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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Apr 07. 2022

숲속으로

동화의 재해석 또는 민간설화의 회귀

우리나라에서 '문화생활'의 대표격인 뮤지컬은 미국 공연계의 자부심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냥 행복하고 단순하고 밝은 꿈의 나라처럼 보이는 뮤지컬 세상이지만, 이 뮤지컬의 대부와도 같은 스티븐 손드하임은 마냥 밝지만은 않은 주제를 담백하게 담아낸 인물입니다.


스티븐 손드하임의 역작 중 하나인 <숲속으로> (Into the Woods, 1987)는 바로 이러한 동화적 세계를 철학적인 시선으로 재구성합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간단한 뮤지컬의 역사와 함께 <숲속으로>가 파헤치는 전래동화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뮤지컬의 역사


뮤지컬은 미국 공연의 정체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정도로 미국인들은 뮤지컬이 미국이 만들어낸 강력한 문화적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20세기에 등장하자마자 대중에게 가장 사랑받는 공연 형태가 되었죠.


뮤지컬에도 나름의 트렌드가 있었는데요. 1927년 오스카 해머스타인 주니어의 <쇼 보트>를 시작으로 대사로 스토리가 진행되는 한편 중간에 노래가 삽입되어 스펙터클한 장면이 연출되는 형태가 뮤지컬의 기본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를 대본에 기반한다는 뜻을 담아 '북(book) 뮤지컬'이라고 합니다. <쇼 보트>는 기존에 가장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멜로드라마에 착안하여 흑인 노예제의 비극을 소재로 극적인 상황을 연출했는데요. 이렇듯 당시 뮤지컬은 가족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멜로드라마적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반세기가 지난 1968년, <헤어>라는 록 뮤지컬의 등장으로 뮤지컬계에는 큰 변화가 찾아옵니다. 반항적 감성을 담은 록음악을 활용하며 급진적인 소재와 외설적인 대사 그리고 적나라한 노출을 보여준 <헤어> 이후로 기존에 대중적이지 않다고 여겨져 뮤지컬에서 다루지 못했던 소재들이 록 뮤지컬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시도됩니다.

의상과 슬로건에서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의식이 잘 드러나는 뮤지컬 <헤어>의 한 장면입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theatregold.com/hair-1967/)


이때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스티븐 손드하임(1952-2021)입니다. 손드하임은 마냥 해맑았던 뮤지컬을 살짝 비틀어 풍자와 어두운 면을 추가해 뮤지컬에 문학적 깊이를 더합니다. 음악 또한 스토리와 유기적으로 연결되게 구성하여, 음악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하거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다른 인물의 내면 등을 전달합니다. 밝은 내용을 노래하지만 어두운 음악을 사용하여 긴장감을 조성하는 등 역설법 또한 많이 사용하여 다양한 해석의 갈래를 허용합니다. 한국에서 자주 상연되는 <스위니 토드>(1979)도 손드하임의 작품으로, 연쇄살인을 하는 이발사가 주인공입니다. 대충 들어봐도 밝은 내용은 아닐 것 같죠.

지난해 별세한 손드하임에게 2015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표창장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patch.com/pennsylvania/newtown-pa/bucks-co-remembers-george-school-alum-legend-stephen-sondheim)


뮤지컬은 등장부터 워낙 성공적이었고, 따라서 다른 나라들에도 금방 수입되었습니다. 1970년과 80년대에는 영국에서 앤드루 로이드 웨버(1948-)라는 인물이 또다시 혜성처럼 등장하며 미국에 역수입되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0), <캣츠>(1981), <오페라의 유령>(1986) 등 우리나라에서 정말 유명한 작품들은 웨버의 것이 많습니다.


