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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osh Mar 19. 2021

아주 긴 묵상

묵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주 긴 상념 끝 고백


2020.11.18 말씀묵상 (아니 상념)


[대상9:28-32]

28 그 중에 어떤 자는 섬기는 데 쓰는 기구를 맡아서 그 수효대로 들여가고 수효대로 내오며

29 또 어떤 자는 성소의 기구와 모든 그릇과 고운 가루와 포도주와 기름과 유향과 향품을 맡았으며

30 또 제사장의 아들 중의 어떤 자는 향품으로 향기름을 만들었으며

31 고라 자손 살룸의 맏아들 맛디댜라 하는 레위 사람은 전병을 굽는 일을 맡았으며

32 또 그의 형제 그핫 자손 중에 어떤 자는 진설하는 떡을 맡아 안식일마다 준비하였더라


레위자손들 중에 각자 다른 역할을 감당하는 이들에 대하여 나온다. 레위자손은 하나님에게 특별히 선택을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의 기업이라 불리기에 그들의 일은 다른 자손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 일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대단한 일이 아닌 것들이었다. 각자의 재능과 특기를 살려 그 자신이 드러나는 일이라기보다는 그저 묵묵히 수행해야하는 과업같은 것이었다. 신앙이라는 것의 속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은 내가 무엇을 해서 인정을 받는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그 방향이 다르다. 내가 무엇을 해서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지 라는 말은 그 근본이치부터가 잘못됐다. 조금 옛날에는 그런 삶이 신앙의 합리적이고 궁극적인 목표라고 신앙공동체에서 떠받들여졌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지금이라서 다른걸까?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영에 이끌림받아 쓰임을 받았고, 곧 버림받았다. 아니 그들이 버림받은 것인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것인가.


나는 한국교회가 망해갈 때, 신앙의 중심에서 역사를 일으키던 단체의 중심사역자로 활동했었다. 한국교회가 망해간다는 얘길 무슨 근거로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한국교회의 다음세대가 보이지 않을 때 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같다. 다음세대 즉, 청소년 청년세대의 복음화율이 바닥을 기고있을 때다. 지금은 당연히 더 나쁘다. 그런 복음의 불모지인 상태에서 가히 혁신적이라고 부를만한,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단체에 속해있었고, 나역시 주님의 이끄심을 따라 사역을 했었다. 교회가 아닌 시청광장 이라는 공적인 장소에서 5만명의 무리가 하나님을 찬양했다. 정말로 고무적인 장면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그 대회는 취소되었고 그 역사의 최선봉에 있던 리더는 한낱 성범죄자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함께 몰락했다.하나님이 그를 버렸나, 그가 하나님을 버린것인가. 역사를 만들어내던 그 단체를 하나님이 버리신 것인가, 그 단체가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인가.


어느쪽으로 설명해도 말이 되긴한다. 하나님이 버림받으시는 분인가, 하나님은 가장 존귀하신 분이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인데, 어찌 버림을 받을 수 있는가.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과는 상반된 방향으로 돌이키게 된 것은 사역의 중심에 서있던 사람이고 그들이 지은  죄 때문일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죄인가. 무엇이 그렇게 큰 문제인가? 신앙행위의 근본은 자기부정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성을 끊임없이 기꺼이 지워내려고 한다. 거기엔 어떤 보상심리가 깃들 여지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 관계에서 이미 수지계산이 다 끝났기 때문이다. 그 이상을 비집고 나오는 자아나 감정의 잔여물은 결국 죄의 소산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하나님의 사역이 주는 감동과 역사가 너무나 컸다. 한 눈 팔수 있다. 그러나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너무 멀리갔을까. 나의 목소리가 너무 커졌던게 아닐까.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있는 사람의 권위가 너무 높아졌던게 아닐까. 받는 관심과 말하는 목소리, 거기에 따르는 인정이 너무나 달콤했던 탓일까. 보상심리를 넘어서 이미 사역의 주체로 세워진 사람들의 공로가 너무 커져버렸다. 그렇게 무너져내렸다. 사역이 아니라 바벨탑을 쌓은 꼴이 되었다.


