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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수 Sep 22. 2019

아빠는 딸의 <표정>을 보고 울었습니다.

부모도 몰랐던 초등학교 큰 딸의 무게

후배와 우연찮게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후배는 모 경찰서에서 교통사고 조사관으로 활동 중이고, 그의 아내 또한 내가 잘 아는 후배 경찰관이다. 후배 내외 사이에는 초등학교 6학년인 큰 딸이 있고, 밑으로 초등학교 4학년과 7살 두 딸이 있다. 후배는 일명 딸부자다.


대화는 고민이 잔뜩 담긴 상담의 형식은 아니었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다 말 나온 김에 딸 이야기를 끄집어낸 식이었다.


"형, 우리 큰 딸 알지?"
"너무 잘 알지. 진짜 많이 컸겠다."
"응. 근데 큰 애가 공부도 잘하고 동생들도 잘 이끌고 너무 좋은데 딱 한 가지 아쉬운 게 말이 너무 없어."
"말이 없는 거야? 아니면 자기 주관이 없다는 거야?"
"그러네. 말이 없는 게 아니고 자기 의견을 잘 표현을 안 해"
"예를 들면?"
"그러니까... 와이프가 늦게 오는 날은 가끔 음식을 시켜 먹거든. 근데 애들한테 오늘은 뭐 시켜 먹을까? 하고 물으면 항상 큰애는 자기는 아무거나 괜찮다고 하거나 아니면 둘째가 좋아하는 걸로 시켜달라고 해."
"큰 애는 음식 중에 뭐 좋아하는데?"
"없어. 뭐든지 다 좋아해. 대신 입이 짧아."
"그럼 대부분 음식은 둘째가 좋아하는 걸로 시키겠네."
"응. 형도 둘째 알잖아. 여우짓 잘하는 거."
"흠... 이렇게 해. 다음에 아니 오늘 저녁에 음식을 시키는데 오늘만큼은 무조건 큰 애가 좋아하는 걸로 시켜줘. 무조건. 알았지? 꼭이다."


후배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다. 

후배의 말을 듣고 나는 이 사안이 매우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야기를 하지 않으니까 또 자기 생각을 말할 줄 아는 <방법>을 잊었기 때문에 나는 큰 딸이 꽤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가 정말 먹고 싶은 게 없지는 않을 것이다. 또 매번 동생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상식선에서 그렇다. 또,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라면 다 잘 먹을 수는 없다. 개중에 유난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을 것이고 없다면 그것도 문제다. 먹거리 또한 자녀의 발달과정에 꽤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후배는 저녁 끼니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내게 전화를 했다. 내용은 그렇게 내가 시키는 대로 오늘 저녁에 음식을 시켰다는 것이다. 시키면서 내 말대로 오늘은 무조건 큰 애가 좋아하는 걸로 시키라고 해서 큰 딸에게 먹고 싶은 걸 물었더니 또 예전처럼 자기는 아무거나 괜찮다며 동생들이 좋아하는 걸로 시켜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둘째가 언니를 조르며 '피자'를 시켜먹자고 조르는 통에 큰 딸 역시 '피자'를 시켜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배는 둘째의 이야기를 무시하고 단호하게 오늘은 무조건 큰 언니가 먹고 싶은 걸로 시킬 거라고 했더니 그 순간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고 했다. 후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딸이 우쭈쭈 하며 입가에 <미소>를 살짝 지었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둘째를 보면서 큰 딸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씩~ 하고 웃고 있더라는 거였다. 그것도 아주 뿌듯하게 입술을 꾸욱 깨물면서 말이다. 그 모습을 본 후배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렸다고 했다. 맞다. 후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큰 애의 당당한 <미소>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왜 무조건 큰 딸에게 음식을 시키라고 했는지 이제 알 것 같다고 했다.


해석을 해보자.

먼저 나는 왜 큰 딸이 심각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렇다. <이야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표현>이 없는 친구는 위험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렇게 말이 없는 친구는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또 친구관계에서도 고민이 있거나 문제가 생겨도 이야기를 하지 않을게 뻔하다.


