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하드코어, 90년대 네덜란드 초딩들의 음악.
M이 한국의 대중문화를 하나도 모르듯이, 나 역시 M을 만나기 전까지는 네덜란드 대중 음악에 대해 일자무식이었다. 아트 스쿨에 있다보면 (다들 그들만의 리그에 살기 때문에) 듣는 노래가 ‘Arty Farty’ 하게 비슷비슷해서 ‘지역적인’ 음악을 듣는게 오히려 흔하지 않은 일이다. 물론 K-pop 아이돌의 노래를 스웨덴 프로듀서들이 작곡하는 요즘 세상에 그렇게 외따로 떨어진 장르가 어디 있겠느냐 싶다. 90년대에 십대 시절을 보낸 나와 M은 문화적으로 공감할 거리가 많다. 예를 들어 그룹 솔리드의 90년대 대 히트 곡 ‘이 밤의 끝을 잡고’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서 Boyz 2 men을 떠올리고 ‘R&B 가수들과 조끼의 상관관계’에 대해 토론하는 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와 한국의 대중 음악은 비슷하면서도 아주 다르기도 하다. 한국의 발라드 음악의 커다란 개성이 그 ‘한 맺힌 뽕의 기운’ 이듯이 네덜란드에도 ‘더치 뽕’이 있다. 단순히 언어 사용의 차이가 아니라, 근본적인 감성의 코어가 다르다고 느낄 때가 있다. 그 감성의 차이를 폭격 맞듯이 느낀 사건이 있다.
M과 한창 썸을 탈 무렵, 그가 메신저로 비디오 하나를 보냈다.
자세한 설명 대신 비디오 링크를 건다. (볼륨을 줄이고 비디오를 틀길 권장한다.)
나는 이 비디오를 보며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이걸 나한테 보낸 저의가 뭘까.
이게 말로만 듣던 악명 높은 유러피안 유머인가?
나와 그만 만나고 싶다고 돌려 말하는건가?
아니면 M은 사실 괴랄한 음악 취향을 가졌고 이걸 사귀기 전에 미리 알게된 게 조상신의 도움일까?
수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리다 일단 나는 그냥 무난한 ‘웃음 이모지’로 상황을 모면했다. 그냥 농담으로 신기한 더치 언더그라운드 가수 한 명 소개한거겠지, 한국에도 노라조나 싸이 같은 가수가 있지 않은가. 이후 M과 함께 즐긴 수많은 음악들 중 저 홍합맨 Mosselman 같은 기괴한 음악은 없었고, M은 마냥 건전한 청년이었다. 나는 저 음악을 웃긴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하고 기억 저편으로 묻었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네덜란드인에게 저 비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M과 사귀게 된 이후 M의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갔을때, 그 ’정상적이고 매우 평범하고 착한 시민들인’ 친구들이 온 집안을 울리는 잊을 수 없는 저 비트를 듣자마자 키벨링에 달려드는 갈매기떼처럼 일제히 튀어 올라 두 손을 들고 방방 뛰기 시작했을때, 나는 기억 저편에 묻어둔 질문들을 M에게 물어야만 했다.
이게 여기서 대중 음악이야?
그냥 너랑 네 친구들만 좋아하는 마이너 장르가 아니야?
진짜 진짜 일반인들도 이걸 듣고 좋아한다고?
어릴때 이걸 듣고 자랐다고???
그렇다.
핀란드에 키즈 헤비메탈 밴드인 헤비사우루스 Heavysaurus 가 있듯이, 네덜란드의 90년대 초딩들은 200-300 bpm의 슈퍼 하드코어 레이브-테크노 음악과 함께 자란 것이다.
여기에 증거를 제출한다. (볼륨을 줄이고 비디오를 틀길 권장한다.)
Vice 매거진에서 이 비디오를 인용하며 쓴 아주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덥스텝 따위는 뽀뽀뽀 송 정도로 들리는” 이 사운드를 들으며 나와 똑같이 문화 충격을 받은 글쓴이가, 나와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얘네 부모님들 대체 어디에 있어? where were these kids' parents?”
M은 이 질문에 대답해 줄 산 증인이다. M은 혹시라도 내가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런 음악만 만든다’고 글을 쓰거나, 음악 장르에 대해 애매하게 정의를 내릴까봐 걱정하며 많은 자문을 해주었다.
첫 째, 홍합맨Mosselman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보기에도 우스꽝스러운 뮤직비디오이다. 한국의 개그 콘서트처럼, 이상하기 때문에 웃긴 것이다.
둘 째, 저 음악들은 해피 하드코어 Happy Hardcore로서 ’어린이용’ 음악이다.
홍합맨 Mosselman의 가사 역시 건전한 어린이 동요 "드루어리 길의 머핀 맨을 아시나요 Do you know the muffin man"의 네덜란드식 버전의 패러디이다. 민머리를 한 하드코어한 외양의 남자가 "스헤베닝헌의 홍합 맨을 아시나요" 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보니, 과연 어린이들이 좋아할만한 영구와 땡칠이 감성이 홍합을 게걸스럽게 먹는 장면에서 느껴졌다. (그런데 촬영 장소는 스헤베닝헌Scheveningen 이 아니라 볼렌담Volendam이다.)