레위지파는 오랜 세월동안 얼마나 무수히 많은 제사집행을 했을까. 성경은 이미 그들의 존재를 통해 묵시한다. 신앙행위의 근본이자 종착지는 빛도 소리도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 그리고 밀알이 되어 썩어서 사라지는 자리. 그리고 그 자리에 다시금 새로운 생명들이 피어날 수 있도록 하는 자리라고. 레위지파는 자아가 없었을까. 사람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고 표현하며 살아가도록 설계되어있다. 다른 이들의 인정에 목말라하며, 그것을 얻기위해 기꺼이 메마른 땅에 삽질을 하게끔 되어있다. 그건 어떤 창조적인 도전이 되기도, 동시에 비극이 되기도 한다. 1인칭 스스로가 채워내는 자아존중감이라는 것이 너무도 빈약해서 우리는 공동체이자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고 그 안에서 자꾸만 외부로부터 오는 칭찬을 갈망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내가 오롯이 존재할 수는 없다. 나는 너의 인정으로부터 존재를 확인받는다. 라고 말한다. 숨쉬듯 당연한 인간의 본성은 어찌보면 죄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무엇이 사람을 본디 아름답게 창조된 목적에 걸맞는 형상의 행위라고, 무엇을 감히 창조주를 반역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만드는 위험한 도발의 행위라고, 그렇게 판가름 할 수 있을까. 한낱 사람인 나로서는 묵상을 하면서도 도저히 판가름 할 수가 없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 된다.


오직 성령이 하신다는 것만은 알고있다. 이름도 빛도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안에서 풍족해지는 자의 길. 나는 게으른데도 욕심이 너무 많다. 부지런히 욕망한다. 누워있으면 자꾸만 많은 생각들이 나를 휘감싼다. 그리고 불안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위해서든 나를 위해서든 뭐든 해야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자꾸만 스트레스가 된다. 그래서 결국 그 종착지에 무엇이 놓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존재감을 스스로 확인하고 동시에 세상에 증명하기 위함이다. 이 한문장을 위해서 나는 살고있다. 지금도 그렇다. 하나님은 애초에 내 인생에 필요자체가 없는 존재였다. 그렇다치고 그런 목표를 거머쥐기 위해 삶의 원동력을 내는 것은 좋으나 결국 도달하게 되는 곳을 상상해보았다. 결국 나는 목표를 거머쥔다. 나는 내 스스로가 쓸모있는 존재, 멋있는 존재, 말하고 목표한 것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행했고 이루어낸 존재가 된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 뿐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를 인정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신이 아니니까, 그런 여론까지 컨트롤 할 수 는 없는 일일 것이다. (내가믿고있는 예수그리스도 조차 모든 이들이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만들지는 않았으니까, 어찌보면 신도 할 수 없는 일 혹은 하지 않은일로 남겨두었다고 볼수도 있다)


괜찮은 삶이었구나, 하고 만족스럽게 죽을수 있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여러가지 문제가 떠오른다. 일단 그렇게 태어나 가신 이들이 너무도 많다. 너무너무 많다. 관심종자로 태어나서 정말 독보적인 관심을 받아 그 관심으로 채운 나의 존재감을 만족감으로 치환하려고 보니, 그 관심이라는 것이 애초에 상대적이고 제한적이라, 굉장히 곤란하다. 훌륭하게 자신을 증명해내고 세상에 기여하다가 죽은 인간이 이미 썩어나도록 많다. 그래서 그 중에 하나가 된들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나는 애초에 태어난 이유가 나의 이름이 제목이되는 위인전 한권의 출판에 있었던 것인가. 누군가에게는 갓 끓인 라면냄비의 받침이 될. 다시 생각해보니 깨달았다. 내가 삶의 이유를 스스로 찾았던 건, 태어날 때부터가 아니라 살면서부터 였다.


살다보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를 고깝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인성이 문제가 있었건 내가 정말 모질이 였건 상관없이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내 태도와 내 생각과 내 행동이 달라질 때 그런 이들조차도 설득시킬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재미있었던 것이다.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 생겨난다는 것. 성장할 수 있다는 것. 흔히 서비스되는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처럼, 재미를 느꼈던 것이다. 내가 살아가면서 내가 살아갈 방향과 이유를 그 재미를 통해 만들어낸 것이다. 어쩌면 너무나 경솔한 착각에서 나의 인생의 이유를 결론지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왜 사람들의 인정을 위해 내 목숨을 걸어야 하나? 그냥 게임을 해서 만족감과 재미를 얻으면되지 그까짓걸 굳이 인생을 걸고 증명해야하는가?


그 다음, 내가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고 느낄 때의 나는 또다른 목표가 생기거나 필요해질 것이다. 또다른 목표가 생긴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범우주적인 목표이기에 세상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하는 경지에 올랐는데도 목이말랐을까, 그 인생이 슬슬 불쌍하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목표를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은 쉬운 다른말로 하면 공허해진다는 것이다. 얼마간 감기바이러스로 몸이 아프면서 느꼈다. 할 게 없는게 얼마나 괴로운지를. 자살의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살아있는 데, 그 살아있음이 짊어져야하는 길고 긴 시간을 버텨내기에 ‘이유없음’이 주는 고통이 너무 커서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사실 살아야할 이유가 솔직히 없다. 그리고 그 문장은 어쩌면 이 세상이 존재하는 근본, 우주의 무한한 팽창 그 시작지점과 맞닿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저 존재한다. 거기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누군가는 이것을 번식이라는 본능이라고 하는데, 그 단어에는 뭔가 새빨간 이미지라도 풍긴다. 그런데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면 너무도 무채색의 중립성만 느껴진다. 마치 잔인하리만치 객관적인 시선으로 나의 존재를 감정해 내려지는 결론처럼, 거기엔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솔직히 말해 없다.


