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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수 Sep 17. 2019

정말 자녀에게 '공감'하고 계신 거죠?

자녀를 위한 <공감>과 <번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글은

부모에게 <공감> 대신 <핀잔>을 들은 어느 여중생의 하소연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자녀들이 그토록 원하는 <공감>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메신저로 상담을 요청해 온 여중생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다. 얼굴을 자주 본 적은 없지만 대부분 SNS 메신저로 가끔 연락을 하는 사이였고, 또래 친구들에 비해 학교 공부는 보통이지만 호기심도 많고 신앙심과 대외활동에 남다른 활동을 보였던 친구다. 대개 인사도 없이 자기 말부터 먼저 꺼내는 고등학생 언니, 오빠보다 대려 예의까지 갖춘 반듯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 <친구 문제>에 대해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가 괜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는 <핀잔>을 들어서 메신저로 하소연을 해 왔다.


"대장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혹시 대화 가능하실까요?"
"당연히 괜찮지. 무슨 일 있구나?"
"제 친구가 같은 반 친구들한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친구가 너한테 도움을 요청한 거니?"
"아뇨, 그건 아닌데 친구가 조금 전에도 연락 와서 너무 힘들다고 해서요."
"그 친구랑은 많이 친하니?"
"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어요"
"어떻게 괴롭히는데?"
"메신저로 친구에게 욕하고 비웃고 시비 걸고 그래요."
"괴롭히는 걸 너도 본 거니?"
"네. 친구가 대화 내용을 보여줘서 봤어요."
"흠... 친구가 진짜 많이 힘들겠다...ㅠㅠ"
"많이 힘들어해요...ㅠ"
"그 친구에게 대장님 연락처를 알려주고 꼭 메신저 하라고 해줘~"
"네 감사합니다. 대장님. 근데 이런 질문이 쓸데없는 건 아니죠?
"무슨 말이니?"
"아뇨, 조금 전에 이 이야기를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저보고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야단맞았거든요ㅠㅠ"
"저런... 많이 속상했겠다ㅠ 더구나 부모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면 대장님도 마음이 안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대장님이 볼 때 친구를 위해 같이 걱정해주고 방법을 찾아주려고 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생각은 아니야. 네 잘못은 아냐. 더구나 넌 항상 친구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대장님이 이전에도 봤잖아. 힘내거라~"


여중생에게 친구의 고민만큼 꽤 비중 있는 사안도 없다. 역할이 없는 청소년에게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목적론적 인간>이 되는 것만큼 뿌듯하고 확실한 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한 친구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면 자기라도 할 수 있는 게 없는지 방법을 찾겠다는 행동은 또래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꽤 흔한 일이다.


그래서 학생은 친구의 아픔을 그냥 볼 수 없어서 부모님이 TV를 보고 계실 때 용기를 내서 말씀을 드렸다. 그러나 돌아온 건 5G만큼 빠른 속도의 <핀잔>이었던 것이다. 대체 TV에서 무슨 재밌는 방송을 했길래 부모님은 그런 <핀잔>을 줘야만 했을까? 아니면 너무 고단한데도 자녀가 눈치 없이 썩 유쾌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서 본의 아니게 핀잔을 줬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지. 어찌 됐건 학생은 어렵게 용기를 낸 보상으로 부모의 <공감>을 바랐지만 안타깝게도 부모님은 자녀에게 <핀잔>만을 안겨주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듣고 무조건 부모님을 탓해서는 안된다. 부모가 그런 모습을 보이기까지 우리가 모르는 <복합적인 과정>이 분명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건 우리는 학생의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다.


<공감>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침팬지가 같고 있지 않은 인간만의 능력? 어렵다. 그럼, 같은 감정? 타인이 되어 보는 것? 그렇다. <공감>은 상대의 감정을 보고, 듣고, 느끼고, 표현하는 감정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면 자녀의 감정을 부모의 감정과 <동일시>하는 심리적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은 단독으로 쓰이는 명사에 한정하기보다 상대를 위해 동사를 수반하는 행위적 명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공감을 <하다>. 공감을 <표현하다>. 공감이 <필요하다>. 공감을 위해 <노력하다>와 같이 어떻게 보면 부드러운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꽤 매력적인 단어다. 특히, 자녀에게는 마법과도 같은 <필요충분적> 단어이기도 하다.


우리는 <공감>을 말할 때 종종 <동정>과 <공감>을 혼돈하곤 한다. 대부분의 자녀들은 자신이 힘들었던 상황을 이야기할 때 부모의 <공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정>에 대해서는 오히려 '후회하고' '싫고' 오히려 '수치심을 느꼈다'라고 말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특히, <공감>이 자녀에게 도움이 되었던 이유는 바로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예상치도 못한 <핀잔>은 <동정>보다 더 괴로운 <수치심>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지극히 위험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이 <수치심>은 자녀에게 너무도 불편하고 힘든 단어라서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고자 한다.


그렇다면 <동정>은 모든 자녀가 싫어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지난 수년간 만났던 초. 중. 고 학생들을 보면 초등학생 같이 저학년의 경우에는 오히려 <공감>보다는 <동정>을 더 좋아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현상은 자녀의 '발달학'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반면에 중. 고등학생 같이 고학년일 경우에는 <공감>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많았다. 좀 더 쉽게 학년으로 구분해보면 초등학교 4학년까지는 <동정>을 5, 6학년과 중학교 1, 2학년까지는 <동정과 공감>을 병행  그리고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동정>을 뺀 순수한 <공감>을 더 원했다. 예를 들어 적용해보면 이렇다. 자녀 입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어느 순간부터 이유 없이 자신 말고 다른 친구랑 어울려 다닌다며 속상해서 부모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하자. 부모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를 들어주면 좋을까? 나의 생각은 이렇다. 


