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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osh Dec 07. 2020

날 보살피는 손에 적의를 드러내지 않길

비루한 삶의 잣대로 공평함을 논하지 말라


2020.10.05 말씀묵상 
[18:21-25]
21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가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모든 율례를 지키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면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22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행한 공의로 살리라
23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범한 허물과  지은 죄로 죽으리라
25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

탕부하나님이라는 책을 읽고있다. 하나님아버지에게는 잃어버린  아들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 맘대로 살기위해 하나님을 떠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곁에 남아있는  같지만 마음은 떠났다. 하지만  둘의 공통점은 같았다. 하나님아버지의 존재에 불만을 품었다는 ,  자리에 자신을 놓고싶어했다는 것이다.  아들을  아버지 비유를 들은 바리새인들은 경악한다.  율법을  지킨 자기들은 구원받을 가능성이  적다는 말인가. 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예수그리스도의 존재자체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자기의] 무서움이다.

사실 일반사람들이 보기에 두아들을  아버지 비유도 그렇고 오늘의 본문도 불합리에 보이긴한다. 인간적으로 볼때, 평생을 선한일을 하다가 억울한 마음이 들어 나쁜일을 하게 되는 것과 평생을 나쁜일을 일삼다가 돌이켜 착한 일을 한번 하는 , 어느 쪽이  나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본문은 아무리 지독한 악인일지라도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그가  죄로 인하여 심판받지않고 용서를 받을  있다고 말한다. 반대로 평생을 착한일을 해왔더라도 막바지에 죄를 짓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을 하게 되면 용서받지 못한다고 말한다. 아다르고 어다른  같은데 뭔가 불합리해보인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본문에서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말씀의 청자는 분노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건 불공평한 말씀이다. 라고. 주님은 공평하지 않다 라며 불합리함을 토로한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 걸까? 우리가 착각하고 놓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 대화를 이어가다보면 이미 담론 안의 함정에 빠져서 근본적인 오류를 간과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또한 그렇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경험에 입각한 나름의 법칙들을 느낀다. 그러나 근본적인 물음,   그자체에 대한 의문을 간과해버린다.  결과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삶의 결과를 놓고 탓할  없는 상대를 탓하며 인생을 탕진해버린다. 인생은 공평한가, 부조리한가?  규칙은 누가 정하는가?  가치는

내가 의롭다, 나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죄의 기준을  자신에 신념에 기초하여 저울질하는 행위다. 그런 시도가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앞에서는 모두 무용한 것이다. 나는 하나님에게 따져묻는다. 그렇게 행하시는 것은 불공평한 것입니다. 1994년도에 대한민국의  가정에 태어나 올해로 27살이  남자에게 불공평함이란 무얼까? 삶의 진실에 잣대를 들이밀기에 우리 개개인의 삶과 신념은 너무나 비루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앞에 자신을 위해 변론하고 잘잘못을 따지는 태도를 지닐  부터 나에게서 선한 영이 자취를 감춘다는  있다. 관계의 속성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시나브로 변화가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굉장히 많이 국면이 달라지는 패턴 말이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도 그렇다. 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하나님과, 내가 그런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때는  모른다. 그러다 하나님에게로 향했던 초점이 다시  눈앞의 현실과 나의 삶에 맞춰진다. 조금씩 이기적인 생각이 나를 채우더니 종국에는 내가  죄인이며, 내가  하나님을 섬겨야하는지 모르겠다며 따지고 원망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 모든 변화가 겉보기엔 갑자기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나 아주 서서히 그리고 교묘하게 일어난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고 공평하신 분이라면 문제는 나에게 있다. 내가 죄인이라서 그런 것이다. 내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의 손을 물지 않기를 바란다.  죄가 나를 어둡게 만들어서 나를 구원해준 생명에게 노를 쏟아내지 않기를 기도한다. 여태까지 나는 많이 그런 삶을 살았지만, 그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누군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할때  슬펐던 기억이 있다. 그녀는 신이 있다고 믿는게 자기한테 이득되는 것이  하나 있다고 했다. 자기는  총으로 칼로 신을 죽인다고 했다. 마음속으로. 신은 죽지 않으니까  죽일  있다고 했다. 그녀는 아마도 기독교집안에서 자랐던 모양인데, 자기 삶이 평탄하지 못했고 너무 힘든 일들이 많아서 신이 그런 일들을 가만히 방치해뒀다는데에 기가질렸다. 그래서 그런 행위들을 하고있다고 말했다. 듣고서  착한 사람인데 그런 스스럼없는 말을 하는 것이 매우 슬프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미를 아마도  모를 것이다. 그를 위해 기도하고 싶었다. 그리 깊이  아는 관계도 아니었지만

내가 하나님을 원망하는 불행하고 슬픈 삶을 살지 않기를 주님앞에 기도한다. 매일매일, 죄로 빚어내는 처참하고 슬픈 삶의 운명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조금만이라도  닮을  있기를 바라면서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자. 살아 있는 매순간이 객관적으로 어떤 모습이든 주님 앞에 감사를 올려드릴  있는 복받은 삶을 허락해주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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