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커플의 언어 공부- 나의 더치 입문기
네덜란드에 도착하기 전, 나는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에서 네덜란드 만큼 영어를 일상적으로 쓸 수 있는 나라는 없다고 들었다.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에서 주최한 유학생을 위한 세미나에서도 '영어로 일상 생활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했다. 학교 수업 역시 영어로 진행될 것이고, 더치는 현지에 가서 천천히 배우면 된다고 KABK에서도 안내했다.
그렇게 나는 hoi(호이, hello), doei(두이, good bye), 그리고 Dank u wel (당큐뷀, Thank you의 존대어)만 외운 채 네덜란드 행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 다음 날, 세탁 세제와 음식을 사러 슈퍼마켓에 들른 나는 바로 난관에 직면했다. 내가 기대한 '일상적인 영어 사용'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당연히 국어가 영어가 아니라 더치인데 뭘 기대한거냐 싶지만, 출국 전 네덜란드의 영어 사용에 대한 감탄만 접했던 나는 아마도 유럽 대륙을 여행하는 식견 좁은 미국인처럼 '모든게 영어로 안내되어 있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그때 핸드폰 심카드도 없어서 구글 번역기를 쓸 수가 없었다. 물론 야채나 과일이나 빵 정도야 나도 눈이 달려있으니 살 수 있었지만, 세탁 세제는 달랐다. 세제들이 모여있는 듯한 섹션에 들어섰지만 비슷비슷한 그림과 로고 때문에 5분 넘게 나는 아무것도 고를 수가 없었다. 제품 뒷면의 설명란에는 영어도 더치와 함께 쓰여있겠지 기대하고 읽어보았지만, 영어 대신 독어와 불어가 쓰여있었다. (인접한 독일과 벨기에의 영향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가장 '세제 같아 보이는 그림'이 그려진 병을 집어들고 마침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이거 세탁세제 맞아? 그리고 그 사람은 신뢰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맞아.
집에 와서 알았다. 내가 산 것은 세제(Wasmiddle)가 아니라 섬유 유연제(Wasverzachter)라는 것을.
네덜란드에서 더치를 구사하지 못한다면 '숨쉬고 살 수야' 있겠지만, 세제도 제대로 못 사는 반 쪽 짜리 인생을 살게 될 거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식료품과 생활필수품, 식당 메뉴판의 재료들을 달달 외웠다. 먹고 살기 위한 인간의 생존 본능이란 이런것이다.
물론 7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더치 구사 수준은 정말 기본적인 회화 그 이상을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지금보다 더 더치 초보였던 시기에, 영어에 익숙한 한국인의 관점에서 인상적이었던 더치의 요소 몇 가지를 떠올려본다.
한국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알파벳'을 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영어식 알파벳으로 발음을 치환하게 된다. 불행히도 이것은 더치 공부에 매우 방해가 된다. 네덜란드 어의 많은 부분이 영어와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그건 글자를 눈으로 읽었을때나 도움이 되지 회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1. 'G'
내가 공부한 도시 '헤이그 The Hague'는 영어식 이름이다. 더치로는 Den Haag인데, 한국인들이 이 발음을 한국어로 쓸때 두 가지로 갈린다. '덴 하그' 던가 '덴 하흐'던가.
