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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 in Lowland Apr 17. 2020

너의 언어, 나의 언어 (1)

국제 커플의 언어공부 - M의 한글 입문기


War of the languages. illustration by Min van der Plus, 2020.



M이 어느날 나에게 '한국어 수업에 등록했다' 고 신이 나서 말했다.


'네가 살아온 문화에 대해 더 많이 알고싶어, 그리고 나중엔 꼭 너의 부모님과 한국어로 이야기 할꺼야.'


귀여운 M! 천진한 야망을 말하던 그때를 떠올리니 글을 쓰면서 웃음이 나온다. 나나 M이나 영어로 소통하는데 전혀 문제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M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동아시아 문화에 대해 전혀 익숙하지 않고, 한국에서 살 생각도 없는 그가 순전히 나에 대한 '팬심'으로 한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 아닌가.


사실 (팔불출같이 들리지만) M이 한국어에 재능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이전에도 종종 한 적이 있다. M과 대화를 할때 나는 가끔 장난삼아 한국어로 '그래요?' 라고 대답했는데, M이 어느날 나를 냉큼 따라해 보지 않는가. 그런데 발음이나 억양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내심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림버그의 리드미컬한 억양이 곁들여져 표준어 '그래요'보다 좀 더 구수한 '그려~?'에 가까워졌는데, 그 네이티브 충청도민스러운 발음에 내 엄마가 듣고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이러다 몇 년 뒤에 비정상회담에 출연시키면 되지 않을까? 나는 제 2의 로버트 할리가 되어 '한 뚝배기' 대신 '그려'로 광고를 찍는 M의 모습을 그려보다가, 아역 배우들의 극성스러운 엄마는 이렇게 각성한다는 것을 깨닫고 망상을 멈추었다.


아무튼 M은 그렇게 가나다 에 입문했다.

M의 공부 과정에서 쏟아져나온 질문들은 한국어 원어민인 나에게 너무나 신선했다.


M의 한글 공부 1,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9.

 

내가 아랍 문자나 타이 문자를 볼때 '이거 다 같은 모양 아닌가?' 라고 생각하듯이, M에겐 한글이 그랬다.

한글의 모든 것이 M에게는 낯설음의 연속이었다. ㅂ와 ㅋ와 ㅍ를 구분하는 것이 힘들었고, ㅈ과 ㅅ역시 종종 헷갈려했다. ㅎ와 ㅊ 같은 글자를 쓸때는 사람이나 폰트에 따라 맨 윗쪽 획이 아랫쪽 획에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데, M은 이걸 다 각각 다른 글자라고 인식했다.


나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자음과 모음이 합쳐진다'는 개념 역시, M에겐 혼란을 가중시켰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ㅏ,ㅑ,ㅗ,ㅛ는 왜 '아, 야, 오, 요'라고 발음해?

ㅜ 에 막대기 하나를 더하면 ㅠ 인데, 왜 발음이 '유' 가 돼? ''우우' 나 '우-'가 아니라?

ㅇ와 ㅗ를 더하면 '오' 인데, 거기에ㅣ를 더하면 '외'로 발음하잖아. 왜 '오이'가 아니고 '외' 인거야?

그리고 다른 글자인데 왜 '외'와 '왜'와 '웨'는 같은 발음이야?


가장 인상깊었던 질문은 '대체 ㅇ 의 존재 이유는 뭐냐'는 것이었다. ㅇ이 없어도 어차피 'ㅏ'는 '아'로 소리나고 ㅗ는 '오'로 소리가 나니까, ㅇ이 굳이 없어도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솔직히 나 역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 왜일까.


'그렇게 쓰는게 더 예뻐서' 라는 무식한 대답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유치원에서 왜 나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ㅇ'은 목구멍에서 나오지만 존재하지는 않는 소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알고 있긴 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개념 역시 나도 확실하게 알고있지 않았다. ㅇ은 다만 거들 뿐인가? 그것이 ㅇ의 사명인가?

나는 M의 혼란을 해결하기는 커녕, 함께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다이빙 했다.


(이응 음가 라고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전문적인 지식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걸 영어로 번역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결국 나는 설명을 포기했다. 미안해 M.)




어쨌든 한 달이 지나 슬슬 M의 한글 읽기도 걸음마 단계를 막 지날 즈음, 새로운 난관이 생겼다.

바로 숫자 세기 였다.

M의 한글 공부 2,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9.


한국어로 숫자를 세는 방식은 두 가지다. 한글 고유어인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한자어인 일, 이, 삼, 사.