웨버의 성공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규모의 압도적인 화려함에 일정 부분 기인했습니다. 손드하임의 경우 좀 더 문학적이고 소자본으로도 가능한 소박함이 특징이기에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경향이 있고요. 위기감을 느낀 미국에서도 90년대 이후 대자본을 들인 새롭고 실험적인 뮤지컬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한 예로 디즈니의 자본이 들어간 대규모의 <라이온 킹>(1994)은 인형극을 접목시켜 엄청난 스펙터클을 보여줍니다. 한편 에이즈와 성소수자의 삶을 다룬 뮤지컬 <렌트> (1996)도 작은 자본으로 실험적 내용을 다루며 브로드웨이를 다채롭게 합니다. 좀 더 현대로 오자면 <위키드>(2003)가 이러한 대자본 뮤지컬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죠.

인형극을 접목한 <라이온 킹>의 화려한 오프닝 장면입니다. 기린과 같은 큰 동물과 날아다니는 새의 등장 등 놀라운 무대 기술을 보여줍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ocregister.com/2019/02/23/disneys-the-lion-king-will-return-to-orange-county-as-part-of-the-segerstrom-centers-2019-20-broadway-season/)




2. 뮤지컬 <숲속으로>


이제 그 화려한 뮤지컬들을 뒤로하고 간혹 지루하다거나 자극적이지 않다는 평을 듣는 손드하임의 잔잔한 뮤지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숲속으로>는 그림 형제의 전래동화 여럿을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 재구성하는데요. 빨간 모자, 신데렐라, 라푼젤, 잭과 콩나무 이야기들을 새로운 인물인 빵집 부부를 중심으로 하나로 엮습니다. 놀랍게도 각 이야기들은 하나로 손쉽게 묶이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요. 원하는 것이 있으며 이를 얻기 위한 모험을 통해 이런저런 고생을 겪고 성장하여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물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복잡한 관계를 이루는데, 여기서 모두 설명하기보다는 그림 한 장으로 이들의 관계를 소개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한눈에 보아도 굉장히 복잡하게 얽힌 구도를 가지고 있죠. 1막은 각 인물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가 익숙한 이야기를 따라 인물들이 이것을 성공적으로 얻기 때문에 상당히 깔끔하고 따라가기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2막에서는 모든 익숙함이 무너집니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의 이후를 보여주는 2막은 원하는 것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않은 인물들의 삶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욕망에는 끝이 없기도 하지만, 각 인물들의 욕망이 과연 진정 그들의 것이었는지, 사회가 심어놓은 욕망이 아니었는지 인물들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 1막에서 부를 얻기 위해 잭이 처치했던 거인의 아내가 나타나 잭에게 복수하려고 합니다. 1막에서 욕망을 이루기 위해 각 인물들이 도덕적으로 의문스러운 행동들을 하며 급함을 핑계 삼아 어영부영 넘어갔던 일들이 2막에서는 책임으로 돌아와 이들을 압박하는 것입니다. 잭을 넘기지 않으면 모두를 공격하겠다는 거인에게 왕국 전체가 무너질 위기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의지할 수 있는 모든 존재가 사라집니다. 이 상황을 진두지휘해야 할 왕실 사람들은 가장 먼저 도망가버리고, 흔들림 없는 강한 존재였던 마녀는 인간들이 지긋지긋하다며 사라져 버립니다. 잭이 거인에게 죽은 줄로 안 잭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세상을 떠나고, 제빵사의 아내 또한 잭을 찾기 위해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왕자를 만나 하룻밤을 보낸 후 실족하여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이야기를 진행하던 이야기꾼마저 거인에게 먹혀버리죠.


의지할 대상, 방향성을 제시해줄 모든 존재가 사라진 상태에서 기존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던 아이들(신데렐라, 잭, 빨간 모자, 제빵사)은 옳고 그름을 따져 스스로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닫고 한 채 힘을 합쳐 거인의 아내에 맞서 싸워 이깁니다.