한글로는 저 긁히는 듯한 G발음이 표현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ㄱ 과 ㅎ 의 중간 발음이 목구멍 중간부터 목젖 위를 긁듯 나오는 소리이다. 물론 지방마다 G의 발음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다. 남쪽 지방으로 갈수록 G의 발음이 ㅎ에 가깝게 더 부드러워진다. 헤이그의 또 다른 더치식 이름은 's-Gravenhage 인데, 이쯤되면 Den Haag는 양반이다. '스크흐하버하ㄱ헤'. 이걸 발음하고 사는 나를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반 고흐 van Gogh'는 '반 ㄱㅎㅗㄱㅎㅡ'라고 발음한다. 영미권 사람들 역시 g 발음에서 헤매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영국 퀴즈쇼 QI에도 이 난해한 발음이 소개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2YU87AqDcU)
2. 'R'
혀가 떨리지만 스페인어처럼 적극적으로 앞쪽 혀를 떠는 r발음은 아니고, g 보다는 목젖을 덜 긁으며 ㅎ소리가 조금 더 나는 미묘한 발음이다. 지금 내가 사는 도시는 '로테르담 Rotterdam' 은 'ㄹㅎㅗ터 ㅔㄹ흐담' 에 가까운 발음이다. r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발음이 아니지만 다른 글자와 섞어 발음할때 문제가 된다. r과 g가 붙어 있는 Margreet 같은 이름은 나는 아마 평생이 걸려도 정확하게 발음할 수 없을 것이다.
3. 'ij'
ij는 더치 단어에 매우 자주 쓰인다. Wijn, mijn, anzijn, tijd 등등.
J 가 영어처럼 'ㅈ' 발음이 나는 게 아니라 '여 와 예'의 중간정도 발음으로 난다. (이 때문에 '정 진희'같은 정상적인 한국 이름이 네덜란드에선 갑자기 '융읜히' 같은 기괴한 발음이 되고 만다.)
ij는 '에이'와 '아이'의 중간정도 발음이다. 예를 들어 'mijn'은 '마인'과 '메인'의 중간으로 발음하는 식이다.
한국에서 서양 근현대 미술사를 배울때 몬드리안의 이름과 함께 반드시 나오는 '데 스틸 De Stijl' 운동이 있다. 누가 처음 번역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데 스테일'로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4. 'u'와 'ui'
미국에 사는 언니가 헤이그에 놀러 왔을때, 중심가 'Spui'를 '스푸이' 라고 읽는 것을 보고 '역시 나만 저지르는 실수가 아니야'라고 안도했다.
더치의 'u'는 영어의 '우'와 다르게 발음된다. '우'와 '위'의 중간 정도인데, 나는 ''위'가 방귀를 뀌다 말았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어중간한 발음이라는 소리다.
'ui'는 그래서 '우 ㅣ 이'가 되냐고?
아니올시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아우 ㅣ' 가 된다. 'Spui' 가 '스파우 ㅣ'가 되는 것이다. 간혹 한국 뉴스에서 헤이그의 미술관인 Mauritshuis를 '마우리츠 하위스'라고 쓸 때가 있는데, 나는 '마우리츠하우스'라고 쓰는게 맞다고 생각한다.
더치 발음의 규칙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실제 발음을 구사하는 것은 (어느 언어나 그렇듯이) 아주 까다롭다. M의 한국어 발음이 나의 더치 발음보다 백만배 더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분할 뿐이다.
공식적인 왕 초보 더치 수업을 들을 때 본격적인 문화 충격을 받았을 때가 바로 시계를 읽는 법을 배울 때였다.
예)
저녁 같이 먹을래? 언제 만날까? 여섯시 반 어때?
영어권에 익숙한 사람이 'half six' 라고 하면 '여섯시 반' 이다.
그런데 네덜란드 어로 똑같이 'Half zes' 라고 하면 그것은 '여섯시가 되기 30분 전'이다. '다섯시 반' 이 되는 것이다. 당신은 이미 약속에 한시간이나 늦은 진상 친구가 되었다.
그러면 '다섯시 삼십 오분'은 어떻게 말할까? '
'vijf over half zes (여섯시가 되기 30분 전에서 5분이 지났다)'.
귀찮기 그지 없다. 왜 이렇게 네덜란드 사람들은 5분 단위로 시간을 끊는 것을 좋아하나?
5시 15분도 vijfteen (15) 대신 Kwart(1/4) 를 쓴다.
