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익한 종, 써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라고요?

세상에 그런 불합리한 관계가 어딨어!

by Daniel Josh

202003013 말씀묵상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눅17:1-10)


내가 작은 사람일 때에는, 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들을 꼭꼭 그렇게 기억해두었다.
난중에야 그걸 ‘상처받았다’라는 말로 표현한다는 걸 알았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상처로 담아두고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든지, 그것이 인격형성에 지나친 영향을 미치든지. 그렇게 한다.
어린시절의 나는 뭐낙 엉뚱하기도하고 공상이 많아 또래 아이들이나 주변사람들이 그런 워딩을 쓰는 것에
의아했었다. 상처받는다는게 뭐지? 사는데 쓰는 개념자체가 달라서,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불합리하게 나를 억압하고 통제하고 괴롭게 했던 앞선 이들에 대해 분노를 품었었다.
상처받았다는 표현은 상대방을 가해자,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피해자가 되기 싫었다.
그래서 상처받았다라는 말을 무의식중에 쓰지않으려고 했던게 아닐까 싶다. 가해자는 죄책감을 느끼지만
피해자는 수치심을 느낀다고. 어떤 책에서 봤던 것 같다.
피해자가 그런 갈등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잘못한 것은 거의 없으나 피해자가 되었다는 것 만으로
피해자는 갖은 수치심과 자존감의 깊은 손상을 입어야만 한다.

말이 좀 샜는데, 무튼 나는 내가 한참 아무것도 모를때부터 자라날때까지 나에게 실족함을 주고
불합리한 가르침을 통해 나를 괴롭게 했던 이들을 아직까지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속으로 저주하고 저주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개의치 않게 되었다. 무심한 것이다.
입장이 바뀌니까 사람이 생리적, 본능적으로 행동을 하게되면서 자연스레 똑같은 실수를 하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과거의 그때, 나에게 물리적 정신적 피해를 주었던 그 사람은, 아주 냉정한 온도로 나를 보고있었구나.

나의 행동에 실망해서 죽어버리든 말든, 아무런 상관 없는 정도의 거리에서 상대방을 보고있구나 싶었다.

조금은 죄책감을 느끼고 아주 조금은 마음에 걸림돌이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직접 겪어보니 그렇지가 않구나.

예수님도 인정하신다.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사람은 태어나서부터 이미 서로에게 깊이 얽혀들어간다. 풀래야 풀수없는 진한 인연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린 서로에게 기대와 이상을 품고, 그것을 만족하거나 실족하며 관계를 풀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이 세계는 천국이 아니므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리고 실족하게됨은 어쩔수없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실족하게 된 바가 얼마나 큰 죄악이고 안타까운 일인지.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그러나 반대로 나에게 잘못한 사람은 몇번이고 용서해주라고.
나는 반박한다. 사람이 그렇게 살수는 없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처럼 족족 되갚아주는 삶을 사는건 피곤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나도 태도가 바뀔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 기초적인 현상이다.
우린 서로에게 영향을 주니까. 함께 어울리는 사회공동체에서 독보적인 무언가가 되는 건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사이에서 구분된 삶을 살것을 주님앞에 요구받는다.

이 모든 말씀들 뒤에 주님은 이야기하신다.
겨자씨한알만한 믿음만 있더라도 이게 가능할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살수있다.

마치 그 삶이란, 외부사람들이 보기에는 초인적인 삶을 살아내는 것 처럼 보일것이다.
나는 실족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신경써야하고,
동시에 나를 실족시키는 사람들은 한계치가 없이 용서해주어야하고.
마치 영혼이 저당잡힌 것 처럼(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봉사하고 헌신하고 섬기는 삶을 산다는 게.

우리는 당장 먹고살기위해서 어떤 노동을 하고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 삶을 산다.
그러면서도 불만족하는 게 일상인 사회에 살고있다. 내 노동의 가치가 이것밖에 안되는가?
내 노동으로는 이 더러운 국가에서 만족할만한 삶의 수준을 결코 누릴 수 없구나. 라며.

그런데 그런 거룩한 섬김을 감당하면서도 전혀 아무런 보상과 대가를 바라지 않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예수님은 그것에 대해도 말씀하신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종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고.

무익한 종을 그저 써주시는 것 만으로 감사하다고. 고백할 것이라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관계의 역학을, 그냥 언뜻 보기로는 추구하기는 커녕 설명할 수 조차 없다. 낯부끄러워서.
이렇게 불합리한 관계까 어디있는가. 21세기에.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영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성령이 임하고 나의 마음이 감동되는 순간 나는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앞에 엎드린다.
많은 섬김을 감당할 수 있는 착한마음을 품게되고 그것을 대가로 어떤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영혼이 주님을 앙망하고 더 목마르게 되며 나의 티끌하나조차 예민하게 주님앞에서 회개하게 된다.

세상의 가치관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삶이고 태도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가능하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다면...
그런 작은 믿음조차 버거워하고 힘들어하는 주님앞에 오늘도 말씀 한모금 품고, 한발자국 더 나아가려고한다.
주님 나를 변화시켜주세요. 그리고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적용하게 해주세요.

적용할 것
-실족하게 했던 관계들 생각하고 그들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요즘 가족들과 말할 때 감정이 섞이고 답답한 마음을 표출하기 급급한데 그것 내려놓기.
혈기 내려놓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용납하기. 말 예쁘게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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