M은 '하나 연필 이 개 주세요'가 왜 정답이 아닌지, 왜 '우유 셋 잔'이나 사과 둘 개'가 아닌 '우유 세 잔'와 '사과 두 개'로 써야 하는지, 숙제를 하며 나에게 물었다.


그러게, 왜일까.


나는 내가 질문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이제껏 순 대충 살아온 것이다.


누군가 국립국어원에 똑같은 것을 질문했길래 답변을 보았다.


따로 규칙이나 법칙이 있지는 않습니다. 모든 맥락을 다 아우르기는 어려우나, 크게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을 안내해 드립니다. '하나/둘/셋'은 고유어, '일/이/삼'은 한자어라는 데에 차이가 있으며, '다섯 살/오 세'와 같이 고유어는 고유어끼리,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어울리는 양상이 있습니다. 또한 '5 대'를 '오 대'보다는 '다섯 대'라고 하듯이 보통 작은 수로 단위 명사와 쓰이는 경우 한자어보다는 고유어를 쓰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러나 '85 대'와 같이 그 수가 비교적 큰 경우 '여든다섯 대/팔십오 대'와 같이 둘 다 자연스럽게 쓰이기도 하며, '100'이 넘어가는 경우에는 보통 한자어(백팔십오 대)로만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또한 한자어인 '일/이/삼' 등은 그 수의 크기나 뒤에 오는 말에 따라 표현이 달라지지는 않으나, 고유어는 '스무 대, 스물한 살'과 같이 '스물'이 '스무'로, '하나'가 '한'과 같이 수사에서 관형사로 그 품사나 형태가 바뀌기도 합니다. 수 표현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관련 서적, 논문 등의 설명을 참고하실 수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결국 결론은 '그냥 외우세요' 아닌가. (게다가 참고할만한 관련 서적이나 논문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더치를 공부하며 그 불합리한 규칙에 얼마나 치를 떨었던 적이 많았는지.

하지만 나 역시 마이클에게 내 더치 선생님들과 똑같은 대답을 들려줄 수 밖에 없었다.

그냥 외워.

가끔은 까라면 까라는게 더 편할 때도 있는 것이다.




또 한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이, 외국어 발음을 한글로 쓰는 것을 어려워 하는 것이었다.

M의 한글 공부 3, photo by Min van der Plus,  2019.


한국인들이 일본사람들은 McDonald's를 '마쿠도나루도'라고 쓰고 읽는 것을 신기해하듯이, 나의 네덜란드 남편은 한국사람들이 '맥도날드'라고 쓰고 읽는 것을 너무나 신기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외국어 단어를 어느 부분에서 끊어서 한 음절로 표기하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를들자면 '마이클 조던'의 Michael'을 한국어에선 왜 '마' '이' '클' 로 분리하는가? M의 머릿속에서 Michael은 그냥 그 자체로 한 음절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M은 'ㄱ'과 'ㅋ', 'ㄷ'과 'ㅌ', 'ㅈ'과 'ㅊ'의 발음을 단어 속에서 구분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거기 갔어?' 라고 한국어로 말하면 '커기 카써?' 라고 들리고, '귤'이 '큘'로 들리는 것이다. 게다가 본인이 이 문제를 인식하지 시작하면서부터는 실제로 'ㅋ'으로 써야하는 단어들을 일부러 'ㄱ'으로 쓰기 시작했다. 윗 사진처럼 '콜라'를 '골라'라고 쓰거나 '커피'를 '거피'라고 쓴 것이 그 때문이다. 지식의 저주가 마이크로 스케일로 나타난 셈이다.



M은 약 네 달간 열심히 수업을 들었지만 점점 외워야 하는 단어가 늘어나면서 즐거움이 스트레스로 바뀌었다. 요즘은 잠깐 쉬면서 내가 가르쳐주는 새로운 단어들을 천천히 배우는 중이다. '공주님', '왕비님', '저는 슈퍼마켓에 가요' 등등 철저히 내 구미에 맞춘 한국어를 그래도 순순히 익혀주는 M에게 고마울 뿐이다. 요즘은 한국 드라마 하나를 보더니 '아이고'를 배워서, 설거지를 시키면 '아이고'를 구슬프게 뽑는다.


숨을 쉬듯 당연했던 나의 언어가 누군가에겐 이렇게나 이질적인 모험이 된다. 언어의 동굴을 이렇게 파고 파다 보면, 언젠가는 한 지점에서 우리가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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