그래, 그게 ‘없다’기보다는, 다시말하면 ‘알수없다’에 가까운 것 같다. 왜냐면 나는 만든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진 존재니까. 의도에 대해서 묻는다면 답답할 수 밖에 없다. 생각을 확장하다보니 멀리멀리 여기까지 왔는데, 간단히 설명해보면 이렇다. 결국 나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 삶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조금도 아는 것이 없으면서, 살면서 경험한 짧은 것을 토대로 어떻게든 결론을 맺어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큰 문제가 된다고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 전력을 다해서 살아가지고 결국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아주 크게 성공을 해도 그 결과라고 따라오는 것이, 사람들이 인정하는 훌륭한 삶, 그것도 아주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길거리의 쓰레기처럼 채이는 위인이라는 이름의 결론이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죽음 그 이후에는 어떤것들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그런 무지 속에서, 죽는다. 열심히 쌓아올린 돈과 명성과 가치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문장앞에 겸허히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이름석자로 족해야한다. 결국 하고싶은 말은, 인간이 자기 자아를 추구해서 살아가는 끝에 마주할 수 있는 어떤 고매한 결론이라는 게 이게 다겠구나 싶은거다.


지금 이렇게 묵상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이렇게 발악을 하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도 괴롭다. 계속해서 나의 의지가 이렇게 올라온다. 그리고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과 결부되어지길 바라고 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인생의 최후는 이렇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나머지가 없다. 결론이 안남는다. 그냥 죽는 것이고, 지옥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른다. 그냥 죽는다. 허무하게.


나는 여태 내 자아를 통해 세상을 바라봤다. 그리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부정했다. 이미가진것들만으로도 충분했을 수 있는데. 고쳐냈다. 그리고 발전하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이 들의 삶을 계속해서 훔쳐보았다. 질투했고, 그것을 내 것으로 삼고자했다. 결함이 있는 나의 모습을 메꾸고자 노력했고,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싶었는데 아주 깊은 내면의 심연은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거듭 나에게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진 것을 보면서 불안하고, 흔들렸다. 욕망은 끝이 없고 나는 무엇때문에 이렇게 내가 불안에 떠는 것인지 도통 알수가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왜 불안에 떠는가? 다시 생각해보니까 내안의 감출수 없는 결함들 때문이 아니라 곧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을 현실의 잣대로 자꾸만 나를 가늠질 하기 때문이었다는 걸 알수있었다. 현실은 어쩌면 그림자다. 고대의 철학자가 이데아를 이야기했듯이, 현실은 견고히 짜여진 직조물인 듯 하지만 그 안을 헤집어보면 너무도 허술하다. 우리가 부르는 이 현실이라는 것 또한 어떤 패러다임안에 갇힌 허구다. 그냥 믿어지는 바 라는 신념에 의해 창조된 무엇이다. 물론 그것이 현실 그 자체를 설명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믿는 현실 말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 우리가 믿는 현실 안에 갇혀서 산다. 그래서 불안하고 괴롭다. 곧 있을 시험의 당락에 불안하고, 다하지 않은 병역의 의무에 불안하고, 만남에 불안하고, 자기계발에 불안하다. 불안에는 끝이없다. 그런데 그 불안이 너무도 허술한 극장안에서 일어나는 허술한 불안이다.


글이너무 길어져 결론을 얼른 맺어야한다. 허술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 허술한 장치에 계속 넘어가는 인간은 너무도 허술하다. 지금 내가 그렇다. 다시 말씀묵상을 한다. 왜이렇게 길게 쓰게 된걸까. 생각의 해부를 한번 하고나면 당분간은 같은 트릭에 넘어가지 않을거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지금 당장 내가 엄청 신실해지지는 못해도 하나님을 필요로한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하나님 그 자체를 필요로 한다고 고백하고 머리로 알고있으면서도 실은 이 글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있다. 알고있는데 뜻대로 안되는게 인생의 비극이고 그것은 지속적으로 겪어내야만 하는 무한의 회랑속 끝이없는 배회다.


그래도 다시 묵상할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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