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에 말씀만큼은 꼭 놓칠 수 없어
20200411 말씀묵상
1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 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 (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 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새벽에 여자들이 무덤을 찾아갔다. 예수님의 시체를 찾으려고.
그러나 갔던 곳에는 빛나는 사람 둘이 있었다. 그리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고. 생전에 말씀하셨던 것 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하시고, 그 말씀을 지키신다. 나와는 다르다.
신실하신 분이다. 그 분의 신실하심을 믿어야한다.
예수님은 마지막에 어떻게 말씀하시고 가셨는가.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시고 가셨다. 그로부터 벌써 2천년이 지난 지금,
내가 태어나 살고있지만. 예수님은 언젠가 다시 돌아오신다. 지금 이순간에도 나를 보고 계신다.
그 믿음을 놓치고 살면 안되는 것이다.
아무리 반응이 없어보이고 이대로 천년 만년 살것 같아 보여도, 종말은 온다. 속히 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 마지막 때는 코 앞에 왔다.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더 묵상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다른 여러 말씀에서도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말씀들은 다 참 트루다.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는 말씀도.
믿는자에게는 시련과 고난이 닥쳐올 것이라는 말씀도.
기도하는자에게 성령이 임하고 주님의 은혜가 임할것이라는 말씀도.
십자가의 길은 좁은길이고, 구원 받을 자의 수가 심히 적을 것이라는 말씀도. 다 그렇게 이루어진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 하는 부분이다.
주님이 다시오실 때를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올때에, 잔치가 열리는데, 사람들이 바쁘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오지않는다고 말한다.
갖가지 핑계를 대며,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분명 말씀하셨는데도 마지막 때를 회피하고 미루다가 결국엔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고 그렇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두려운 말씀이다.
가장 작은 자의 모습을 하고 나에게 오신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의 때에.
네가 나를 대접하지 아니하였다 라고 말씀하신다고 했다. 그 가장작은자로 찾아온 예수님을 내가
알아보지못하고 선함으로 대접하지 않아서.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은 행동이 따른다. 행동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주님이 말씀하신 그대로를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그 믿음.
어떻게 하면 도달할 수 있을까? 도달하고 완성하기는 부족할지라도 어떻게 하면 바울처럼
이미 다 이루었다 함도 아니지만 다만 믿음의 푯대를 향하여 영원히 달려나갈 수 있을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한다. 말씀을 매일같이 묵상해야하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있다.
말씀을 지속적으로 주님앞에서 듣지않고 노출되지 않으면 나의 삶과 믿음의 삶, 세속의 삶과 영적인 삶이
동떨어져 가까워지지 못한다. 덩달아 주님을 믿는 믿음도 허약해져만 간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죄악된 본성을 깨닫는 것을 필수적으로 한다.
내가 지금 죄악된 모습이라는 것을, 지금 나의 모습이 문제와 결함이 가득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의 은혜와 구원, 그 대속의 십자가를 필요로하지않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잔뜩 죄악의 소굴에서 뒹굴다가 보면, 또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주님을 찾게되고
그렇게 또 한번의 영적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되니까. 죄를 짓고 주님을 잊어버리고 사는것도 나쁘지않구나
여겼었던 적이 있다. 뭘 모를 때의 이야기다. 이것이 신앙의 무한한 굴레인 줄 알았다. 크나큰 오해이다.
기본적으로 죄악이라함은 어둠이고,
어두운 곳에서는 무엇이 잘못되고 무엇이 잘되는 지 분간하기 힘들다.
익숙해지고, 무뎌진다. 교만해지고, 나 스스로에게 떳떳해진다. 점점 회개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런고로 주님이 나를 치시는 것은 은혜다. 주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이 은혜다.
말씀을 지속적으로 읽고 그 앞에 나를 노출할수록, 영적으로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예민해진다.
그러니까 주님 앞에 많이 나아갈 수록 자신의 죄악을 더 섬세하게 깨닫는다.
주님을 모르고 살면 그만큼의 죄악으로 내가 죄사함 받을 것이 많아져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는
완전히 반대로 오해하는데서 빚어진 실수다.
모든 것에는 단계가 있다.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는데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한다. 그 들음에서 믿음이 나고. 그 믿음은 주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이며
주님은 언약을 반드시 이루신다. 속히 다시 오실 것이고, 나로 인해 주의 잃어버린 생명들을 찾으실 거라는
그 약속 또한 이루실 것이다. 내가 청소년기, 청년기에 주님앞에 했던 고백들을 주님은 다 알고계신다.
조금 더 편견없이 주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 것에 감사하다.
누나집에 갔다왔다. 여전히 순종하기 힘들고 어렵지만. 그래도 부딪히고 있다.
내 능력으로, 아니면 어떤 환경적 조건으로 이 모든 갈등과 문제들이 한번에 빛을 보게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누나를 고치실 것이고, 더불어 나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주실것이다.
주님은 선하시다. 우리는 주님을 붙들어야 한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종말은 가까이 왔다. 주님을 붙들고 있으면 주님께서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실 것이다.