<숲속으로>의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입니다. 마치 인형극처럼 부자연스럽게 동화적 연출을 과장한 느낌이 듭니다. 풀버전을 유튜브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www.theatermania.com/los-angeles-theater/news/into-the-woods-reunion-concert-segerstrom_70204.html)




3. 전래동화 혹은 민간설화


<숲속으로>는 우리에게 익숙한 동화 이야기를 얼마나 재사용하고 어떤 부분을 새로이 쓰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동화하면 떠오르는 특징들이 몇 가지 있죠. 주로 짧고, 선악이 분명하고, 마법적인 놀라운 요소가 있고, 모험을 통해 성장하고, 해피엔딩을 맞고, 교육적 메세지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요소들이 현대발명이라고 한다면 믿기시나요?


전래동화의 유래를 분석한 책 When Dreams Came True: Classical Fairy Tales and Their Tradition (2007)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전래동화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으며 전반적으로 아이들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생각이다.
It has generally been assumed that fairy tales were first created for children and are largely the domain of children. Nothing could be further from the truth.


본래 민간설화로 구전되어오던 다양한 이야기들은 인쇄 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기록학의 발달로 크게 변질되며 동화라는 장르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민간설화를 기록한 인물로는 프랑스의 샤를 페로(1628-1703), 독일의 그림 형제 (1785-1863, 1786-1859), 덴마크의 한스 안데르센(1805-1875) 등이 있습니다. 다양한 버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한 이들은 설화를 문화적 자산이라고 여기고 이야기를 한데 모아 분석하는 것이 나라의 문화적 저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은 이들이 정리한 많은 이야기들이 서로 겹치기도 하고 유럽 이외의 나라에서도 많이 발견되는데, 이 이야기들이 전반적으로 유럽의 것이라고 인식되는 것은 이들이 이야기를 자신의 것으로 알렸기 때문입니다.


한 예로 신데렐라 이야기는 전 세계에 각 나라의 버전이 존재할 정도로 정확한 유래를 찾을 수가 없는 보편적 이야기입니다. 디테일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구박받던 여자 주인공이 신발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높은 신분의 남자를 만나 상황이 개선된다는 점이 공통적이죠.


기록학자들은 설화를 정리한 두꺼운 책을 여러 쇄 출판했는데, 이중 가장 뜨거운 반응을 받은 것이 가볍게 읽을 수 있도록 짧고 단순하게 정리된 책이었습니다.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그림이 덧붙여지고 번역되어 수출되면서 이야기들은 점점 '아이들을 위한' 것이 되어갑니다. 이야기가 단순해지면서 주로 기존에 존재하던 잔인하고 유혈이 낭자한 요소들, 그리고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어두운 부분과 정치적 부분 등은 전부 삭제되고 꿈같은 부분만 남은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월트 디즈니가 동화 시리즈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내면서 더욱 강해졌고요.


우리나라의 신데렐라 이야기인 콩쥐 팥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내용은 새엄마와 자매에게 구박받던 콩쥐가 동물들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신발을 통해 새로 부임한 젊은 관리를 만나 꽃가마를 타게 된다는 것 정도입니다. 하지만 콩쥐 팥쥐 원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콩쥐를 좋게 본 관리는  부인과 별세한 나이 많은 사람이었으며 신분이 낮았던 콩쥐는 그에게 두 번째 부인으로 시집가는 것에 만족하는 아주 현실적인 엔딩을 맞습니다. 이후 콩쥐를 질투한 팥쥐는 콩쥐를 물에 빠트려 죽이고 자신이 콩쥐 행세를 하며 그녀의 집에서 살아갑니다. 죽은 콩쥐의 혼은 꽃으로 피고 이는 남편이 꺾어 집에 놓아두게 됩니다. 이 꽃은 팥쥐가 혼자 있을 때마다 머리채를 잡는 등 팥쥐를 공격합니다. 이후 콩쥐의 혼이 남편에게 나타나 왜 부인이 바뀐 것조차 알아보지 못하는지 책망하고, 남편의 도움으로 되살아난 콩쥐는 팥쥐의 죄를 밝혀 정의를 구현합니다. 팥쥐는 거열형으로 온몸이 찢겨 죽고, 그 몸은 젓갈로 담겨 팥쥐의 어머니에게 전달됩니다. 선물을 받고 충격을 받은 새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숨을 거둡니다. 이렇듯 원작은 상당히 잔인한 내용을 담고 있고, 권선징악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어딘가 찝찝함을 지울 수가 없죠.


