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은 잘 안나옵니다만
2020.03.27 말씀묵상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7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21:5-19)
성전의 아름다움은 곧 세상에서 세워지는 권력이고, 거의 모든 대부분의 사람이 인정하고
반박할 수 없는 자존심이다. 세상적인 배경은 이런 메리트가 있다.
아주 잠시나마, (짧은 우리네 삶의 기준으로 보면 길다고 생각할 수 도 있다.) 나를 지켜주고
나를 세워주고, 나를 보호해주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것을 볼때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것이 곧 무너지리라고. 돌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즉 완전한 0이 되는 것을 말씀하신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영적인 세계를 알고 숱한 사례들을 듣고 경험한 나로서는 이 일이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당장 내 친 누나는 부족할 것 없는 인간관계와 학벌, 창창한 미래를 두고 몸과 마음이 하루아침에 병들어
벌써 몇년간 고생중이기 때문이다. 누나의 삶에는 빛도 희망도 없는 암흑의 굴레만 존재한다.
늘 같은 고민을 하고 나에게 물어온다. 모든 자신 주변의 인간관계가 본인을 공격한다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큐티책을 읽으면, 눈부셨던 배경의 삶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더러 볼 수 있다.
너무 흔하다 못해 발에 치일 정도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성공과 나의 삶에 대한 기대를 하는
한편 그것을 온전히 믿지는 못한다. 주님이 치시면, 모든 것은 먼지로 돌아간다는 것을 적어도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속의 조건들은 견고한 듯 보이지만 터무니 없이 모래성이다.
그럼 나는 어찌해야 할까?
그렇다고 모든 나의 세상의 일들을 때려치우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겠다 라는건 모순이다.
먼저 그런 능력주의적인, 시한부적인 신앙을 사는 이들의 문제점은, 가장 기본전제부터 흔들린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조차 이들은 고민해본 적 없이 그들이 봐온 경험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 삶은 이럴 것이다’ 지레 짐작으로 판단한다.
집회를 다니고,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전도를 하고. 그들에게 ‘일상’이란 없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신앙을 말하지 않으셨다.
나의 자리를 지키며, 땅에 발 디딛고 살지만 늘 하늘소망을 품고 삶을 사는 것.
섬김을 몸으로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 신앙과 삶은 결코 분리되어있지 않다.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건 거창한게 아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적인, 신앙적인 행동은
당연하거니와 내 모든 일상적인 삶 또한 주님의 것이다. ‘신앙적인 행위’라고 범위를 좁혀 생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축소, 과소평가하는 것이 된다.
나의 모든 삶이 주의 것이라는 기본전제가 없으면 계속해서 모순된 판단과 결과 끝에
모순된 행동으로 모순된 삶을 살게 된다.
말씀을 읽을 수 있음에 감사하다.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라고 묻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책망하지 않으셨다.
인정해야한다. 우리 수준은 어쩔 수 없다. 예수님이 은혜를 베푸셔도 다시 돌아서고
주님의 말씀이 없이는 주님을 바라보지도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 매일매일 죄를 짓는
그런 존재인데, 억지로 생각있는 척 있지도 않은 지혜가 충만한 척 할 필요 없다.
세속에 사는, 죄에 물들 수 밖에 없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나야 주님이 보인다.
주님의 형언할 수 없는 은혜가 보이는 것이고. 우리는 애초부터 주님이 아닌 자기의 잘남으로
사는 것을 허락받은 적이 없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주님께 물으면 된다. 감당안되는 일이 있으면 주님께 맡기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어여삐 여기시는 게 우리 주님이시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이 시간이 귀하고, 내가 바로 말씀대로 삶을 받아들이고 순종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 물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이러한 앞으로의 계시와 예언에 대하여 나는 어떤 마음인가.
인내로 영혼의 구원을 얻으라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 그리고 그 당시와 지금은 이렇게 배경이 다르다.
주님의 말씀이 있고나서 바로 기독교 박해가 몇백년간 이어졌다.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대가로
목숨을 지불해야 했다. 저 당시 저 말씀을 하고 있을 때 각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심란했을까. 상상해본다.
나는 지금 나에게 믿음을 요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실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의 믿음의 시험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의 결국은, 믿음의 시험끝에 인내함으로 영혼의 구원을, 주님의 통치안으로 들어가는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힘으로는 안되니까, 주님께 계속 날마다 묻는 이 삶을 지속하는데 힘써야겠다.
그것이 지금 내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인듯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