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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osh Jan 04. 2021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

어느 누구도 대놓고 주님을 거스르진 않는다


2020.10.22 말씀묵상
[살전5:16-22]
16 항상 기뻐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갑자기 문득  생각은, 우리가 짓는 죄에 패턴이라는  있다면, 그리고  프로세스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먼저 죄질을 가를  있는 물음이 있다.
그것이 주도적인 범죄함인가, 수동적인 범죄 함인가. 

보통 예수님을 깨달아 알게  사람이 짓는 죄의 패턴과 방식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주도적인 범죄란, 내가 주님을 반역할 것이다 마음먹고 저지르는 것으로, 무슨 프리메이슨이나 되지 않고서야 적그리스도를 자칭하며 덤벼들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후자는 보통 어떻게 이루어질까. 유혹이 왔을  이겨내지 못하고 넘어가는 범죄가 떠올랐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혹이 온다는 것과, ‘이기지 못하는취약함이다.

사실 인류의 시초이자  범죄자들이었던 아담과 하와 역시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을 정면으로 반역하고자 선악과를 따먹은 게 아니다. 그들은 평소에는 선악과라는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뱀이라는 사단적 존재의 적극적인 개입에 범죄함으로 미끌어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동산에 하나님이 그들을 찾으실 때, 그들은 책임을 남자에게서 여자로, 여자에게서 뱀으로 이관하기 바빴다.
그렇다면 그들은  뱀의 유혹에 넘어갔을까?

적극적으로 주님을 배반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아담과 하와는 결국 죽음에이르는 원죄를 범하게 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자 열심히 노력하다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다. 범죄의 뿌리를 찾다 보면, 공통적으로 어떤 종류의 권태와 현상유지의 습성이 있다.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다. 그것은 흔히 우리 인간관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진부하지만 연인관계를 떠올려보자. 연인이 최악의 결말,  이별을 하게 되는 프로세스를  들여다보게 되면, 그곳엔 반드시 갈등이 있고 권태가 있다. 갈등이 반복되면 갈등을 유발하는 상대방의 존재에 대해 권태를 느낀다. 권태가 연장되다 보면 사소한 일에도 갈등이 유발된다.  두 가지는 서로 유기적으로 반복되며 관계를 해친다. 그렇다면 권태란 무엇인가? 서로의 존재에 대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관계의 현상유지 내지는 지속, 연장 상태라고   있다. 부부는 정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관계의 지속이  설렘과 떨림일 수는 물론 없을 것이다. 거기엔 따뜻한 정과 친밀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잖이 결혼생활  불륜을 유발하는 부정적인 관계의 지속성 또한 존재한다.

우린 사람인지라, 자꾸 기존의 관계나 존재를 잊고 새로운 것을 갈망한다. 관계를 소모해버린다고나 할까. 하나님의 사랑도 쉽게 잊으니 사람의 관계는 어떠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관계를 회복할  있을까? 관계를 소모하는 일도 관계를 회복하는 일도 결국엔 마음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묵상해야 하는 게 아닐까.  말씀을 읽고, 같은 말씀 구절에서 이전과 다른 의미를 찾고, 오늘의  삶에 적용할 경건과 거룩을 배우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기쁨도 잠시, 좌절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기도를 쉬는 순간 육체의 정욕이 나를 휘감을 것이다. 범사에 감사할 일을 찾다가도 범사에 불평불만이 가득한 일이 많다고 느껴질 때가 불쑥 온다.  그럴까? 내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배반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지 않았는데도,  나는 점점  하향하는 포물선을 그리며 죄로 떨어지는 걸까.

하나님을 향해 깨어있는다는 것은 어쩌면, 신앙이라는 영적 관계에서 끊임없이 권태에 빠지는  자신의 태도를 고치는 일이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유혹이 올 때 넘어가는 이유는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정의가 현재  삶에서 체감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 인지적으로 정의내린  뿐이다. 실제로는 전혀 새로움을 느끼지 못하는 상대를, 나의 사랑, 나의 연인이라고 정의해봤자 그런 인식적 속임수는 금방 들통이 나버린다. 언제? 유혹이 올때.  나은 상대를 찾은것만 같을 .  나은 관계가 나에게 찾아올 .  나은 조건과 환경이 나를 둘러쌀 . 나는 기존의 관계를 포기해버리고 다른 사람, 물건, 우상, 신앙을 찾는다.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까지 내가 온전히 흠없는 주님의 신부로 준비   있는 방법. 넘어지지 않는 방법, 그것은 나의 고민과 태도를 바꾸는 일에서 시작할  있을 것이다. 관계는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떠올려 감사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해 다각도로 살펴보고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달콤한지 묵상해보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그분의 얼굴에 어떻게 하면 기쁨을 드릴  있을지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얽힌 죄의 실타래를   있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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