마냥 단순하고 행복하게 바뀐 동화들은 특정한 교육적,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가 필요한지, 어떤 교육이 필요한지 또한 사람들마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데요. 아이들에게 현실의 한계를 지운 부푼 꿈을 심어주고 세상의 아름다운 모습만 접하게 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시점은 상당히 근대적인 생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메리칸드림'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꿈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반복적인 좌절로 기록되는 현대인의 인생도 어떻게 보면 어릴 때부터 접한 동화 속 세상의 모습에 그 뿌리를 둔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숲속으로>로 돌아가 볼게요. <숲속으로>는 전래동화에 내재된 민간설화의 가치들을 회복시킵니다. 이야기꾼의 역할을 인식하게 만들고, 도덕의 절대성을 부인하며 개인이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지점들을 제시하고, 욕망을 이루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 아님을 보여주고, 세상의 어두운 부분들을 그려냅니다.

 

특히 이야기꾼의 부재는 설화에서 동화로 변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는데요. 이야기꾼은 설화의 엉성한 뼈대에 당시의 감성을 적용한 살을 붙여 매번 새로운 내용을 창작해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였습니다. 이야기꾼을 통해 설화들은 과거의 것이 아닌,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 살아 숨 쉬는 이야기로 존재해왔고요. 하지만 기록이 되면서 이야기들은 더 이상 유기적으로 변화할 수 없었고, 누구의 입을 통해, 즉 누구의 시선과 의도를 반영해 이야기되는 것인지 한눈에 알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죠. <숲속으로>에서는 이 이야기꾼이 있었다가 없어지는 장치를 통해 이야기꾼의 역할과 각 이야기들이 어떤 목적으로 유도되는지에 대해 관객이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leecartwright1.wordpress.com/2014/03/12/into-the-woods-original-broadway-production/


이미지 출처: https://variety.com/2012/legit/reviews/into-the-woods-1117948028/

첫 번째 사진은 초연 당시 이야기꾼의 모습으로, 나이 지긋한 백인 남성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한편 두 번째 사진은 최근(2010년)에 공연된 <숲속으로>인데요. 가운데에 빨간 자켓을 입은 어린 소년이 이야기꾼을 맡고, 마지막에 이 소년이 사실 빵집 부부의 아들이었음이 밝혀지면서 부모와 자녀 관계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룬 극의 주제를 강조합니다. 이렇듯 이야기꾼을 어떤 인물로 그리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숲속으로>가 상연된 20세기 후반에는 에이즈의 유행과 세계 무역 센터(쌍둥이 건물)의 붕괴가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따라서 비평가들은 <숲속으로>가 이러한 20세기 말의 충격을 다루는 것으로 분석하곤 했죠. 하지만 손드하임은 이러한 해석들이 작품의 풍부함을 해친다며 특정 사건에 대한 것으로 규정짓지 말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설화로서 <숲속으로>는 앞으로도 언제 어떻게 상연되든 시대 상황에 맞추어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근대에 유행했던 판소리를 통해 이러한 구전설화의 가치와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데요. 판소리가 설화를 어떻게 전달하는지 관찰하면서 <숲속으로>와 비교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자주 상연되는 <스위니 토드>, <컴퍼니> 등에도 손드하임 특유의 반복적이고 중독성 있는 노래 문학적 깊이가 담겨있는데요. 공연들을 보면서 뮤지컬이 줄 수 있는 깊은 세계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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