한국의 어느 누가 '다섯시 정각에서 사 분의 일이 흘렀다'고 말할까.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들은 오전 오후를 구별하는 am 이나 pm을 쓰지 않는다. 굉장히 헷갈려하는 친구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나는 시간 약속 문자를 보낼 때 국제 스파이가 된 마냥 24시간 기준으로 쓰는 버릇이 생겼다. 저녁 7시 반을 19:30 이라고 쓰면 세상 누구도 헷갈릴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영어를 부모님 덕에 쉽게 배웠다. 어릴때 잠깐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내 영어 학습을 엄청나게 도와주었는데, 단점이 있다면 문법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도 '전치사'나 '관사'가 무엇인지 헷갈리는 내가 생전 처음으로 문법을 배우게 된 것이 바로 더치를 통해서이다.
불어처럼 남성형/여성형 명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동사 변화 역시 독일어에 비해선 비교도 안되게 쉽다. 하지만 문법에 대한 기초가 (한국어로도) 아예 없는 나에게 더치 문법 공부는 요리 초보에게 미슐랭 쓰리 스타 짜리 분자 요리를 만들라 요구하는 것과 같았다.
원형의 동사가 시제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할때, 영어와 더치의 분명한 차이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규칙이 있는 듯 하면서 없다. 어디까지나 '영어에 익숙한 한국인'인 내 기준으로, 더치는 발음이 어중간한데 문법 마저 어중간해서 속이 후련하지가 않다. 언뜻 보기엔 규칙이 있고 쉬워 보여서 '금방 외우겠지'라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짜증나게 소극적으로 불규칙적인 동사 변화들에 화가 치밀기 시작한다. 차라리 아예 다르기라도 하면 외우기 쉬울 것 같다. '영어에 버릇없이 길들여진 spoilded’ 나는 왜 '걷다 lopen' 이 과거형이 될때 'liep'가 되고 현재 완료형이 될때 다시 gelopen이 되는건지, 그리고 왜 이렇게 예외가 많은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looped'로 퉁치면 안되는건가?
동사 변화의 perfectum과 imperfectum으로 예문을 써야하는 숙제를 하던 날 내 스트레스는 최고조로 치달았다. 6시간을 연달아 연습했지만 도무지 감이 잡히지가 않았다. 나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M을 보자마자 엉엉 울었다. 내 돈 내고 내 시간 쓰면서 굳이 이런 고문을 당해야 하나, 한참을 징징대던 나를 위로하던 M은, 학원에서 돌아오는 나를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해놓았다. 포스트잇으로 집 안 가구 하나하나마다 더치를 써놓은 것이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멍청한 것 같다고 자학하던 나는 M의 고마운 마음 씀씀이에 다시 기운을 차렸다.
네덜란드어는 싫지만 M은 좋으니까, 좀 더 힘내보자고.
네덜란드에서는 영어가 분명 매우 일상적으로 쓰인다. 7년이 흐를 동안 솔직히 말하자면 네덜란드인들의 영어 구사력에 내가 너무 '오냐오냐' 살았다고 생각한다. 독일로 유학간 친구들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한 해 두해 지날수록 유창한 독어를 구사하는 것에 새삼 내 모습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 역시 어느새 내 생활속으로 젖어든 더치를 느낄때가 종종 있다. 유럽 안의 다른 국가를 다녀 올 때 특히 그렇다. 독일에서 네덜란드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누군가의 말소리를 듣고 '저 사람 더치야!' 라고 반가움을 느낄 때. 아이슬란드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더치 할머니와 더듬더듬 더치로 이야기를 했을 때.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돌아왔을때 헤이그 트램 안의 안내 광고가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에 안도하며, '집에 왔다' 라고 느낄 때. 바로 며칠 전에는 M에게 'plastic bag'이 생각이 안나서 'plastic zakje'를 달라고 무심코 말하고서, 더치 초보 주제에 교포처럼 말한다고 마구 웃었다.
M과 나의 언어의 오작교는 영어를 쓰는 까치들 덕분에 유지되고 있다. 언젠가 한국어와 더치를 쓰는 까치들이 이 무리에 합류해서 더 크고 풍성한 다리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