어지는 것을 본다. 결국 법정에 가면 권력을 가진 피고인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다 좋은 의도였는데 나쁘게 받아들이니 당황스럽다, 억울하다'라는 입장을 표출한다. 


책임은 늘 존재하고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권력이 주어지는 이유는 그만큼 딸려오는 책임과 고독이 있어서이기 때문에 권력자의 책임 전가는 크게 문제시되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본다. 이번 학과와의 관계에서 한 번 더 느낀 거지만 생명줄, 밥줄, 커리어줄 등이 타인의 손에 붙잡힌, 그런 권력과 이해관계가 당장 작용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해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다. 구조 자체가 숨이 막히기 때문에 그것을 느끼게 하는 디테일 하나하나가 상처로 작용한다. 상사를 인간으로서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그가 그 구조를 편의에 따라 망설임 없이 이용할 때면 내가 그를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는 수용력이 점점 사그라든다. 가능한 만큼 문제를 제기하고, 최대한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빠져나올 수 없다면 숨 쉴 구멍을 많이 마련해야 하는데 내 세계관 속에서 그건 예술과 공동체다. 한편 어떤 사람들에겐 그 구멍이 '편들어주기'인 것을 본다. 다시 한번 내가 옳고 타인이 틀렸다는 구조 속에서 편안함과 치유를 찾는 기제다. 


그 기제가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결국 인간은 그렇게 서로 상처받고 상처 주는 존재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으니 그냥 그때그때 서로 표출하고 해소하고 굳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아도 적당히 괜찮게 느끼며 살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흥미롭게 여기는 부분은 대체 모두들 무엇이 그렇게 상처가 되는가, 사람들은 무엇을 그렇게 방어하는가, 무엇을 못 견디고 무엇을 피해 다니는 것인가 이다. 그리고 난 거기에서 희망을 본다. 




나는 아직도 나를 잘 모르겠다. 그간 본 수많은 성격 테스트와 주변인의 코멘트를 종합해 보면 나는 냉정한 낭만주의자, 현실적인 이상주의자, 보이는 모습에 다소 오해의 소지가 많은 사람이다. 이성도 감성도 현실도 이상도 다 강해서 극단적인 성향이 있고, 그 모순들을 끌어안고 버둥거리다 체력이 쭉쭉 소모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 보내는 사람이다. 


그중 유독 나와 주변인을 지치게 하는 건 자기 학대에 가까운 자기비판이었다. 나는 가만히 있어도 주변사람에게 공격이 되는구나-라고 느낀 적이 많은데 그게 대체 뭘까 고민하다가 흔히 완벽주의, 승부욕, 인정욕이라고 해석하는, 내 문제점을 고치려는 어떠한 집착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게 터무니없고 의미 없는 집착임을 깨닫고도 조절이 잘 안 되어서 보니, 이게 머리론 어떻게 안 되는 내 신체 반응임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부족함과 실수와 어리석음을 깨달았을 때 몸 안의 장기가 뒤틀리듯 반응하는 것, 배가 단단히 꼬이고 뒤틀린 느낌을 해소하기 전까지 너무 불편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 내가 존경하는 성숙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도 실수할 수 있는 인간임을 어느 정도 잘 받아들이고 사는 것 같기에, 조금의 부족함에도 호들갑을 떠는 나는 스스로에게 터무니없이 큰 기대를 거는 재수 없는 인간이라 또 혀를 찬다. 내가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별 난리를 다 피네. 


최근에서야 그런 나의 모습을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주려고 하자, 그게 내가 가진 이상주의적인 면, 즉 선에 대한 강력한 의지에서 나오는 거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양심이었다. 완벽한 선이란 게 없는 걸 아는데도 계속 추구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상처받는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다. 하지만 이미 이상주의자인데 어떻게 하나. 바꿀 수 없다면 내 자산으로 받아들여주기로 했다. 그래도 어떤 사람들은 내 그런 부분을 통해 희망을 충전해 가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누구에게나 가혹하게 느껴질 수 있는 기준들이 주변의 화를 부를 만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받는 어떤 상처들, 즉 상처 주려는 의도가 없었어도 즉각 건드려지는, 당장 전가하여 해소하려는 불편감이, 바로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에 대한 추구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옳다'라고 느껴야 편안한 마음. 그 양심이 있는 이상 인간에겐 희망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떤 본능만으로 설명하기엔 또 사회적으로 학습된 복잡한 발동 구조와 분야 등이 있겠지만. 나만 해도 당장 그걸 경험할 때마다 '착한 마음이구나-'하고 토닥토닥해 주니 그 느낌의 강도와 영향력이 확연히 사그라들었다. 


다시 오늘 아침으로 돌아가보면, 사실 나는 나를 지지하고 도와주시는 멘토들의 그 믿는 얼굴을 보기가 부끄러웠다. 나름대로 노력하는 우리 학과 교수님들께도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 불편감을 해소하고자 산더미같이 밀린 일을 뒤로하고 메모장을 폈다. 나름의 자기 정당화다. 내 방어기제인 분석이 발동된 것이다. 장기의 불편함이 사그라들 때까지 분석하고 분석하고 분석한다. 멘토들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어주는 그 무관심의 애정이 나를 스스로 깨닫게 이끌어준다. 그리고 내일 학회발표나 빨리 준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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