1. 초등학생 1~4학년 자녀의 경우 : <동정>

  "어쩜... 그런 일이 있었어? 우리 딸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에구 그래서 요즘 우리 딸이 힘이 없었구나... 그 친구가 너무했다... 이야기 들으니까 엄마까지 마음이 안 좋네... 이리 와 엄마가 안아 줄게..."
2. 초등학생 5 ~ 중학생 2학년 자녀의 경우:  <공감과 동정>

   "정말? 그런 일이 있었어? 엄마는 몰랐어... 저런... 우리 딸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좀 나쁘다 그 친구... 이리 와... 엄마가 안아줄게. 엄마는 우리 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 딸은 항상 친구들에게 배려심도 많고 먼저 도와주려고 하잖아. 우리 딸이 친구들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건 엄마      가 너무 잘 알지. 엄마가 혹시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까?"
3. 중학생 3 ~ 고등학생 자녀의 경우 : <공감>

   "그런 일이 있었어? 엄마한테 이야기해줘서 너무 고마워... 이야기 듣고 보니까 엄마는 우리 딸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우리 딸은 늘 친구들에게 최선을 다하잖아. 항상 배려심도 많고 늘 친구들에게 잘해왔잖아. 만약 엄마라도 그 상황이 되면 많이 속상해할 것 같긴 해. 그 친구가 무슨 이유 때문에 다른 친구랑 친하게 지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우리 딸 잘못은 아니라는 거야. 엄마가 혹시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을까?"


<공감>은 자녀의 입장을 전적으로 <동조>해달라는 개념과는 구별된다. <공감>은 <동조>가 아닌 전적으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개념이다. 그럼 <동조>와 <이해>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것은 바로 <비판>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즉, 자녀를 <동조>한다는 건 동정의 개념이고 그 동정 안에는 상대를 비판하는 감정의 움직임을 포함한다. 하지만 <공감>에 있어서 비판은 금물이다. 부모 입장에서는 자녀의 기분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비판을 해줄 수도 있다. 또 자녀 입장에서도 부모의 비판에 화가 좀 풀릴 수도 있다. 하지만 당장에는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누구를 비판해준다는 것은 결국 앞으로 자녀로 하여금 또 다른 상대를 비판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데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결국 <원인과 결과>라는 안정된 공식을 가지고 자녀가 긍정적인 판단을 하는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공감>은 이 처럼 우리 자녀의 의식으로 문제를 바라봐야 하는 관점과 직결된다. 부모라면 모두가 아는 내용이지만 자녀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자녀는 마음이 착하고 여리고 또 자기 원인적이어서 어른들처럼 <귀인 오류> 즉, 어떤 현상을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보다는 나 자신에게 먼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모가 너무 앞서서 비난을 해주면 의외로 자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엄마 그건 아닌데...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데..."


한편, 부모가 공감해주는 데 있어서 가장 많이 실수하는 것에는 <비판> 말고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섣부른 부모의 경험을 자녀의 상황에 <대입>시키는 것이다. 이 행위는 우리 자녀들이 가장 싫어하는 <공감> 중에 하나이고 오히려 역효과만 초래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우리 딸이 이 정도 가지고 벌써 힘들어하면 안 되는데..."
"엄마는 예전에 이보다 더 힘든 일도 많았지만 고민한다고 해결된 일은 하나도 없었어."


특히, 이 문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문장이다.


"엄마, 아빠도 사춘기 겪어봤잖아..."


이러한 부모의 성급한 대입은 우리 자녀로 하여금 <한심하고> <바보 같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만들 뿐 아니라 결국 부모에게 이야기를 괜히 꺼냈다는 <후회>까지 하게 만든다. 이런 대입을 하고서 다음에도 자녀가 이야기를 해줄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어느 순간 우리 아이는 말이 없는 평범한 자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조금 확실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부모님들은 대개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한다.


"말처럼 그렇게 쉬운 건 아니에요"


맞다. 모든 시각을 자녀에게 고정시킨다는 건 어렵다. 그래서 완벽한 <공감>을 기대한다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번복>에 대한 제안을 드리고 싶다. 부모의 삶에도 다양한 그래프가 있는데 어찌 여유가 없는 구간에서까지 자녀의 감정을 <동일시>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극히 맞는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자녀에게 <핀잔>을 줄 수도 있다. 또 잘못된 <대입>으로 자녀를 순간적으로 실망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 최대한 시간을 줄여 <번복>하는 태도를 취해 보는 건 어떨까? 왜냐하면 자녀는 시간이 길어진다 해도 다시 <공감>해주는 부모의 태도를 진심으로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짧게는 자녀가 방문을 닫고 들어갔을 때 <번복>을 하고 싶다면 바로 방문을 두드리면 된다. 또 길게는 타이밍을 놓쳐 당장 <번복>하기 어색하다면 자녀의 분위기를 읽고 때를 골라 뒤늦게라도 <번복>하면 된다. 결코 어려운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원래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는 것을 또 그때는 엄마와 아빠가 컨디션이 별로였다는 것을 솔직히 털어놓는다면 자녀는 감동할 수밖에 없다.


나는 부모님들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자녀는 부모의 진심이 담긴 <번복>에 울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을.


끝.










매거진의 이전글 <명절 용돈>에 대한 부모와 자녀의 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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