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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리 Apr 20. 2022

잔혹 연극과 행위예술

전쟁 속에서 등장한, 삶만큼 치열한 예술

무대에는 시체가 널려 있고, 젊은 남자와 매춘부는 성교 중 서로의 눈을 먹습니다. 유모가 어린 소녀의 시체를 안고 등장하고, 소녀를 마치 팬케이크처럼 납작하게 되도록 바닥에 던집니다. 기사가 등장하여 유모에게 치즈를 달라고 하고 유모는 치마를 들어 올립니다. 유모의 질에서 전갈들이 기어 나오고, 이들은 기사(또는 유모)의 성기로 들어가 폭파합니다. 폭파한 성기는 태양처럼 빛나는 투명한 형체가 됩니다.


앙토냉 아르토의 극 <피의 분출(Spurt of Blood)>의 한 장면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이런 장면들은 무대에 어떻게 올렸을까요?

 

이번 포스트에서는 청소년 관람 불가, 유혈이 낭자하고 가학 행위와 노출이 난무하는 '잔혹 연극(Theater of Cruelty)'에 대해 알아볼게요.




일반인이 한눈에 이해하기 어려운 다양한 행위예술이나 전위예술의 근원을 찾아가다 보면 한 인물에 닿게 되는데요.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 1896-1948)라는 프랑스 배우이자 극작가, 시인, 감독입니다. 아르토는 생전에 호응을 받지 못하고 그의 공연 또한 거듭 실패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집필한 잔혹 연극에 대한 설명서가 후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면서 아르토는 서양 현대연극의 기둥이 됩니다.




인간 내면의 야만성을 마주하다: 전쟁과 초현실주의 


아르토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습니다. 당시 다다와 미래주의 등 틀을 깨는 예술 사조들이 등장할 때였죠. 전쟁에 대한 충격이 반영된 이러한 새로운 예술 형태들은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급진적이고 과격한 표현방식을 탐구했습니다.


이러한 문맥에서 출범한 것이 초현실주의라는 사조인데요. 혹시 초현실주의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대표주자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1931)과 같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시나요? 사실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이 직관적으로 반영하지 못하는 이 사조의 핵심 철학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 출발하는 무의식입니다. 프로이트가 이론화한 무의식은 인간 내면의 다양한 정제되지 않은 욕망들이 의식에 의해 억눌려 있다가 꿈이나 환영의 형태로 등장한다는 개념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꿈의 이미지, 환각제를 통해 다르게 인식되는 세상의 모습 등 이성이 인지하지 않는 또 다른 세계를 표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

(출처: https://www.moma.org/collection/works/79018)


꿈이라고 하면 굉장히 환상적이고 아름다울 것 같은데요. 초현실주의에서 꿈은 억눌린 욕망들의 집약체로, 폭력적이고 기괴한 모습을 띱니다. 달리와 루이스 부뉴엘의 합작인 단편영화 <안달루시아의 개>(1929)는 이러한 잔혹한 꿈의 세계를 잘 반영하고 있죠. 초현실주의의 창시자인 앙드레 브레통이 이 단어를 남성 명사로 정의했듯, <안달루시아의 개>에는 다양한 잔인하고 기괴한 장면들 속에 여성을 향한 억눌린 욕망의 표출이 얽혀 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사람의 눈을 칼로 긋는 것과 달에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함께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상당히 충격적이라 계속 머릿속에 남게 되는 장면이죠. 대사가 없는 20분짜리 단편영화의 잔혹함과 기괴함을 느껴보고 싶다면 아래 동영상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Mw1bmYBbms

살바도르 달리 & 루이스 부뉴엘, <안달루시아의 개>(1929)


초현실주의가 표현하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무의식에는 전쟁의 영향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전쟁이 상징하는 남성성을 생각해봤을 때 전쟁을 통해 목격한 인간의 본성은 남성적 문맥에서 이야기되기 쉬웠을 것입니다. 인류의 대학살과 끝을 모르는 전쟁범죄를 지켜본 예술가들은 서양이 문명이라는 표어 아래 야만성과 거리를 두고자 했지만, 사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야만성을 지닌다고 생각했죠. 스스로가 야만인임을 인지할 때 그 날뛰는 에너지를 생산적인 방향으로 정화할 수 있을 것이고, 이를 가능케 할 매개체가 예술이라고 생각한 것이 초현실주의와 잔혹 연극의 철학입니다.




잔혹을 통한 정화를 기대하다 


현대에는 다양한 폭력적 컨텐츠가 모방 행위를 장려할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인데요. 잔혹 연극에서는 단순 소비와 자극을 위함이 아니라 정 관객을 잔혹성 한가운데에 몰아넣어 불편함과 카타르시스를 동시에 경험하게 하기 위해 잔혹을 사용합니다. 잔혹이 관객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와 무의식을 뒤흔드는 것이죠.


