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예수님- 계쎼요?
2020.03.26 말씀묵상
19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20 이에 그들이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21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2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하니
23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이르시되
24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25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6 그들이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놀랍게 여겨 침묵하니라
(눅20:19-26)
예수님을 두려워 하지 못하게 된 인간 만큼 불행한 인간이 있을까.
백성의 여론은 두려워하고, 로마의 권력은 두려워 하는데,
자신의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데,
자기가 섬긴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근본은 두려워하지 못하는 이 아이러니함.
복음은 신비로운 것이다. 삶의 진실은 이렇게 진흙속의 진주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에게 존경받지 못하게 되는 것인가.
사랑과 인정을 기대하는 일이 어려워지게 되는 것 일까.
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는 다른 믿음으로 사는가?
하나님이 나의 삶을 아주 오래, 많이 참으신다는 것을 알고있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를 이루는 모든 조건들이 와르르 부서져내린다면, 나는 하나님만 붙잡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그런 가정을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물론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갑자기 천재지변으로,
혹은 그와 비슷한 수준의 불가항력으로 자신이 망하게 되는 일따위를 평소에 상상하지 않는게 당연하지만)
나는 지금의 삶에 몰입하고 열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국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처럼.
아직 내 삶에, 극적인 연출을 위한 무대 빌드업이 덜 된 것일까?
말씀을 읽을때마다 잊고 지내는, 잊고 지내고 싶은 진실을 늘 상기하게 된다.
이대로 나의 삶과 나의 성공, 나의 사람들과 함께 행복한 삶. 현실의 기쁨과 만족에 머무르려는 나의 마음.
그런 세속적인 가치관들을 말씀앞에서 계속해서 점검해보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있는가. 회개해야할 일이 있지않은가.
그동안 무척 바빴다. 근 이주일 간, 사이드프로젝트 전시회를 준비하고
책자 제작 및 발주를 넣느라고, 또 파티를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너무 식상한 핑계를 대는 것만 같다. 큐티를 이렇게 후순위로 미뤄도 되는걸까?
나에게 하나님은 어느정도 위치에 있는걸까.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멀리돌아왔지만 결국 지금 말씀묵상을 하고있는 것이 은혜고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수도 있다. 동시에 나는 주님을 섬긴다고 이야기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지않고 후순위로 미뤄내는 죽을수밖에없는 죄인이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에 대해 적는 란 이 있었다.
무슨 마음의 감동이었을까. 지금은 조금 공감이 가지않는 마음이었으나 나는 거기에 신앙을 적어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
저는 제가 사는 이유를 그리려고 합니다.
저는 신앙이 있으나 제가 믿는 신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려나갈 겁니다.
라고 적었다. 말그대로 그때는 어떤 감동이 나에게 있었던 것 같다.
삶이란 이렇다. 감동이 있고 또 식으며, 변한 스스로에게 또 놀라고.
또 다시 변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을 품고서 앞으로 나아가는.
하나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이유를 적어내자
프로젝트에 함께 했던 팀원 중 누군가 나의 신앙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다.
집안이 다 기독교라, 종교가 기독교긴한데 하나님을 만나본적은 없는 듯.
기독교를 어떤 문화로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이런사람이 주위에 많다.
하나님은 나의 부족함을 이미 알고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이미 짜놓은 하나님의 판에서 살아가는 삶이어도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말씀묵상의 순간, 복음전도의 기회, 남에게 베푸는 선,
그런 순간들을 기억하시려고 나를 등떠미시는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계속 살아가고 있다.
두려움으로 말씀앞에 서지만 늘 주님은 나를 그자리에서 기다리시며 두팔벌려 안아주시고
나는 값을 따질 수 없는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를 드린다.
신앙에 대하여 어떤 답을 내릴수가 있을까?
나조차 내 마음대로 살아가기 벅찬데. 가장 가까운 존재인 나조차도 이렇게 갈피를 잡기 어려운데.
신앙에 대하여. 사람의 믿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것과 나의것,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하여.
구분하고 판별하는 건 어떻게 가능할까? 손쉽게 판가름하고 논의를 제기하는 건 어쩌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올무에 빠지게 만드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자기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던 서기관이
가장 천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을 보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나의 삶은 하나님에게. 내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들을 주님께 드리고.
나의 삶이 허락된 바까지 바라보며 주님을 섬길수 있기를.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서부터 주님이 보여주신 앞길에 충실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