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나사로를 수십번 죽였다

20300312 말씀묵상

by Daniel Josh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6:19-31)

빈부격차가 심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알랭드 보통의 <불안>을 읽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가난한 것이 인격의 문제로까지 간주된다.
덕분에 태어나보니 귀족이거나 노비였던 전근대의 사회에서는 애초에 느끼지 않았을 인격적 박탈감을
현 사회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만 해도 견디기 어려운데,

사회적 시선 역시 이들 가난한 사람들을 달갑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교육의 평등, 기회의 평등과 균등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허락되는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하면서
좋은 직업이나 많은 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따내지 못하는 것은 환경적 요인이 아닌, 오로지 개인의 게으름 때문이라는 원인추적이 논리적으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교육받고 자라나 지금 살고있다.

나 역시 인정받고 돈이 많고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다.

소셜살롱에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보며 더욱 느낀 것이 있다. 영화 [기생충]에도 나오듯, 사람은 위로 올라갈수록 품위가 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지고 볶는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소득수준과 명예수준을 계산하며 재고 따졌던 것은 아니지만.

이 세상의 불편한 진실이란, 가진자가 더 가지게 되고 가진게 없는 자는 있는 거 마저 뺴앗기는 모습이 맞다. 어울리기 힘든 인격을 가진 사람은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어떤 인격적 결함과 결핍, 그리고 직업이든 가족이든 환경적으로도 많은 결핍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었다.
(그렇다고 잘나가는 치들과 어울리려 발버둥을 치는 짓도 하지 못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나는 대화가 통하는 사람, 지능이 높은 사람,

수준이 맞는 사람과 만나 즐겁고싶지,
찌질한 인간들, 질투많은 인간들, 능력없는 인간들, 공감능력 없는 인간들, 유치한 인간들을 만나서
시간낭비하고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다.


그래서 더 내가 잘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만 내옆에 올 수 있도록.
내가 유익하다고 느끼는 관계들 만 내 주위에

남기고 정리하고 싶어서.

내가 부자라면 나사로를 도왔을까?
이기심이 점점 강해질수록 자기 유익을 쫓게되면서, 타인의 고통에 거리를 두려고하게 된다.
같이 아파하는게 아니라.

내게 그 고통이 전염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눈을 감는다.
가까운 거리에서 그 고통을 목격하고싶지 조차

않아서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성벽을 쌓는다.
그렇게 서로 왕래할 수 없는 구렁텅이를 만든다.

예수님은 가장 작은자의 모습으로

나에게 찾아오신다고 했다.
나는 그 가장 작은 자들이 나에게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살기를 롤모델로 삼고있다.

천국가긴 글렀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기는 커녕 내 근처반경에 혹시라도 해가 될까, 코로나에 감염될까
노심초사하며 배척하고있다.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정말 무정한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다고 느꼈다. 타인의 고통을 사유하는 마음, 공감하는 마음에 대하여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다. 끔찍하게 연약한 속성을 지닌 사람과 상황과 어떤 것들이 나의 마음과 행동을 조종하려고 하는 느낌을 혐오했다. 민망하고 부끄러워했다.

그들의 고통받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실 모습이 아니다.

사랑하면 호의를 베푼다.

사랑하면 섬긴다.

사랑하면 공감하고 그를 가까이두며

따뜻한 말을 건넨다.

어쩌면 나의 상처받은 마음이

좀처럼 열리지 않은 것일수도있다.

분명한 것은 경계하고있다는 것이다.

나를 최우선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는

그 어떤 것도 수용하고 용납해줄 수 없다.

천국을 믿는 믿음이 나에게 없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 나의 무정함에 소름이 끼친다.
이미 나는 내 가족중에 가장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있다. 나의 누나다. 누나는 아프다.

코로나가 창궐하기 전부터 벌써 5년째 집바깥으로 나가지를 못하는 사람이다. 손을 주먹모양으로 오므려 펴지를 못한다. 몸이 먼저 아팠으나, 우울감과 정신문제로 번져서 자주 피해의식과 망상증세를 보인다. 나는 그런 누나의 소름끼치는 허약함과 연약함에 자주 혐오감을 느꼈고 관계속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믿지않는 일반 대중 사람들이 보아도 무정한 모습이다.


누나를 사랑하는게 나에겐 너무 힘들다. 그러나 조금씩 순종하려고 한다. 묵상집을 보는데 자기 누나가 조현병을 앓아 가족들이 참혹하게 지냈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실 때 까지 주님을 원망하기만 하다가 이제는 그 믿음의 환경이 자기에겐 큰 축복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있었다. 그런 고백을 하는 것을 보고 많은 공감과 위로가 되었다. 이미 앞서 그런일들을 경험하는 사람이 있었다.

남들 다 멀쩡히 살아가는데 나에게 주어진 이 시련이 너무 크고 괴롭게 보였다.
그러나 이 브레이크가 나에게 필요했다는 생각을 한다. 말씀을 읽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며 점점 나는 변했다. 범사에 나를 위해 살기를 관성으로 삼으면서부터 정말 끝도 없이 내 위주로 상황을 해석하고 반응하는 차가운 인간이 되어갔다. 그것이 두렵다.
매일 말씀 한구절, 묵상하고 듣고 기도하고 간청하고 간구하면서 내 이기심은 덜어내고 주님의 사랑이
나에게 스며들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안에서 생명의 열매가 맺힌다.
내 생명과 내가 돌봄을 맡은 생명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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