'잔혹'이 뜻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일까요? 아르토가 정의한 잔혹을 보면 현대 우리가 생각하는 소비적 폭력성과는 상당히 다른 맥락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몇 가지 특징을 볼게요.


남에게 가하는 것이 아닌, '나'(배우)에 대한 잔혹이 가장 먼저이며 가장 중요하다.

감각에 대한 잔혹성이다.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벗어나도록 인간을 한계에까지 몰아붙이는 것이다.


아르토는 우선 공연자 본인의 감각이 일깨워져야 그 에너지가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따라서 남이 아닌 자신에게서부터 잔혹이 시작하는 것이죠. 감각에 대한 잔혹성이라는 말은 통각을 포함한 다양한 감각적 경험을 극대화시킴으로써 관객이 정신 차리지 못하게 그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종종 신체에 대한 잔혹만이 주목받는 경향이 있지만, 이상적인 잔혹 연극에서는 관객이 무대의 중앙에 자리하고, 화려한 조명과 음악이 사방에서 들려오며 감각에 공격을 가합니다. 또한 내면에 잠들어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깨우기 위해서는 편안한 공간에 머무르려고 하는 의식을 강제로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안온함을 찾으려는 본능에 거스르기 위해서는 잔혹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보는 것이죠.


사실 아르토는 우연히 보게 된 발리 전통 공연에서 크게 영감을 얻어 잔혹 연극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 공연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상징적 매체(이미지, 몸짓, 소리 등)의 활용, 내용의 높은 접근성과 공감가능성, 계산과 즉흥의 혼재, 관객의 자연스러운 참여 등의 요소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발리 공연에서 느꼈던 태초의 제의적 공연성이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연극이 만들어내는 비일상적인 에너지를 신과 소통하기 위해 활용했던 과거 제의들의 진지함과 신성성이 발리 공연에서 그대로 느껴졌다고 합니다.


서양 연극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제의성을 복원하기 위해 아르토는 잔혹이라는 충격요법을 쓰기로 합니다. 무속이 존재하지 않는 서양의 문맥에서 제의적 성격을 이끌어내기 위해, 아르토는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신체가 경험하는 트랜스(무아지경)와 같은 상태를 만들어내고자 했습니다. 카니발과 같은 다양한 의식에서 볼 수 있듯 제의는 평소에 억압되었던 다양한 본능적이고 야만적 욕망들이 터져 나올 수 있는 창구가 됩니다. 이때 제의는 난무하는 욕망들을 창의적인 에너지로 정화하여 예술과 같은 의미 있는 결과물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합니다. 따라서 잔혹 연극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각을 일깨운다 → 비일상적인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 야만적 인간의 본성들이 방출된다 → 관객은 그것을 함께 경험한다 → 예술의 언어를 통해 이러한 욕망과 폭력을 정화한다 의 수순을 밟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NO MORE MASTERPIECES, 더 이상 걸작은 없다


아르토의 잔혹 연극 이론은 기성극에 대한 반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연극이 본래의 의도를 잃고 잘못된 방향으로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르토는 "No more masterpieces" 즉 "더 이상 걸작은 없다"라는 말을 내걸고 걸작과 걸작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성극의 형식주의적 면모를 비판합니다. 서양 예술사에서는 글로 표현된 작품에 높은 가치를 부여해 왔는데요. 아르토는 이것이 교육받은 소수를 위한, 이해하기 어려운 배타적인 예술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했고, 비언어적 표현이 언어적 표현과 동등하게 중심이 되는 공연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굉장히 난해해 보이는 잔혹 연극이지만 사실은 기성극보다 훨씬 접근성이 뛰어난 극을 만들고자 한 것이 의도였다는 점이 의외입니다.


또 다른 참고할만한 사실은 아르토가 어린 나이부터 신체적, 정신적 병증과 싸웠고, 결국 생의 마지막 10년가량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고 5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입니다. 약에 대한 의존도도 상당히 높았다고 하는데요. 초현실주의자들의 꿈의 이미지에 많이 공감하고 모두를 위해 잔혹 연극을 만든 아르토가 경험하는 세상은 아마 이렇듯 고통과 기괴함이 가득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잔혹 연극은 그에게 이해가 가는 연극 형태를 만들고자 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고요. 이후 아르토에게서 파생하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것을 보면, 당시에는 외면받았더라도 그의 경험은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구체적 시안이 담긴 선언서를 쓰다


당시 기성극에 반대하는 움직임들은 선언서를 통해 일종의 예술적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아르토도 선언문을 냈고, 이어 정신병원에서도 잔혹 연극에 대한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여 출판하는 등 자신의 비전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아르토의 글들은 지금 봐도 굉장히 영감을 많이 주는 구체적이고 세세한 이론과 현장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르토의 영향은 그가 그토록 반대했던 글을 통해 이어져올 수 있었던 것이죠.


