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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in Lowland Apr 24. 2020

갈매기는 항상 배가 고프다

네덜란드, 도시의 동물들 (1)


나는 도시의 동물들이 좋다. 전혀 다른 외양을 가진 생물인데도, 가끔씩 인간의 행동을 굴절된 거울을 보며 따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일때가 참 흥미롭다. 한편으론 희한한 동질감을 가질 때도 있다. 아무리 네덜란드의 생활에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아주 가끔씩은 길 한복판에서 내가 '외계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나와 다른 외양의 사람들이 가득한 길을 걸을때, 무리에서 이탈한 느낌에 약한 소름이 돋으며 나는 인간은 역시 동물이란 생각을 한다. 도시의 동물들의 의연함을 보며 속으로 묻는다. 도시에서 인간과의 공존을 택한 너희들은, 낯선 무리들을 보며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살까. 


갈매기는 헤이그나 로테르담 같은 해안가 도시에 많이 산다. 헤이그에 살 때, 갈매기는 낭만의 매개가 아닌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유독 기억에 남는 갈매기 에피소드 몇 개가 있다.


Tyrants, illustration by Min van der Plus, 2020.



1.


친구 J가 몇년 전 여름에 네덜란드에 놀러 왔을 때, 네덜란드의 피쉬 앤 칩스인 키벨링 (kibelling)을 바닷가에서 사먹었다. 정확히는 '몇 입 먹고 빼앗겼다.'


키벨링은 대구 류의 흰 생선 살로 만든 튀김인데, 감자튀김과 곁들여 갈릭 소스 knoflooksaus 나 라비뇨테 소스 ravigottesaus에 찍어 먹는다. 튀김 요리에 일가견 있는 나라 답게, 어느 가게에 가도 균일하게 맛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게는 해산물 전반을 판매하는 시모니스 Simonis 라는 곳이다. 일직선으로 뻗은 지평선을 바라보며, 정말 오랜만에 본 친한 친구와 함께 모래사장에 앉아 바닷바람을 쐬며 시모니스의 키벨링을 들고 있자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분위기에 취한 나머지, 무방비 상태인 우리 곁으로 어느새 약 40마리 정도의 날개 달린 깡패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악악!'

갈매기들이 소리 높혀 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 나와 J만 앉아 있었던 주변에 갈매기들이 가득했다. 이놈들은 한국 갈매기처럼 아담하고 귀여운 사이즈가 아니다. 작년에 부산에 갔을때 갈매기들이 너무 아담하고 귀여워서 깜짝 놀랐다. 헤이그의 갈매기는 유러피안 헤링 갈매기 (European Herring Gull) 종류이다. 크기는 성인 남성 팔뚝 만하고, 성질머리는 폭군 저리가라다. 인간으로 치면 앤디 루이즈 주니어 같은 헤비급 복싱 챔피언과 같다.


보통 새들은 인간이 다가가면 뻔뻔한 표정을 짓더라도 어쨌든 뒷걸음질을 치는것이 보통인데, 이놈들은 키벨링 냄새에 눈알이 이미 아득히 돌아버린 상태였다. 날갯짓을 펄럭 펄럭 해대는 폼이 이런 공갈 협박을 한 두번 해본 품새가 아니었다. 근처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느샌가 다 사라졌다. 멀리서 현지인들이 측은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이미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할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해변에 음식점은 많지만, 정작 모래사장에서 음식을 먹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J의 손에 있던 키벨링을 순식간에 한 마리가 낚아챘고, 곧 일제히 다른 갈매기들이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히치콕도 영국 해변에서 갈매기 무리에게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영화 '새'의 서스펜스가 공감각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때 J가 '으아아' 하고 달려나갔다. 먼 발치에 떨어져있던 쓰레기통으로 키벨링을 들고 뛰자 갈매기들은 순식간에 J를 뒤쫒기 시작했다. 정의감 넘치는 J는 이 도적 무리에게 공짜 음식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쓰레기통에 키벨링을 넣자 이제 공격의 타겟은 우리가 아닌 쓰레기통이 되었다. 하지만 갈매기들은 깊은 쓰레기통 안으로 부리를 넣을 수 없었고,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지 5초 후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하늘로 흩어졌다.  

갈매기들의 원칙은 철저하다. 네 키벨링은 내 것, 내 키벨링도 내 것.




2. 


patient seagull,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8


헤이그 안에 시모니스는 몇 군데 지점을 두고 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시모니스를 지나치던 어느 오후, 나는 한 갈매기가 우두커니 가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신기한 광경이다 싶었지만 가던 길이 바빠 곁눈질로 보고 지나쳤다. 그런데 20분 쯤 후에 다시 그 가게를 지나칠때, 같은 갈매기가 같은 포즈로 계속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설마 조각상인가 싶어서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든 말든, 갈매기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시모니스 안의 생선 진열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바닷가에서 본 무뢰배같은 갈매기가 아니었다. '내 한 점의 고기를 얻기 전까진 자리를 뜨지 않으리' 라는 의지가 꼿꼿한 두 다리에서도 보였다. 내가 가게 주인이었으면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먹이를 주자니 훗날이 두렵고, 먹이를 안주자니 저 무언의 호소에 죄책감이 들 것이다. 

오자서와 손빈의 인내가 이러했을까.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점잖게 가만히 기다리는 갈매기를 몇 분간 지켜보다가, 나는 이 사진을 찍었다. 이후로도 종종 이 갈매기 생각이 났다. 결국 원하던 키벨링 한 조각을 얻어냈을까, 아니면 빈 손으로 둥지에 돌아갔을까. 

이 갈매기의 후손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가 한 인간의 기억에 큰 인상을 남긴 비범한 갈매기였음을 널리 전하길 바란다. 




3.


Seagulls standing against the wind,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7

네덜란드의 먼 북쪽 섬인 텍셀 Texel로 가는 길. 모든 자동차는 여객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여객선 차고로 들어가기 위해 긴 행렬이 멈춰있었는데, 바람이 거의 태풍 매미 급으로 불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바람에 대해 예전에 글을 썼지만, 육지의 끝자락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체급이 아예 달랐다. 나와 언니와 형부는 바람의 세기에 질겁해서 흔들리는 차 안에서 버티고 있었는데, 창문 밖으로 이 갈매기 두 마리가 보였다. 

날개를 펴면 순식간에 100미터 밖으로 휩쓸릴 거센 바람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며, 두 갈매기는 정말 꿋꿋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아마 관광객들이 주는 먹이를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5초에 한번씩 발걸음을 떼던 그 갈매기들이 이윽고 우리 차 바로 옆으로 왔다. 자, 우리의 퍼포먼스를 봤으니 이제 먹이를 내놓아라. 뻔뻔하고 간절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갈매기들이 너무 웃겨서 나는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맞바람에 온 몸이 흔들리면서도 용수철처럼 계속 서 있는 모습에 경외감마저 들었다. 형부가 과자를 주려고 했지만 바람에 멀리 날아가버렸다. 이윽고 자동차들이 여객선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이 갈매기들이 과연 사냥(?)에 성공했는지 알지 못한다.


네덜란드에서 확실히 느낀 것 한 가지.

갈매기는 항상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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