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었을까?
2020.04.08 묵상
32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눅23:32-33)
종국에는 두 흉악범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시는 예수님을 본다.
그 자리는 내가 달려야할 자리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히 죽음을 맞이하신 그 자리.
최근에 급 우울해졌던 기억이 떠오른다. 감정이 어찌나 날이 서서 파괴적으로 치달았는지.
호르몬의 작용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우울한 지난 상처들을 끄집어내서 분노와 냉소로 마음이 괴로웠다.
세상이 왜이렇게 나한테 가혹한지를 떠올리며 슬퍼했다. 과거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는 아무 짓도 안했는데 왜 나를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하고 혐오해서 그런 심한 말과 행동을 했었는지.
그를 원망하고 비난하고 욕했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분노를 가지고 메모장에 감정의 찌꺼기들을 배설했다.
흉악하다. 잔인하다.
사람에게는 사랑과 화평을 추구하는 온화한 모습도 있지만
반대로 파괴적이고 더럽고 추악하며 속물같은 모습이 공존한다.
그리고 내가 상처받았던 그 모습은 한 없이 잔인한, 더러운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 죄악된 모습이 나에게는, 또 누군가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죽고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증오와 슬픔은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만한 잘못을 짓지 않았다는 데서 더욱 증폭된다.
왜 나한테 그런 심한 짓을 했을까?
뭐가 잘 못 되었던걸까? 그 사람은 왜 그렇게 잔인했을까?
버스에서 창밖으로 바람을 쐬며 생각은 저편에 다다랐다.
‘나는 과연 다른 누군가에게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렇다. 그 사람이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엔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실이었다.
그 흉악함과 잔인함, 추악함, 더러운 모습은 인간 모두가 공유하는 특징이었다.
그리고 역시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 이었다.
새삼, 내가 겪었던 상처의 경험을 되새기면서 사람이 어찌 그렇게 흉악할 수 있을까를 떠올리다가,
스스로의 잘못을 들여다 보게 된 꼴이다.
증폭되고 전이되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이내 잦아들었다.
그래, 나는 크나 큰 죄인이었다.
내가 받은 이 상처의 괴로움을 잊고 또 다시 누군가에게 그런 비슷한 상처를 주었다.
괴로워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면서도 무심하게 비웃는 그런 추악한 사람이었다.
내가 그 누구보다도 흉악한 죄인이었고, 그 십자가의 형틀에 달려야할 죄인은 나였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가증스럽게도 그 모든 말씀과 도를 뒤로하고
사랑과 헌신을 베풀어야할 사람을 미워하고
가장 작은 자로 오셨던 예수님을 능멸했다.
나는 죽임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그것이 인정되었다.
그 죄악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면서 죽으신 주님이 나에게 다가오신다.
긍휼을 구하며 그 발 앞에 엎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