90년대 당시 네덜란드 메인 스트림 음악 씬을 점령한 하버 Gabber라는 장르의 서브 장르이다. 네덜란드 전역의 수 많은 키즈 파티/콘서트에서 이런 음악을 틀었고, 어린이들은 하이퍼 상태로 건전한(?) 비트를 즐긴 것이다. (물론 몇몇 불건전한 청소년들은 구석에서 MDMA 따위를 해대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저 비디오에 나온 아이들의 연령대를 보아하니 진짜 순수하게 음악을 듣고 춤을 추기 위해 모인 것이 분명하다. M에 따르면 나름 시청에서 직원도 보내 컨트롤 되는 상태의 파티였다고 한다. 하버나 해피 하드코어 파티에서 반드시 추는 춤을 하케Hakken라고 하는데 (혹은 하버 댄스라도고 검색하면 나온다.) M은 어린 시절 이 춤을 잘 추는게 그렇게 부러웠다고 한다. 하케를 잘 추면 학교 짱이 되는 것이다.
내가 어릴때 터보의 ‘검은 고양이’나 R.ef 의 ‘이별공식’ 같은 빠른 비트의 음악에 수련회의 모든 아이들이 광기 어린 춤을 춘것을 기억해보면, 아주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다. 물론 백 번 양보해서 생각해 본다면 말이다.
그러나 M을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질문이 나오는 것은 내가 근본적으로 이 감성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북서유럽의 아이들의 이 앵스트 Angst의 근원은 대체 뭘까?
확실히 한국의 초딩들보단 몇십 수 위의 거세고 험한 기운이 느껴진다.
유교 국가 출신으로서 방과 후에 얌전히 고무줄 놀이, 깡통 차기나 하고 지냈던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이 문화적인 갭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진다. 새해 전야제에 괜히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즈텍 사원 크기의 모닥불을 만들고, 길바닥에서 불꽃 다발을 폭발시키는 것이 아니다. 분명 이 나라 사람들의 유전자에는, 청교도적 윤리가 아직도 남아있는 네덜란드 현대 시민 사회에서는 해소가 불가능한 날 것의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
M은 옆에서 추억에 잠긴 채 이 비디오를 보다가 한마디를 했다.
“더치 DJ 들이 다 이런 시절을 거쳤겠지.”
네덜란드가 왜 테크노 장르의 강국인지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이렇게 확실한 테크노 조기 교육은 없을 것이다.
해피 하드코어 음악이 순한 맛, 어린이용 이라는 것은, 본격적인 성인용 하버Gabber 파티인 썬더돔 Thunderdome 파티 비디오를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볼륨을 줄이고 비디오를 틀길 권장한다.)
한국에선 도무지 흥할래야 흥할 수 없는 장르이지만 이때 음악을 만들었던 네덜란드 레이블의 주인들은 떼부자가 되었다. 파티 한 번 열때마다 2만명은 우습게 모이는 규모였다고 한다. 80년대엔 서브컬쳐였던 하버가 유독 네덜란드에서 주류가 되기 시작하며 여러가지 서브 장르도 파생되었는데, 마치 내 나이 또래가 '응답하라 1992'에 열광 했듯이, 현재 네덜란드 30대들도 파티에서 이런 비트의 노래를 들을 때 환호한다.
불행히도 하버 파티에서 약물을 오남용 하는 사람들이나, 네오 파시스트 들이 이 장르를 추종하기 시작하면서 하버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아마도 스킨 헤드나 운동복을 입는 스타일과 비트 자체의 공격성이 추종의 원인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많은 하버 프로듀서들은 네오 파시스트주의에 강력히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순수하게 하버를 음악과 비트로서 즐기는 사람들은 일체의 서브 장르를 비판한다. 해피 하드코어 역시 (코 묻은 어린 애들 돈을 뜯는 개그 수준으로 전락했다며) 하버 코어 팬들에겐 삿된 음악일 뿐이다. 하지만 애들이 뭘 알겠는가? 애들은 그냥 신나는걸 좋아할 뿐이고, 당시의 네덜란드 프로듀서들은 노다지를 발견한 것 뿐이다.
아무튼 90년대 네덜란드 메인스트림 음악을 평정했던 하버는 대세에 맞게 좀 더 세련되고 부드러워졌지만, 여전히 그 특유의 비트와 ‘더치 쌈마이’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이 비디오는 한 세대를 거치며 현시대로 넘어온 하버에 대한 향수가 느껴진다.
https://www.youtube.com/watch?v=BgA3zP5PmEY
해피 하드코어 음악들을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한 번 들어보았다. 어린 아이들의 강아지같은 에너지에 기가 빨릴대로 빨렸을 90년대 네덜란드의 부모들이, 해피 하드코어 파티에서 영혼을 다 바쳐 춤추고 천사처럼 잠든 아이들을 보며 얼마나 안도했을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어릴때 한국에 해피 하드코어가 유행했다면, 우리 엄마는 나와 언니가 마루바닥 한 가운데 가득 쏟을 식용유를 치울 일도, 거기서 알궁둥이로 미끄럼을 타느라 빨개진 우리 둘의 엉덩이를 씻길 일도 없지 않았을까?
p.s 당연한 사실이지만 한번 더 강조해서 쓴다. 네덜란드의 뮤직 씬에는 한국과 똑같이 수많은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혼재한다. 하버 Gabber는 90년대에 반짝 대 유행했던 장르이고, 해피 하드코어는 그 서브 장르이다. 요즘 네덜란드의 밀레니얼들은 이렇게 놀지 않는다는걸 다시 한번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