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도, 감사도 모르는 놈

아쉬운 건 내가 아니란다

by Daniel Josh

20200314 말씀묵상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17:11-19)

나병환자 열 명 중에, 예수님의 치유를 받고 다시돌아와 감사드렸던 사람은 오직 한 사람이었다.
그 한 사람은 심지어 이방인이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육신의 치유를 받아서 열에 아홉은 자기 공동체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회복하는 은혜를 누렸으나
그들은 주님을 잊어버렸다. 감사하지 않았고, 이런 능력을 베푸신 예수님 그 분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사마리아 출신 이방인 나병환자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행동,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믿음을 주님앞에
인정받아 영적구원에까지 이르게 된다.

예수님을 믿으면 인격이 변한다.
그것은 어떤 인격적 자질이 한단계 나아지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늘 연습을 필요로 하고, 인격의 변화도 이런 연습의 성취로 이루어질 수 있겠다.
물론 영적인 부분도 연습이 필요함이 마찬가지인 부분이 분명 있으나.
하나님의 원리는 사람의 논리, 물리적인 인과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육신을 기반으로 하나님의 영적세계를 유추하는 시도 자체가 아주 인본주의적인 생각이다.
도리어 하나님의 원리에서 육신의 원리가 나오는 법이다.

예수님을 진정 믿으면 감사하는 사람이 된다. 인격이 더 착해지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아, 내가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나의 관계된 이웃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자.’
라고 깨달음에 의해 노력해서 인격적 성숙을 이룩할 수 도 있겠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내 삶이 변했어요] 라거나
[하나님를 만나고 그 사람이 변했다더라] 라는 이야기들에서 말하는 ‘그 최초의 변화’는 그런 종류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예수님 앞에 진정한 회개의 은혜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존재자체가 변한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인지하는 과학, 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변화가 사람안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은혜가 몸으로 깨달아지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람이 다시 탯줄을 끊고 태어난다.
육체적으로는 죽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물론 그게 곧바로 천국직행티켓을 끊은 양, 성자로 거듭나서
이후의 삶도 완전히 극적으로 변화된 채, 후광이 비치는 삶을 사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천국에 들어갈때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세계, 이 세상은 영적 싸움이 기본이다.
그렇게 살아가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으로 주님앞에 힘쓰는 식이다.
하여간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세상을 인식하는 기본적인 틀 자체가 달라진다.
나의 삶은 죄된 삶이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삶을 살았고. 내가 나의 이웃과 나 자신에게 얼마나 위해되는 사람으로 살았는가.

그 깊은 영혼의 탄식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나를 구원해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실제적으로 깨달아지는 단계에 이른다.
그러면 결국 나오는 고백은 감사, 그저 감사, 감사합니다. 죽도록 감사합니다. 가 된다.
감사 없는 삶은 믿음 없는 삶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예수님을 믿어서 자신에게 오는 이득을 생각한다.
먼저는, 신앙를 가지게 되는 과정이 +에서 +를 추구하는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가령 예를 들어, 내가 평온하게 살고있는데 굳이 교회를 찾아가서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지는 않는다.
보통 신앙을 가지게 되는 계기는 -에서 +로 가는 식이다.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든지, 본문에서처럼 나병이 걸려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죽음의 위협앞에 놓이게 된다든지 하는 상황에 놓인다.

그러면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불가항력적 상황에 신을 찾게된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임해서 그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되곤 한다.
그리고는 육신의 치유를 경험한다. 나병환자의 나병이 눈녹듯 씻겨나가는 것이다.
그의 삶은 -에서 +가 된다. 이 구간이 중요하다.
사람이 밥 먹기 전과 후가 다르고 화장실 가기 전과 후가 다르듯이.
결핍이 해소가 되면 사람은 언제 자기자신이 마음과 몸이 궁했냐는 듯 자연스레 지금의 변화된 상황에 적응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생각한대로 살아야지, 살아지는대로 생각하면 안된다.)
그렇게 자기를 변화시켰던 초자연적인 은혜와 그 능력의 하나님을 잊는다.

이건 다분히 육체적 삶을 사는 우리가 범하는 기초적이고 치명적인 실수다.
또한 비극이다. 삶의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고 살면 인생은 순식간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삶은 나름 만족스러웠노라 회고하며 죽는다.
사람은 태어난 이유가 있다. 사람은 주어진 삶에 대해 마땅히 고민해보아야한다.

본문에서 치료받은 아홉명의 나병환자들은 다시 자기 기존의 삶의 굴레로 걸어들어갔다.
육신은 잠깐 나음을 입어봐야 결국 다시 쇠한다. 시한부의 삶이 조금더 연장된 것 뿐이다.
‘육신의 삶, 그 이후’에 대한 고민은 또 또 그렇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육적구원 이후, 진정한 은혜는 영적구원에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것,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은 결국 모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양약이다.
자기가 죄인되었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 이 땅에서의 삶은 다시 고통과 피로의 연속이다.
자기 죄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가 보이고나서 그제서야 감사하는 삶을 살수있다. 그리고 그 감사하는 삶은
삶의 본질적 변화를 뜻한다.
이 본문 말씀은, ‘은혜를 받았으면 마땅히 개념이 있는 사람이라면 감사인사를 해야한다.’
라는 이야기가 절대 아니다.
은혜를 감사하게 여길 수 없는 사람은 여전히 표면적인 인생의 문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괴로운 영혼이며

예수님을 통한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경고는, 감사하지 않는 삶이 초래하게 되는 종국의 파멸을 시사한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지금 하루하루 삶에 일희일비하며 의존해있는 것이 아주 큰 괴롬이다.
나는 지옥에 살고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나의 삶에는 감사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부담을 가지고 있고. 주위 관계들에서 내가 주님의 제자로, 섬김을 감당해야하는 일에
피로를 느낀다. 나의 십자가에 대한 당혹과 불편한 마음으로 나는 계속해서 비참해지는 삶을 살고있다.
아픈 누나의 괴롬을 보면서도 못 본 체할수 밖에 없는 나의 이런 죄된 모습으로 나는 괴로워하고있다.
하루하루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위해서, 성공하기위해서 달려가나가는 길이 즐거운 한편 괴롭다.
나를 안정적으로 지탱해줄 수 있는 삶이란, 뿌리부터 올라오는 감사에서야 비롯될 수 있다. 때문에 한 편만 돌아서도 나는 괴롭다.

인생이 괴롭고, 사람이 괴롭고, 변하는 상황이 괴롭다. 내 안에서 충만한 어떤 은혜가 없으니 계속해서 주어진 보이는 것들에 매달리게 될 밖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병이 치료되어서 얻는 인간적 기쁨과 위로보다도 더.
내 안의 목마름이 해결되기를 원한다.

이런 깨달음을 주시고, 주님이 나에게 더욱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해주시고,
감사하는 삶에서 모든 선한 것들이 나온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그리고 그것을 지금 당장 실천하도록
감사하게 해주심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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