발달 과정에서 보면 청소년기 중 탐색과정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이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제안>을 시도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자녀는 <제안>조차 시도하지 않을뿐더러 자신이 하고 싶거나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내면 속으로 <저장>해두는 특성을 가진다. 이러한 <저장> 행위는 청소년들에게 매우 안 좋은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이후에 심리적으로 더 큰 문제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즉, "표현하는 자녀는 안전하지만 표현하지 않는 자녀는 위험하다"는 뜻이다.


자녀에게 문제가 닥쳤다면 즉시 부모나 선생님에게 이야기를 해야 문제를 풀어나갈 수가 있다. 그래야 자녀가 안전하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부모도 선생님도 모른 체 자녀는 외롭게  <상처>를 끌어안고 가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결국 상처가 곪아 터져서야 뒤늦게 알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가 모르는 보이지 않는 흉터가 생각보다 많다. 다시 한번 더 말하지만, 이야기를 하는 자녀가 안전하다. 반대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자녀는 위험하다. (몇 번을 반복하냐고 하겠지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큰 딸은 어찌해서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흔히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사례를 제외하면, 가장 유력한 원인은 부모에게 있다고 봐야 한다. 후배의 가정은 엄마, 아빠가 모두 바쁜 맞벌이를 하고 있다. 게다가 딸만 셋인 데다 양육과정에서 부모는 큰 딸에게 부모를 대신한 <돌봄>의 역할을 맡겼을 것이 유력하다. 엄마, 아빠가 귀가할 때까지 큰 딸은 언제부터인가 동생들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을 떠안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녀의 심성이 유독 착하다고 한다면 더구나 큰 딸로서 부모에게 칭찬을 듣고, 인정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아이는 부모에 대한 도덕심 때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실망을 안겨 드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아이의 문장은 늘 순종적이고 배려는 늘 짙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무거운 책임감을 가진 자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입을 다물게 만든다.  그래서 큰 딸이 보여준 작은 미소는 그토록 갈망하고, 듣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한 자동 반사였던 셈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자녀는 형제자매라는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에 따라 책임과 의무를 스스로 가지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 또한 자녀의 발달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도 사실이다. 쉽게 말하면 부모가 애써 <책임감>을 씌우지 않아도 저절로 자녀들은 <책임감>을 터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거기에 부모가 노골적인 <책임감>을 얹어 준다면 자녀는 얼마나 더 힘들겠는가? 이렇게 되면 자녀에게는 <책임감>이 <압박>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책임감이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나이가 많은 형제자매가 어린 동생을 돌보는 것은 인류의 과정에서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고, 이러한 <돌봄>은 사회적 위계질서나 끈적한 동질성을 갖추는 데 충분한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책임>을 주었다면 <책임>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부모가 공감해주고 나아가 인정까지 해줘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 아이에게 버티라고 하는 건 너무 고된 일일지도 모른다.


이제 <해법>으로 들어가 보자.

자녀가 형제자매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형제자매 관계에서 자녀별로 차지하고 있는 <지위>에 대한 <공감력>이다. 큰 딸의 지위가 주는 어려움을 부모는 공감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누구나 부모라면 자녀에 대한 편애 즉, <쏠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래도 최대한 형제자매 지간에 있어서 <쏠림>이 발생하지 않도록 상시 부모가 자녀의 <밸런스>를 유지해주는 데 노력해야 한다.


지금,

우리 자녀의 형제자매 관계를 떠올려 보자. 어떤가? <쏠림>이 있는가? 없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만일 <쏠림>이 있다고 느껴진다면 지금부터라도 <균형>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 여기에 우리가 자녀에게 <공감>을 해주지 않았다면 이 또한 다른 자녀에게 보여준 <공감>을 가지고 와서 균형을 맞춰 주도록 하자. 이렇게 해야 비로소 우리 아이는 자기의 이야기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또한 우리 자녀의 <안전>을 위한 <길> 임을 꼭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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