무대에 대한 구체적 지시문을 주는 아르토의 선언서에는 의상과 공간 등에 대한 디자인도 들어가 있습니다. 의상의 경우 "제의적 의도가 담긴 오래된 의상"이 적합하며, 해당 의상이 탄생한 당시의 신성성과 아름다움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공간의 경우 격납고나 헛간을 개조한 곳이 적합하다고 보았습니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고, 작지만 소리가 울리는 특성을 통해 관객의 감각을 사방에서 공격하기에 효과적이라고 본 것입니다.




잔혹 연극에서 파생된 몇 가지 현대 연극들을 살펴볼까요? 대부분 청소년 관람불가임을 인지하고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한국에도 2015년 내한한 <리빙룸>의 공연입니다. 평범한 일상의 공간을 상징하는 거실이 배우들의 제의적 노래와 함께 환상적이고 이상한 공간으로 태어나고, 공연이 끝나면 관객과 케이크를 나누며 이 경험을 함께하는 형태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bvov7z5W6c


영국에서는 "얼굴에다 대고"라는 의미의 In-Yer-Face 극이 90년대에 유행하는데요. 이러한 움직임을 대표하는 사라 케인의 극 <폭파(Blasted)>(1995)에서는 일상적 공간에 갑자기 전쟁이 침투하면서 잔혹성이 가감 없이 드러납니다. 호텔방에 쳐들어온 군인이 남자 주인공을 강간하고 그의 눈에 입을 대고 눈알을 빨아먹는 장면이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마지막에는 아포칼립스 한가운데에 눈이 먼 채 남겨진 남자 주인공이 자신의 인분을 먹으며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도 그려집니다.

사라 케인의 <폭파>의 한 장면입니다.

(출처: https://thetheatretimes.com/remembering-sarah-kane/)


아르토부터 시작해서 이 모든 예시는 백인 위주인데요. 잔혹성을 통해 유색인종의 경험을 그려내는 예술가들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기예르모 고메즈-페냐(1955~)는 멕시코와 미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인물로, 다양한 '선 넘기'(border-crossing)를 탐구합니다. 국경, 문화, 언어의 경계, 금지된 것과 허용된 것, 성 정체성, 가상공간과 현실 공간, 그리고 예술 분야의 경계를 깨부수며 이를 넘나 듭니다. 칼과 가위 등 날카로운 도구를 직접 몸에 댄다거나 카메라에 장전된 권총을 겨누는 등 상당히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것이 특징입니다. 성기를 이용한 다양한 연출을 하며 성적으로도 낯설고 충격적인 실험을 합니다. 여기서는 출입국심사가 상정하는 다양한 '선'들의 허구성을 짚어내는, 폭력적이지 않은 짧은 영상을 보여드릴게요.

https://www.youtube.com/watch?v=txaY7ZAV5ck&list=PLpuhPUF1iWOF_iUbVFW4hgdZU_rR9hLHm&index=189    



연극보다는 시각예술가로 소개되는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니치(1938-2022)의 작품은 그야말로 흘러넘치는 피로 이루어져 있고, 그의 작품은 야만적 제의를 그대로 복원하는 형태를 띱니다. 특이한 것은 기독교 제의를 모티브로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를 상징하는 존재를 표현하는 과정에 인간의 장기를 손으로 헤집는 장면, 동물을 죽여 신전에 바치는 장면 등을 포함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4oxg2v4117o&list=PLpuhPUF1iWOF_iUbVFW4hgdZU_rR9hLHm&index=190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출범한 잔혹 연극은 지금도 새로운 충격을 주며 다양한 예술가들이 선보이고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에는 전쟁이 계속되고, 폭력은 끊이지 않죠. 아마도 폭력과 고통이 존재하는 한 잔혹 연극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서양 연극에 충격을 주고자 만들어진 잔혹 연극이 한국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궁금한데요. 최근 잔혹한 장면을 담고 큰 유행을 불러왔던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이 저는 생각납니다. 강렬한 색감의 의상과 소품이 인물들을 감싸며 시청각적 감각을 자극하고, 이들이 만들어낸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잔혹성이 현실성을 일깨우고, 한계까지 몰아붙여진 인간이 보이는 행동을 기대한다는 점이 그러하죠. 이 잔혹성이 정화의 작용을 할 것인지, 아니면 소비에 그칠 것인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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